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15
제215화
“총을 받아라. 너희는 이제 웡꺼 휘하의 부대원이다.”
“예? 그게 무슨 소리…….”
지휘관은 시범케이스로 그 얼떨떨해하는 청년의 배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후려 깠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대번에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 자리에 엎어졌다.
“일어서.”
고통은 그 어떤 조련사보다 유능하다.
배를 후려 까인 청년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휘관은 총을 한 정 놈에게 주고 말없이 옆으로 빠져 있으라는 시늉을 했다.
곳곳에서 같은 장면이 발생했다.
웡꺼의 조직원들은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줄 밖에 서라고 했다.
놈들은 노인, 소년 가리지 않고 징집했다.
그렇다고 이 강제징집병들을 기존에 있었던 웡꺼 조직원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놈들은 계급이 제일 낮은 노란색 완장을 줬다.
완장 역시 정성 들여 만든 게 아니라 노란색 테이프와 골판지로 대충 만들어서 이등병을 뜻하는 초록색 선을 가로로 하나 그었을 뿐이다.
테이프 완장을 찬 병사들이 한 줄로 서서 배급받은 과자와 빵을 으적거리고 있었다.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진가구에게도 웡꺼 놈들이 다가왔다.
진가구는 이미 푸른색 완장을 끼고 있었고 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진가구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한하린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하린아, 밖에서 식량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나가면 안 돼. 그거 병력 차출하러 오는 거야. 집에만 있어. 알았지? 아, 암호도 정하자. 노크 세 번 그리고 한 번. 알겠지?”
진가구는 들고 있던 산탄총을 한하린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진가구가 더 걱정인 모양이었다.
“오빠는?”
“나는 괜찮아. 체잉꺼의 조직원이니까. 웡꺼도 함부로 건들 수가 없을 거야.”
얄궂은 운명이었다.
그는 전날 밤까지 경찰이냐 체잉꺼냐 어디를 선택해야 할지 줄곧 고민했지만, 지금은 어이없게도 체잉꺼의 완장이 그에게 도움이 됐다.
게다가 그는 구룡의 눈을 찌르는 자객 중에 한 명이었다.
웡꺼라고 하더라도 감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진가구는 자신의 신세가 점점 더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한하린에게 키스하고 다시 집을 나섰다.
또 전령이 오게 되면 체잉꺼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거리의 분위기도 오늘 새벽과도 사뭇 달랐다.
이제 관광객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고 곳곳에 색색의 완장을 찬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바리케이드는 중화대루의 그 넓은 길을 가득 메우고 지그재그로 설치되어 있었고 바리케이드마다 망루와 중화기 초소가 만들어지고 있다.
웡꺼와 쎄잉꺼는 광동자유군 출신이었고 시가전의 달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캉! 캉! 캉! 캉!
바닥에 손가락 길이만 한 말뚝이 아스팔트에 박히는 소리가 진가구를 움찔하게 했다.
엑소슈트의 고속기동과 랜드쉽 등 기갑차량의 전진을 막는 스파이크들이었다.
도로 중간중간에 스파이크를 박아 놓으면 적의 중장기병이 고속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고 안쪽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
각 건물의 옥상이나 푸른 방수포 밑에서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러시아나 북중국에서 가져온 각종 대공미사일이 굴다리에서 나와 전진 배치되었고 세트로 딸려온 로봇들이 대공미사일을 시험 조준하는 모습이 보였다.
쐐애애애애액!
일부러 쏴볼 테면 쏴 보라는 듯 한국 공군의 고속기가 난민지구를 저고도로 비행했다.
제트기의 비행기류에 푸른 방수포가 일제히 깃발처럼 펄럭거리고 멀리서 보면 마치 푸른 파도가 이는 것처럼 보였다.
월미도역 근처까지 민간인이 소개하면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가구는 전항매의 동생들이 걱정됐지만, 지금은 제 코가 석 자였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군. 심 부장에게 정보를 물어다주느냐. 아니면…….”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진가구는 차라리 잠입경찰에 지원하지 않고 그냥 체잉꺼나 잠꺼의 조직원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다.
완장을 찬 놈들은 차출한 일반 난민들에게 한껏 거들먹거리며 뭐라도 되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적어도 잠입경찰이 아니라 체잉꺼의 조직원이었다면 뱃속 편하게 대한민국 경찰이든 육군이든 올 테면 와보라 식으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도 저도 아닌 신분이,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이 그를 계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진가구는 현재 경찰도 그렇다고 완전한 조직폭력배도 아닌 어중간한 놈이었다.
그리고 점점 첨예하게 대립하는 월미도의 상황은 어중간한 진가구를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진가구는 역 쪽으로 가는 차를 얻어타고 체잉꺼의 사무실에 출근했다. 사무실에서 그를 반겨주는 건 이만수였다.
“하하하하! 진가구! 너 들었냐!”
“뭐, 뭘.”
“어젯밤에 또 한 명 죽었댄다!”
이만수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한국 신문을 들어 보였고 1면에는 대문짝만 하게 인간중심당 의원이 피살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이, 인간중심당? 이거 러다이트 계열 국회의원이잖아? 왜, 이 사람이 죽은 거지?”
“바보 같긴. 이놈도 구룡 중에 하나야. 대통령 후보였으니까.”
진가구가 어제 형광펜으로 칠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이 인간중심당 의원이었다.
진가구는 롱꺼가 민족민생당과 안보문명당만 위협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제 3당 격인 인간중심당까지 공격했다.
롱꺼의 타겟은 완전히 대한민국 공안의 의표를 찔렀다.
공안은 박성훈이 죽은 이후 양 당의 경호를 늘렸지만, 롱꺼는 야당의 떨거지 대선후보를 공격하여 기어코 죽였다.
이 공격이 시사하는 바는 엄청났다.
롱꺼가 타겟으로 잡은 구룡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고 어쩌면 대통령 선거에 나온 모든 당의 후보들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바람에 대한민국 정계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 만에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세 명이나 피습당하고 그중 두 명이 죽었다.
남은 여섯 명이 누가 될지 이제 공공연하게 TV에서도 떠들어 댔다.
“만수, 넌 뭐가 그렇게 즐거운데?”
“그야, 우리가 일하러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잖아?”
이만수는 남의 속도 모르고 즐거워했다. 진가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난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그건 동감이야. 빨리 끝나서 돈을 받으면…….”
“바보냐? 지금 상황을 보라고. 돈을 받아도 어디서 쓰려고? 빨리 정상화돼야 네가 돈을 쓸 거 아니야? 떡을 치든 좋은 술을 마시든 뭘 하든.”
이만수도 오늘 점점 더 험악하게 변해가는 난민지구 분위기를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건 그렇네. 막상 돈을 벌어도 쓸 데가 없긴 하다.”
진작부터 난민지구에서는 달러가 통용되었지만 사재기를 하며 물가가 많이 올랐다.
이대로 가다간 컵라면 하나에 백 달러는 받을 판이었다.
“진가구,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
“낸들 알겠냐?”
“그래도 넌 똑똑하니까 어떻게 되겠다 하는 감이 올 거 아니야?”
진가구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답이 안 나와. 지금은 상대의 뺨을 올려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칼로 찌르고 협상하자는 거나 다름없어. 너라면 그거 받아들여 주겠어?”
“그건…….”
“대선 후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있어. 이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용납해선 안 되는 위협이야.”
“난 잘 이해가 안 가는데? 그깟 정치가들 몇 죽는 게 뭐라고?”
이만수는 광동 출신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북중국에서는 선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난민들 중에서도 선거와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광동자유군도 사실은 민주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본딴 동전의 앞 뒷면 같은 모습이었다.
난민들이 제대로 된 자치기구나 교섭단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이만수의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농민공들이 많이 참가한 광저우 민주화운동은 사실 민주화운동이라기보다는 기본소득 요구에 가까웠다.
반면 광저우의 대학생들은 민주주의가 뭔지 깊이 고민했었고 진가구는 롱꺼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
괜히 식량 공급과 인도적 지원이 끊긴 게 아니었다.
롱꺼가 한 짓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진가구는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관뒀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돼. 이제 롱꺼가 죽든 대한민국이 죽든 죽자 살자 달려들 거야. 그리고…….”
“그리고 뭐.”
“사람이 많이 죽겠지.”
사실 그는 ‘전쟁은 질 거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상식적으로 이 전쟁이랄지 봉기는 이길 수 없다.
난민들은 다 합쳐봐야 230만에 불과했고 이 모든 난민이 똘똘 뭉쳐 싸운다고 해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진가구는 자꾸 이 상황이, 롱꺼의 판단이 2차대전 일본군처럼 느껴졌다.
일본군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지를 공습하면서 처음에는 의기양양하게 아시아 각지로 뻗어나갔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가들을 죽였다고 의기양양한 이만수와 다른 점이 뭘까?
난민들 중에는 한국 놈들에게 한 방 먹였다며 신난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진가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력 정치가들을 암살한 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다.
아무리 웡꺼의 공격부대가 잘 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한 달이라도 버티면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난민지구와 롱꺼조직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대한민국이 링로드 건설 문제로 육군 전면 투입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또다시 진가구의 저울추가 요동쳤다.
이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면 진가구는 정식 경찰로 임용되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암살 대상자를 심 부장에게 알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진가구가 말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쎄잉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활기찬 모습이었고 진가구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제 시킨 일은?”
이만수가 체잉꺼의 담뱃불을 붙여주며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오, 깔끔하게 처리했네. 시체는?”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잘했어. 니들 둘은 잠시 방으로 따라와.”
체잉꺼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노란 경찰 인사카드를 늘어놓았다. 진가구는 이제 노란 카드를 보는 것만으로는 놀라지 않는다.
“거의 다 잡았어. 우리 구역에서도 가지치기는 끝났다 그거지.”
인사기록 카드 중 몇 장은 진짜였고 대부분은 가짜였다.
체잉꺼는 어제 진가구, 이만수뿐만 아니라 휘하 조직원들에게 경찰과 끄나풀 등을 전부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어제 한 놈 더 갔다는 소식 들었지? 이제 슬슬 우리도 작업에 들어갈 거야.”
진가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주먹이 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타겟은 누굽니까?”
체잉꺼는 흥미롭다는 듯 진가구를 쳐다봤다.
“만수, 잠깐만 나가 줄래?”
“예? 아니 같이 부르셨으면서…….”
“아니, 잠깐이면 돼. 진가구랑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이만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갔고 체잉꺼의 방에는 체잉꺼와 진가구만 남았다.
“진가구, 거기 앉아.”
그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겨드랑이에는 권총이 있고 손님용 쇼파 옆에는 소총도 한 정 세워져 있었다.
“앉아.”
“아, 예. 형님. 무슨 일로…….”
“아니, 뭐 그냥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할까 하고.”
체잉꺼는 책상 위에 올려둔 증거 사진과 인사기록 카드 몇 장을 들고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러더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가구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 가져올까요?”
“아니 됐어. 마시고 왔어.”
체잉꺼는 교활한 표정으로 경찰 인사기록카드를 포커 패를 늘어놓듯 좍 벌리며 진가구의 얼굴을 노려봤다.
“너 빨리 결정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