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17
제217화
체잉꺼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난민지구 설립 초기에 포섭된 잠복경찰이었고 어이없게도 그가 경찰이라는 걸 아는 사람을 모두 죽이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다는 것이었다.
“근데 말야…… 위험한데도, 내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모르는데도 내가 왜 이걸 남겨뒀는지 알아? 구해줄라고. 나 같은 머저리 새끼가 있으면 구해줄라고.”
체잉꺼는 진가구의 어깨를 꽉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내 말 알아듣겠냐? 줄 잘 서라는 거? 진가구, 네게는 선택권 따윈 없었어. 놈들에게 배신당해 뒤지느냐, 아니면 조직과 함께 하느냐. 저 같잖은 파란 제복을 입는 순간부터 너나 내 운명은 벌써 결정됐어. 어떻게 할래? 진가구.”
진가구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순간 정신이 완전 나가버렸다.
“내가 왜 너한테 당해룡이를 죽이거나 똘마니를 죽이라고 했는지 알아? 네 선택을 돕기 위해서였다. 짭새인 걸 들키면 어찌 되든 그렇게 죽는 수밖에 없어. 시팔, 어찌 되든 우리는 손에 피를 묻혔고 롱꺼 형님에게 배팅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게 있어? 그 새끼들이 너를 꼬실 때 무슨 밝은 미래 이따위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다 거짓말이야. 놈들에게 난민출신 잠입경찰은 노예, 딱 그거야. 정보만 캐오다가 죽든 말든 버리는 노예.”
진가구는 두 장의 인사카드를 바라보다가 체잉꺼가 인사카드를 재떨이에 불태우는 걸 바라봤다.
“이걸로 네가 경찰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모르는 거다. 더 이상 바늘을 꽂으러 오는 자객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두 장의 인사카드는 삽시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일을 처리하고 네 관리관만 죽이면 네가 경찰이었던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진다. 넌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내가 뒤도 봐줄 거고.”
진가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내 조건이야. 이중간첩으로 경찰에게 가짜 정보를 흘려. 그리고 네 관리관을 끌어내서 죽인다.”
진가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구룡의 눈은요.”
“그건 계획대로 진행될거야. 넌 빠져도 돼.”
“아뇨, 제가 맡겠습니다. 그리고…….”
승부수였다.
“상금을 갖고 싶습니다.”
“상금?”
“예, 여자친구랑 가정을 꾸리려면 그 돈이 꼭 필요합니다.”
체잉꺼는 교활한 표정으로 진가구를 쳐다봤다.
“돈이라. 웡꺼 형님의 상금 말하는 거군?”
“예,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 돈을 받고 싶습니다.”
체잉꺼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자세한 타겟은 공격이 임박하면 말해주지. 일단 이거 배급푠데 이거 가지고 가서 만수랑 요기나 해라.”
진가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배급표를 받아 바깥으로 나갔다.
체잉꺼는 하얗게 재가 된 두 장의 인사카드를 보고 히죽 웃었다.
“병신, 그걸 믿냐?”
그걸?
체잉꺼가 ‘믿냐?’라고 말한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 * *
진가구는 바깥으로 나와 당황함을 감추려고 담배부터 물었다. 이만수도 바깥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만 피우다가 물었다.
“형님이 뭐라셔?”
“준비 단단히 하래. 곧 시작될 거라고 하더군.”
“뭐야, 겨우 그 이야기 하려고 너만 남긴 거야?”
“어, 너는 덤벙대서 믿을 수 없다신다.”
이만수는 그 말에 코웃음만 쳤다.
진가구는 담배를 하나 더 물고 쌓여가는 바리케이드를 바라봤다.
이곳 사무실 근처에도 삼각형으로 된 전차 저지선이 설치되고 바닥에 캉캉 스파이크가 박혔다.
이 모든 시설을 다 제거하고 예전처럼 활기찬 시가지 모습을 되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웡꺼 조직원들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여기저기 바리케이드를 쌓고 철조망을 두르면서 대한민국 육군의 진입을 저지하려고 했다.
딱 지금 이 전선 상황만 놓고 봐도 진가구는 ‘롱꺼가 이긴다.’라는 체잉꺼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가구의 마음속에서는 균형추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체잉꺼가 한 말이 사실일까?
체잉꺼가 그가 떠난 뒤에다 대고 ‘그걸 믿냐?’라고 말한 것과 달리 진가구는 그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잉꺼의 말은 묘하게 세부 사항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점수제와 ‘조금만 더’라는 표현이 진가구를 사정없이 흔들리게 했다.
안 그래도 진가구는 요새 점수가 다 찼을 텐데 왜 이곳에서 빼 내주지 않는 건지 의심하고 있던 차였다.
“야, 진가구. 어디 가는 거야?”
“밥은 너 혼자 먹어. 이거 배급표.”
“배급표는 또 뭐야?”
“뻔하잖아. 처음 여기 왔을 때처럼 이제 음식은 식당에서 배급으로 할 거고 그거면 뭐라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진가구는 배급표를 넘기고 곧장 굴다리 안쪽으로 향했다.
“심 부장.”
공중에 전자전기가 떠 있는 걸 보면 공중전화도 진작에 끊겼을 테고 무선전화로는 연락할 수 없다.
그는 보안위성전화기를 찾을까 하다가 관뒀다.
어차피 체잉꺼가 심 부장에게 정보 교란을 할 것을 지시했으니, 자세한 명령이 나오면 그때 연락해도 된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으니 어제 췬헝마이의 동생이 준 초코바가 손에 잡혔다.
어제보다 진가구는 더더욱 고민이 많아졌다.
체잉꺼에게는 진작에 잠입경찰이라는 걸 들켰고 그가 한 말대로 이제는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왔다.
진가구는 경찰과 롱꺼 조직이라는 두 개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몸이 갈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는 어느 쪽이든 쉽사리 선택할 수 없었다.
x4 서서히 돌아가는 불타는 수레바퀴
“당국에서는 이제 어떡하지 소리가 절로 나오겠어.”
이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에 인간중심당 후보가 죽었다.
첫 타겟이었었던 서가영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이로써 세 명이나 되는 대선 잠룡들이 롱꺼의 자객에게 당했다.
어차피 박성훈과 인간중심당 후보가 죽은 여의도는 이진영의 관할권이 아니었고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러다이트 계 의원이 죽으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이상한 데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서울대 점거에 성공한 인간해방전선이 뜻밖에도 암살범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인천은 그야말로 총을 든 미치광이들이 모이는 화약고가 되었다.
인간해방전선은 어디서 정보를 들은 건지 롱꺼가 자신들의 후보를 죽였다며 롱꺼를 공격할 거라 선언했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성명을 듣고 속속 인천 중부서 관할로 몰려오고 있었다.
방벽에서 도망친 난민들이 범죄를 일으키는 판에 거기에 러다이트 계열 범죄자들까지 몰려오면서 중부서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벌써 육군 경계가 소홀한 남부쪽에서는 롱꺼 패거리와 극렬 러다이트 패거리가 산발적으로 총을 쏘며 교전하고 있는 상황.
인간해방전선이 웡꺼가 밀수한 북중국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어제의 협력자가 오늘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러다이트 계열 놈들은 인천이나 부천, 의왕, 수원 등지에서 난민사냥을 시작했다.
거너더러머버서.
광동어나 북경어로 말할 수 없는 문장을 아무거나 말하게 해서 의심스러운 자는 그 자리에서 쳐죽인다.
비극은 돌고 도는 것일까?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들이 당했던 걸 간위예 전쟁 난민들이 당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애꿎은 한국인들도 이들의 테러에 많이 당했다.
술 취해서 혀가 꼬부라진 사람이 발음이 정확할 수가 없을 텐데 놈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진영은 44팀 책상에 앉아 핏발 선 눈으로 순찰결과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젯밤 벌어진 살인 약탈 사건만 2건이었다.
그중에 한 건은 마침 이진영과 EV-1 순찰을 돌던 시간대에 벌어졌고 간단히 잡혀 중부지검으로 송검되었다.
심지어 테러리스트 몇 명은 육군 바리케이드를 넘어 난민지구로 들어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거기에 친난민 단체들도 말썽이었다.
이미 실질적으로 구호활동을 하는 단체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전부 난민지구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극렬 인권단체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병사들의 총구에 하얀 들꽃을 꽂아주며 방벽 앞에서 춤추면서 평화의 퍼포먼스를 했다.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흉내였다.
그러나 그들의 춤은 불과 4분도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계열 테러리스트가 허공에 총을 쏘면서 하얀 옷을 입은 ‘히피’들은 깜짝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금 월미도는 허울 좋은 이상론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다.
난민들에게 교섭단체라도 있어서 협상이라도 진행되었다면 어느 정도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민 발생 초기부터 각종 교섭단체는 롱꺼 조직이 흡수해버렸다.
롱꺼 패거리들의 설립이 난민지구의 이권을 둘러싸고 세 개의 거대 조직이 충돌한 것이고 보면 그들이 교섭단체를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결국 지금 월미도 문제의 핵심은 롱꺼가 난민들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뒤틀린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유의미한 교섭단체가 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난민지구의 구도를 과거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모델로 잡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라는 교섭단체가 있어도 이스라엘은 이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로 여기고 무차별적으로 난민지구를 폭격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난민과 협상 따윈 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 결과, 하마스라는 무장단체가 팔레스타인을 대표하게 되고 신간척지의 경우는 그게 바로 롱꺼 조직이었다.
방벽이 만들어진 것도 귀찮은 것을 다 방벽 안쪽으로 몰아넣고 신경을 끄겠다는 의도였다.
명분은 한국 쪽이 확고하다.
교섭단체가 유명무실한 지금 방벽 테러의 책임을 물어 ‘질서유지’를 내세우며 얼마든지 난민지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월미도 신간척지는 한국 땅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난민들에게 내어준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은 점차로 롱꺼에게도 쌓였다.
인천, 부천 각지에서 난민들이 골목길에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늘 그랬던 것처럼 피살자의 신분이 난민이라는 걸 알면 그 이상 수사를 하지 않았다.
타살 흔적이 명확해도 자살이나 사고사였다.
난민들은 사냥당하고 그 사냥당한 결과로 점점 웡꺼 등에서도 명분을 쌓고 있었다.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거병(擧兵)할 것이다.
이게 오늘 웡꺼측에서 발표한 성명서였다.
어딘지 삼국지나 초한지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어쩌면 웡꺼나 롱꺼는 정말로 자신들을 한고조 유방이나 삼국지 시대의 유비처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방은 그 출신이 시정잡배였고 유비는 시장바닥에서 돗자리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진영은 24시간 켜져 있는 뉴스 화면에서 웡꺼의 조직원이 거병하겠다고 광동어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아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고 말하지 그러냐?”
TV는 물론이고 온갖 실시간 동영상 채널도 온통 난민지구에 관한 뉴스밖에 없다.
CNN 같은 뉴스 채널은 벌써 특파원을 보내 방벽 상황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어제 웃기지도 않는 평화 퍼포먼스를 하다가 도망치는 사람들의 뉴스 클립 영상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월미도 신간척지는 관광객들이 보는 시선과 다를 바 없었다.
그저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경계근무를 서는 육군 병사들이나 노란 완장을 찬 웡꺼의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진영은 한동안 TV를 바라보다 아침 공기를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중부서 역시 외곽은 작전계획대로 육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육군 2개 사단이 인천에 급파되었고 시가지 곳곳마다 육군 정복을 입은 장교들이 돌아다녔다.
“육공만 살판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