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13
제213화
“차라리 잘 됐지 뭐야. 바에서 일하는 건 오빠도 싫어했잖아?”
“그, 기념품 가게는?”
한하린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진가구는 잽싸게 일어서서 싱크대 밑에 숨겨놓은 돈통을 꺼냈다.
“이, 일단 이걸로 식량을 사놔. 캔부터. 아니다. 내가 구해올게. 웡꺼 쪽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거기서 물건을 좀 받아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건 비상금.”
진가구는 미국의 궤도 엘리베이터가 그려진 지폐 몇장을 한하린에게 건넸다.
“오빠, 이건 집사는 데 쓰자고 했잖아.”
“일단 받아. 어차피 일 다 짤렸으니 어지간하면 집에만 있고 밖에 나다니지 마.”
“경찰 사냥 때문이야?”
진가구는 뜨끔한 표정으로 한하린을 쳐다봤다.
여자친구가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일까?
“오빠 걱정 하지 마. 여긴 웡꺼 애들도 잘 안 오고 내가 경찰의 끄나풀…….”
“하린아! 오빠 말 들어!”
진가구의 언성이 높아지자 옆방 노인이 쾅 하고 주먹으로 벽을 쳤다.
“하린아. 내 말 잘 들어. 다들 눈이 돌아서 사람 죽여놓고 노란 카드를…….”
마침 아까 이만수가 가지고 있던 카드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노란 카드에는 피가 묻어있었고 한하린은 깜짝 놀라 카드를 주워 들었다.
진가구는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고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오빠, 설마. 그 카드. 체잉꺼 사무실에서도 그러는 거야? 오빠는 도박장 쪽이라 괜찮다고 했잖아?”
“하린아. 오해야. 이거…… 어쩌다 보니까 주머니에 들어온 거야.”
“거짓말하지 마. 주머니에 왜 그게 있는 건데? 오빠,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 어?”
한하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진가구는 줄곧 체잉꺼의 주 사업은 살인과는 거리가 멀고 난 그런 거 안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적어도 캐논볼 레이스에서 사건이 터지고 방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하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가구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아까 전항매를 손수레에 옮겨 실을 때 밴 냄새였다.
한하린은 진가구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노려봤다.
“사실대로 말해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까?
암살조로 뽑혀서 시험을 받았다?
실은 잠입경찰이었다?
진가구는 그 어느 것도 한하린에게 말할 수 없었다.
“나한테 계속 거짓말할 거면…… 나, 집 나갈 거야.”
“나, 나가면 어디로 간다고?”
“어디든지.”
“아, 알았어. 말할게. 다 말할 테니까.”
진가구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전항매를 죽인 사실을 말했다.
한하린은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진가구를 안아줬다.
“그랬구나.”
“어쩔 수 없었어. 이만수 그 새끼를 말릴 수도 없었고. 만약 말렸다면 내가 의심받았을 거야.”
한하린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진가구의 뺨을 어루만졌다.
“오빠, 참 사는 거 치사하다 그지?”
그 말이 진가구를 더 울먹이게 만들었다.
아직 한하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진가구는 누군가를 암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 암살하고 체잉꺼를 택한다 한들 무사할 수 있을까?
돈을 받아서 신분을 세탁한 후 다른 나라로 가지 않으면 경찰 신분인 이상 난민지구에서는 위험했다.
한하린은 자신의 몸으로 위로를 하려고 하는지 어느새 서로 키스를 하며 또다시 서로의 몸을 탐닉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가구는 한하린의 몸을 어루만지면서도 내일 기조야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미리 알아놔야 해. 선금을 줘서라도 미리 신분을 만들어 놓자.’
* * *
한하린과의 격렬한 하룻밤이 지나고 이번에 먼저 일어난 것은 진가구였다.
한하린은 어제 심하게 회포를 풀어서 그런지 알몸으로 진가구 옆에 누워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진가구는 한하린의 이마에 키스하고 새벽부터 옷을 꿰어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거대 건축물 링로드 덕분에 이곳 임시거주구도 해가 떠도 뜬 것 같지 않다.
저 멀리 인천 앞바다가 희미하게 밝아지는 걸 보고서야 해가 떴다는 걸 알 수 있다.
워낙 일찍 일어났다 보니 아는 척하는 이웃들도 보이지 않았고 진가구는 얇은 점퍼의 옷깃을 올리고 새벽 거리를 걸었다.
아직 약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관광객 몇 명이 편의점 근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진가구는 편의점 매대 안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서가영 피격 사건 이후 편의점에 물건이 들어오지 않았다.
신선식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매대 곳곳에 빈 곳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편의점 건너편의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도 롯데리아도 지금은 문이 닫혀 있었다.
보통 때라면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에서 막차를 마친 관광객들이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해장하는 모습이 보여야 했다.
진가구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패스트푸드점들이 닫힌 걸 보고 나서야 슬슬 식량난이 피부에 와 닿았다.
처음에는 전항매 같은 일반 난민들이, 그리고 이제는 관광객 상대의 음식점들까지.
“전쟁을 하려면 빨리 하든가. 제기랄.”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은 난민지구에 대한 식량 공급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음식은 마구 남아돌고 있었다.
24시간 일하는 로봇들이 거대한 평야를 일구고 빌딩으로 만들어진 수직농장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있다.
링로드로 공급되는 궤도 태양광 발전의 값싼 전기들은 이런 농업을 뒷받침하며 인류는 유래가 없는 황금시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농장이 있을 리 없었다.
월미도 난민지구는 로봇보다 사람이 더 많았고 230만 인구를 수용하기에는 땅덩어리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모자랐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인도적으로 하수처리도 대한민국이 도와줬지만 이대로 가다간 난민지구 전체가 똥에 뒤덮일지도 몰랐다.
북중국, 남중국, 둘 다 인도를 거부한 자들.
정작 간위예 전쟁에서는 그 누구보다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이들은 이 낯선 땅에 버려졌다.
진가구는 점점 스산해지는 월미도 거리를 재촉했다.
가끔 웡꺼 놈들의 테크니컬 트럭이 부웅하고 지나가다가 진가구를 보고 서행했지만 진가구는 체잉꺼의 완장을 보여주며 두꺼비 상가에 금방 도착했다.
사람이 빠진 두꺼비 상가는 그 어떤 때보다 을씨년스러웠다.
값싼 전기료 탓에 상가 주인들은 그냥 전기를 끄지 않고 퇴근하는 편이었다.
문 닫힌 가게에서 아직도 구형 게임기 따위가 뿅뿅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오래된 미디음이 여러 개 뒤섞이면서 몽환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진가구는 주변을 힐끔 쳐다봤다. 사람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해서 ㄱ자로 꺾이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80년대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서 있고 소니의 워크맨이 진열되어 있는 곳.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왔고 이곳에는 정말로 그런 보물들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진가구는 그딴 걸 즐길 팔자가 아니었다. 그는 안쪽에 있는 기조야의 가게에서 벨을 눌렀다.
마침 기조야는 깨어 있었고 가게 안쪽에서 뭔가를 정리하다가 나왔다.
진가구는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기조야. 전에 말했던 거.”
“미안, 장사 끝이야.”
“뭐? 장사 끝이라니?”
기조야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가리켰다.
“손님이 있어야 장사하지. 빌어먹을 롱꺼가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를 쑤셔버리면서 손님들이 딱 끊겼어.”
기조야의 위조사업은 구리구리한 배경을 가진 손님들이 와야 성립하는 장사였다.
방벽이 무너지고 육군이 모든 통제를 하면서 관광객도 기조야의 손님도 줄었다.
진가구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백 달러짜리를 뭉친 1천 달러를 건넸다.
“두 명, 딱 두 명이야. 여기에서 나갈 방법, 없을까?”
기조야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사레를 쳤다.
“전혀. 나도 일본국 여권으로 간신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판에. 아, 이건 진품이야.”
기조야는 자랑하듯 자신의 빨간 일본 여권을 보여줬다.
진가구는 한숨만 내쉬었다.
“혹시 연락처라도 주겠어? 한국에 있을 거면…… 내가 큰돈을 벌었을 때 부탁하게.”
“난 일본으로 돌아갈 건데?”
“그럼 일본 번호라도 줘. 여권 국제 특송이나 밀수망을 통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조야는 턱을 쓰다듬다가 메모지에서 일본의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그는 전화번호를 주면서 진가구에게 충고했다.
“그 돈, 아끼는 게 좋을 거야.”
“왜?”
“어제부로 해안도 봉쇄가 시작되었어. 이제 굶어죽는 사람 많이 나올걸? 그 돈으로 식량을 사 둬. 그리고 이건 껍데기뿐이지만 어차피 버리려고 했으니.”
기조야는 위조에 쓰려고 했던 여권과 대한민국 주민등록증 몇 장을 진가구에게 건넸다.
“사진은 넣으면 되고, 전자패스는 경찰이나 법무부에 끄나풀만 있다면 분명 우회할 방법은 있을 거야. 잘 해봐.”
진가구는 신분증 다발과 도장까지 받고는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였다.
“왜 이걸 주는 건데?”
“멍청아. 난 지금 방벽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걸 갖고 가라고? 그리고 전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 넣어둬.”
“신세 진 거라니?”
기조야는 씩 웃으며 당첨 배당권을 들어 보였다.
“네 덕분에 한 번 크게 땄었거든. 그 보답이라고 생각해 둬. 아, 어쩌면 행운의 부적이 될지도 모르니 너에게 줄게. 나보다 행운이 더 필요한 건 네가 될 것 같으니까.”
정작 진가구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배당권이었다.
기조야는 손을 흔들고 두꺼비 상가를 빠져나가려고 했다.
“근데 워크맨이나 패밀리 게임기 안 가져가도 돼?”
“하하하하, 내 직업이 뭐였지? 그것도 가지고 싶으면 가져.”
진가구는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워크맨이나 각종 게임기들은 진짜라면 박물관에 가야 할 것들이었다. 진짜를 턱하니 유리매대 밑에 놓아두고 팔 리가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고는 여권 다발을 챙겼다.
위조 기술자가 필요하긴 했지만 스캐닝만 피할 수 있다면 어찌저찌 속여넘길 수도 있다.
완전히 희망이 끊겼다고 생각했더니 기조야에게 희망을 얻었다.
“다음은 식량인가.”
괜히 일찍 일어난 게 아니었다.
진가구는 발 빠르게 식량을 확보하러 움직였다.
패닉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가영의 피격 이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서서히 식량을 사 모으고 있었다.
진가구는 천 달러로 일단 편의점에서 통조림과 물을 싹쓸이하고는 노점거리에서 튀겨놓은 요우티아오도 전부 사들였다.
그동안 위조 여권을 사기 위해 모아놓은 돈은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그는 먼저 손수레를 하나 사고는 쌀 한 포대와 각종 통조림을 수레에 실은 후 그 위를 더러운 부직포로 덮었다.
일이 터진 건 그가 먹을 것을 수레에 싣고 임시거주구로 되돌아왔을 때였다.
타다다다다!
처음에 진가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나 하늘에 한국 육군의 공격헬기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드디어 롱꺼가 전쟁을 시작했다면 쐐애애액하는 공군기들이 제일 먼저 난민지구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공군기는커녕 테크니컬 트럭이 타다다다 기관총을 쏘면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패닉바이……. 폭동이 일어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