Numbers RAW novel - Chapter 211
제211화
술에 취해 잠이 들지 않으면 그는 죽은 사람들의 얼굴들을 꿈에서 끝도 없이 본다.
그 얼굴들은 점점 불어난다.
당해룡이나 그의 부하들도 있었고 어제만 해도 새벽에 깨어나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진가구, 끝내 주지 않냐? 정말 5억 달러래. 너, 그 돈 받으면 뭐 할 거야?”
“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난 말이야. 일단 중화대루의 식당에서 배 터지게 먹을 거야. 만날 싸구려 음식을 먹는 건 질렸어.”
이만수는 조직원의 돈으로 먹기 힘든 스테이크나 프랑스 요리 같은 걸 꿈에 부풀어서 말했다.
“난 먹을 건 됐어.”
“그놈의 미래 이야기야? 미래 같은 소리 하네? 그래도 우리는 저런 애들보다는 잘 풀린 거야.”
“잘 풀린 거라고?”
진가구는 밤인데도 뛰어다니는 난민 아이들을 바라봤다.
인도주의 단체에서 난민지구에 학교를 개설하긴 했지만 거기 다니는 난민 아이들은 진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대부분의 학군은 직업을 잡지 못하고 기본소득충으로 전락하는 판에 난민 아이들이 교육은 받아서 뭘 할까?
그러다 보니 난민들의 학업능력은 점점 더 떨어졌고 웡꺼에 진작부터 소년병으로 자원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진가구는 한하린과 자신의 아이가 웡꺼의 소년병이 되어 마약에 취해 나자빠진 광경을 상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만수는 종이쪽지를 보고 그 경찰 놈의 집을 찾다 말고 진가구를 바라봤다.
“너 요새 생각이 좀 많은 것 같다?”
“어, 나도 돈 쓸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 뭐.”
“그래 어디에다가 쓸 건데? 니 끝내 주는 여친 옷이나 화장품 뭐 그런 거 사주게?”
진가구는 한하린과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만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만수는 체잉꺼의 눈이기도 했다.
이미 진가구는 체잉꺼가 왜 굳이 이만수를 자신에게 붙여놨는지 눈치챘다.
이만수는 단검을 던지거나 근접전에 있어서는 끝내 주는 녀석이었고, 허튼짓하거나 잡입경찰인 걸 들켰다가는 이놈의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
진가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차라리 쎄잉꺼가 인사기록 카드를 들고 온 그날 정체가 까발려졌다면 시원하게 발악이라도 하다 죽을 텐데, 체잉꺼의 반응만으로는 신분이 발각되었는지 어땠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체잉꺼는 어디까지 알아낸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잉꺼는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진가구는 더더욱 수렁 속으로 깊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뭐해? 여기야. 노점거리 안쪽 한약상 뒤에.”
“그놈 이름이 뭐야? 우리가 아는 놈일 수도 있잖아?”
“이름? 난 처음 들어보는데? 췬헝마이.”
이만수가 췬헝마이라고 말하자마자 누군가 어둠 속에서 후다닥 뛰었다.
진가구와 이만수는 누군가가 뛰자마자 그쪽으로 달렸다. 이만수의 눈은 거의 먹이를 쫓는 육식동물 같았다.
도망치는 놈 때문에 편의점 간판이 쓰러져 플라스틱 조각이 튀고 새우탕 컵라면이 바닥에 철푸덕 엎어진다.
마침 술을 마시고 있던 관광객이 도망치는 놈의 티셔츠를 붙잡고 시비를 걸었다.
“너 뭐야 새끼야아!”
낮부터 술과 마약에 취한 한국인이 도망자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도망자는 뒤에서 쫓아오는 놈을 보고 작은 잭나이프로 푹하고 한국인을 찔렀다.
관광객이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푹 꿇고 관광객 일행이 소리를 지르면서 동료에게 달려온다.
도망자는 아직도 자신의 티셔츠를 잡고 있는 관광객을 발로 걷어차고 가죽 가공 거리로 달렸다.
독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찌르고 도망자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좁은 골목길을 척척 돌아 추격자들을 따돌리려고 했다.
“뭐, 뭐야. 뭐야.”
도망자는 바로 이진영의 끄나풀인 전항매였다. 그는 식빵 두 봉다리와 클램차우더 깡통 몇 개를 들고 있었고 등에 멘 백팩에도 다 음식뿐이었다.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이 끊기면서 난민지구의 식량이 오르고 있었고 그는 이진영이 준 돈으로 야금야금 비상식량을 모으고 있었다.
겉보기에 난민지구는 여전히 관광객들에게 음식과 술을 팔며 풍요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누구지? 웡꺼 놈들인가? 아니야. 조심해서 샀는데.”
췬헝마이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가죽 공장 한켠에서 숨을 돌리고 5백 밀리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는 식빵 봉투를 열어 껍데기를 우적거리며 먹었다.
전쟁?
전쟁을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식량이었다.
웡꺼의 공격부대 그 많은 놈들을 먹이려면 식량이 필요했지만, 밀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관광객과 롱꺼의 모든 병사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셨지만, 공격부대가 아닌 난민들은 서서히 목줄이 죄이고 있었다.
돈이 전부 병사들과 무기 쪽으로 흘러가고 방벽에서 들어오는 물자들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특히 췬헝마이처럼 조직에 속해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돈 벌 건수가 없는 사람들부터 식량난이 시작되었다.
이진영의 예상은 정확했다.
신간척지 난민지구는 독립국가는커녕 대한민국이 없다면 230만 난민을 부양할 수 없는 그저 난민집단일 뿐이다.
췬헝마이-전항매는 식빵 껍데기를 다 먹고 조심스럽게 골목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그때 이만수가 전항매의 멱살을 잡고 그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백팩에서 깡통 몇 개가 데구르르 구르고 다른 쪽에서 다가오던 진가구가 깡통 하나를 발로 밟아 멈췄다.
“全恒梅, 係你啊?”
“아, 아니에요. 나는 과, 관광객이에요.”
전항매는 일부러 한국어로 대답했지만 이만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만수는 깡통 하나를 들고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遊客帶緊罐頭? 邊度有咁遊客哦? (관광객이 이런 캔 음식을 들고 다닌다고? 그런 관광객이 어딨어?)”
전항매는 캔 음식 때문에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비굴한 표정으로 광동어를 내뱉으며 싹싹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들. 가, 가족들이 굶고 있어요.”
“굶는다고?”
이만수와 진가구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체잉꺼의 조직원이었고 주변 가게들에서는 돈을 내지 않고도 식사를 할 수 있어서 현 상황을 피부로 잘 느끼지 못했다.
“저, 정말이에요. 어제부터 배급이 끊어지고 지금 시장에서 사재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차 이건 말하면 안 되지. 아무튼 사, 사재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형님들.”
전항매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이, 이게 전 재산이에요. 좀, 봐주세요. 정말 어제부터 먹을 걸 먹지 못해 굶고 있다니까요?”
진가구와 이만수는 가죽 공장 너머 떠들썩한 노점거리로 저절로 눈이 돌아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거기서 요우티아오와 또우쟝을 먹을 수 있었고, 그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시, 시장에서 쌀 한 되가 얼만지나 아세요? 암살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끼고 마구 물건을 사 모으고 있어요. 아마 내일쯤이면 가게들도 다 문 닫을걸요?”
전항매는 자신의 설득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눈 딱 감고 백 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더 얹었다.
“가족들이 굶고 있어요. 부모님은 전쟁 때 죽고 제가 동생들이 많은데 걔네들은 방벽이 무너진 후 자선단체 지원이 끊어지면서 배급도 못 받고 있어요.”
진작부터 식량난 조짐은 있었다.
한 달 전 방벽이 무너지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일체의 인도적 지원을 끊었고 자선단체들도 안전을 이유로 거의 다 철수했다.
전항매의 가족들은 그가 벌어오는 정보료나 각종 잡일로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식사는 자선단체에 의존했다.
유니세프나 굿네이버 등등.
몇몇 사람들은 TV에서 아이가 빼짝 말라 있는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주면서 돈을 구걸하는 ‘가난 포르노’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런 단체가 돕지 않으면 아니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기도 했다.
전항매의 가족도 그러했다.
궁핍하지만 그래도 매일 한두 끼라도 난민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방벽이 무너진 것은 난민들 입장에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 방벽은 육군이 경계하면서 그 어떤 물자도 오고 갈 수 없었다. 바다 역시 불법 조업조차도 점점 해군과 해경에 막히고 있었다.
당해룡을 해치우러 갔을 때 두 사람은 그런 현실을 볼 수 있었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난민들이 많고 무기에 병력도 많다고 하지만, 이들은 그저 난민일 뿐이었다.
이만수는 전항매가 건네주는 2백 달러를 쏙하고 받았다.
“헤헤, 형님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더 감사하지. 이런 뽀너스까지 받다니?”
“보너스요?”
“우린 너 사재기 때문에 잡은 거 아니야.”
“예?”
전항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만수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노란 인사카드 종이를 꺼냈다.
“저, 저, 저는 짭새 아니에요! 지, 진짜 아니에요.”
“그래, 아닌 거 같다. 그러니…….”
전항매는 이만수의 손을 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은 돈을 다 꺼냈다. 웡꺼 놈들은 요새 이런 식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돈을 뜯어내곤 했다.
그때, 이만수가 전항매의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짭새새끼.”
“커윽. 나, 나는 짭새가 아니라…… 끄나풀…….”
“거, 봐. 역시나!”
이만수는 히죽 웃으면서 전항매를 쓰러뜨리고 피 묻은 돈을 빼앗으려고 했다.
“만수, 잠깐만.”
“뭐야? 너도 나눠 달라고? 에이 기분이다. 반 딱 나눠줄게.”
이만수는 피 묻은 백 달러짜리를 진가구에게 건네고는 꼬챙이로 죽은 전항매의 옷을 뒤졌다.
“야아아. 이것 봐봐. 이 새끼 우리 동포가 아니었어. 빵즈놈들이었네? 거봐, 내가 짭새 맞다고 그랬잖아?”
이만수는 진가구의 옷에서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찾아냈다.
방벽을 넘기 위해서 신분증은 필요했다.
전항매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생들을 위해 난민지구에 남아 있었다.
진가구는 전항매의 주민등록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한국 신분증이었다.
진가구는 혼란에 빠졌다.
전항매가 정말로 잠입경관이었을까?
잠입경관이라면 통조림을 잔뜩 가지고 뭘 한단 말인가?
그는 죽은 전항매의 시체를 보고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사이 이만수는 전항매의 이마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인사카드를 꽂았다.
“끈이 없으니까 매달진 않아도 되겠지?”
이만수는 대충 피를 콘크리트 벽에 슥슥 문대서 지우고는 통조림을 주워서 백팩에 넣었다.
진가구가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긴? 아깝잖아? 뭐 식량난이라메? 갖다 팔면 돈 좀 될 거 같은데.”
“시팔! 뭐 하는 거냐고오오!”
진가구는 이만수의 멱살을 잡고 화를 벌컥 냈다.
이만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가구를 바라봤다.
“만수, 동생들이 있다고 그랬잖아. 걔네들이 굶고 있다고 그랬잖아.”
“너 왜 그러냐? 설마 이 새끼 말 믿는 건 아니겠지? 죽는 마당에 무슨 말을 못 해?”
“시팔…… 쟤 입을 보라고. 얘도 굶고 있었어.”
전항매의 입가에는 아직 빵부스러기가 붙어있고 그 옆에는 열린 빵 봉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만수는 그걸 보고도 코웃음을 쳤다.
“뭐 어쩌라고? 누군 시발 전쟁 때 안 굶어봤냐? 일일이 동정하다간 내가 뒈질 판인데?”
“내놔.”
“하아, 이 미친 새끼. 넌 동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거야. 짭새 끄나풀이라잖아? 죽기 직전 지 입으로 말했구만?”
“내놓으라고!”
이만수는 투덜거리다가 가방 한쪽을 놨다.
가득 들어있는 통조림이 서로 부딪치면서 절그럭 소리가 들렸다.
이만수는 진가구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사진도 찍었겠다 난 먼저 간다잉?”
“…….”
이만수는 담배를 입에 물고 휘적휘적 노점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진가구는 축 처진 어깨로 빵 봉투와 피 묻은 통조림을 바라보다 옷으로 슥슥 통조림에 튄 피를 닦았다.
그리고는 백팩을 메고 다시 한약 상회 뒤에 있는 허름한 텐트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이르는 마지막 종착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