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
제22화
– 그렇군요. 그 특경 로봇은 용의자를 제압하는 데도 사람 사이의 목숨을 이익형량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다소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전기로 지져서 용의자를 확보한다. 아마 그 로봇의 양자두뇌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야. 그리고 용의자 유명구는 로봇에 당한 순교자가 되었겠지.”
로봇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외에는 겉보기엔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사건들이 로봇 3원칙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되고 이익형량으로 연결된다.
로봇 공학 1원칙, 인간을 해친다는 정의를 과연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을까?
의료 인공지능이 병원비 수납을 문제로 수술을 하지 않아 인간이 죽는 걸 방치하면 그것은 인간을 해친 것일까?
빵을 굽는 빵집 소속 로봇이 굶고 있는 노숙자에게 빵을 주지 않아 굶어 죽는다면?
지금까지 AI 설계는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 시스템 다운을 선택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더 로봇의 사회진출 영역이 넓어지며 칼로 자르듯 판단을 내리기 힘든 사건은 많아졌다.
사회 곳곳에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더더욱 로봇과 인공지능은 정교한 이익형량이 필요했다.
경찰들은 점점 EV-1으로 몰려들어서 이 유능한 로봇이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지켜봤다.
저쪽에서는 화이트보드를 가지고 EV-1이 어느 쪽 차단기를 내릴지 도박판까지 열었고 팝콘을 씹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경찰도 있었다.
기찻길의 비유는 EV-1이 어떤 선택을 해도 인간을 해치게 된다. 그야말로 딜레마였다.
– 경위님,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해도 되겠는지요?“
“해봐.”
– 저는 차단기를 한 명이 있는 곳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호성이 터지고 달러와 원화가 섞인 돈이 오고 갔다. 그러나 EV-1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그리고 전 열차를 막아설 겁니다. 가시거리에 있다면 제 스펙으로 한 명 정도는 구출 가능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를 제 다리를 희생해서라도 멈출 수도 있고 사람이 타지 않은 화물열차라면 강제 탈선도 고려하겠습니다.
“야 그건 반칙이잖아.”
– 반칙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능력이 닿는 한 인간 모두를 살릴 방법을 끝까지 찾아보겠습니다.
이진영은 진지하게 EV-1을 쳐다보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 이 새끼. 자네는 내 철학적 질문의 요지를 망가뜨렸네만.”
EV-1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깡통, 너다운 베스트 답변이다.”
이도 저도 아닌 김빠진 대답이 나오자 사람들은 괜히 야유하면서 흩어졌다.
EV-1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막 연결된 왼손 검지로 테이블 위의 오징어 땅콩볼을 가리켰다.
– 경위님, 처음부터 묻고 싶었습니다만. 저 오징어 땅콩은 뭡니까?
이진영은 이제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깔깔 웃으면서 아까 과자봉지를 엎었을 때 딸려 나온 오징어 땅콩을 냉큼 입으로 던져 넣었다.
“이거? 이건 그냥 오징어 땅콩.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다. 알겠습니다.
이진영은 깔깔 웃으며 괜히 EV-1의 팔을 두드렸다.
“아무튼 아선 관계자 여러분, 이 빌어먹을 깡통 자식은 언제 수리가 완료되지요?”
“한 두세 시간 정도요? 무식한 군바리 놈들이 외장 장갑은 심하게 때려 부수긴 했는데 내부 프레임과 양자두뇌는 전혀 손상이 없습니다. 거기에 저희 쪽도 이 프레임 블락업을 위해 새로운 모듈을 달고 싶고…….”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밥이나 먹고 오지요. 밥을 사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아선과 마이크로웍스의 관계자들은 이진영의 말에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 * *
신흥동은 난민 입국을 막기 위해 세운 방벽 근처 동네였다. 인천 집값은 월미도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싸지고 이곳 신흥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진영은 고층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전쟁 전에는 바다가 보이는 고급 아파트였을 테지만 전쟁과 난민사태로 인해 인류 멸망 후 탑이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겉면은 멀쩡하다. 지은 지 몇 년 안 된 아파트처럼 페인트칠도 멀쩡했고 부식된 곳도 겉보기에는 없어 보인다. 아파트 공단 로봇이 외벽이나 내장재도 멀끔하게 관리해두었다.
하지만 딱 하나 신흥 파라다이스 아파트가 ‘시ㅎ ㅍ리다ㅇ스 ㅇ피드’로 변한 것이 옥의 티였다. 입주자도 공단도 아파트 명칭 따위는 관심 없었고 이 이름만이 이 아파트에 남아있는 세월의 흔적이었다.
아파트에는 많은 기본소득 수급자들이 살고 있고 폐허가 된 아파트 곳곳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아파트의 외관은 멀쩡하지만 입주자는 멀쩡하지 않았다.
부부싸움을 하는 소리.
개 짖는 소리.
형제끼리 우당당 뛰어다니는 소리.
아이들이 뛰어놀면서 까르르 웃는 소리.
이 아파트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면 으레 들려야 할 생활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파트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고 이진영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마치 좀비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매일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의 세례를 받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하는 거라고는 기본소득 바우처 카드로 밥을 먹고 남은 돈으로 로봇 경마, 스포츠 도박 같은 중독을 넘어 습관이 되어버린 취미 거리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로봇 때문에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조차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하다못해 아파트 경비원도 필요 없고 청소부도 로봇이 대신하는 마당에 이들이 과연 어떤 일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어차피 돈을 조금 모으면 할부로 섹스로봇을 살 수 있었고 연예인보다 더 예쁜 로봇에게 성욕을 풀기 때문에 굳이 귀찮은 가족관계 따위를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이진영이 앉아있는 그네 주변에는 어린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놀이기구 역시 공단 관리 로봇이 매일매일 정비하니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깔끔했다.
월미도 난민지구는 이 아파트와 정반대였다.
무허가 상인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
심지어 텐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몸을 섞는 적나라한 소리도 들린다.
그런 생활 소음을 듣다 보면 그쪽이 오히려 사람 사는 곳 같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사는 맛’을 느끼려 위험을 무릅쓰고 월미도를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썩어가는 거대한 호수 같군.”
이진영은 부자연스러운 정적과 기묘한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었는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본소득층이 사는 곳에는 이런 패배주의로 가득한 묘한 냄새가 났다. 그는 그 냄새나 분위기를 싫어했다.
실제로 냄새가 나는 건 아니다.
공공로봇과 공단 로봇들이 아파트 안팍을 깨끗이 치우고 정원수까지 멋지게 다듬었다. 아마 어느 집에 들어가도 안은 아파트 공단 청소 로봇 덕에 멀끔할 것이다.
마치 잘 닦인 관짝처럼.
어이없게도 방벽 바깥에 사는 난민이나 불법체류자들에게 이 아파트는 꿈의 상징이었다.
어찌 보면 인류가 그토록 꿈꿔왔던 파라다이스가 이 아파트 아닐까?
기본소득을 받으며 깔끔한 환경에서 병에 걸릴 걱정도 할 필요 없고 배곯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이지.”
이진영은 담배를 비벼서 튕겼고, 저 멀리 있던 유모차 형태의 관리 로봇이 냉큼 달려와 담배를 빨아들이고 주변의 잔디까지 정리했다. 로봇이 위잉하고 작동되는 소리만이 이 부자연스러운 정적을 깼다.
멀리서 부우웅하고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이진영이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그의 앞으로 최신형 벤츠 세단이 소리 없이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태성 AI의 AI 설계자 도은주 주임이었다. 그녀는 슈를 입에 물고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했는데 제가 번호를 드렸던가요?”
이진영은 대답 대신 종이 명함을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언제 줬지요?”
“그 깐깐한 패러리걸 로봇이 주더군요.”
“거짓말. 지미는 제 명령 없이 그런 짓 안 해요.”
이진영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네에서 일어섰다. 도은주도 예쁜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이진영을 쳐다봤다.
“그쪽 얼굴 보아하니 진짜 밥이나 먹자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죠? 여기 그럴싸한 식당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예, 잠시 태성측 AI 엔지니어의 조언을 듣기 위해 모셨습니다.”
“강남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맨입으로요?”
“설마요. 제대로 된 시푸(師傅)가 만든 청초육사에 공부가주. 곡부(曲阜)가 미군에게 궤도폭격을 당해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술이죠.”
도은주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술을 꽤나 좋아했다.
이진영은 스카잔 항공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걸었고 도은주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면서 발걸음을 맞췄다.
“저도 오면서 대충 기사는 검색했어요.”
“백헌강, 그놈은 지난주의 재판 결과로 그쪽 인공지능의 결함이라며 무죄를 주장할 겁니다. 놈의 진술을 깨려면…….”
“아뇨, 그쪽 기사요.”
이진영은 몸을 돌리면서 도은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쪽 기사라뇨?”
“전쟁 영웅이시더군요. 광저우에서. 동성(銅星)무공훈장도 타셨다고.”
이진영의 용무늬 잠바 뒤에는 GUANGZHOU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이 점퍼는 전역자들이 맞추는 요란한 전역모와 똑같은 것으로서 참전자들이나 입고 다니는 옷이었다.
“그 훈장은 전쟁 참전하면 개나 소나 다 땄습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가보지도 않은 중장 양반도 중국집 쿠폰 스티커 붙이듯 달고 다니던 거였어요.”
“아뇨, 경관님은…….”
이진영은 무뚝뚝하게 딴소리를 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공부가주가 그냥 연태고량주로 바뀔 겁니다. 그것도 이제는 귀한 거지만.”
도은주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도은주 주임님. 어디까지 얘기했지요?”
“백헌강이요. 저도 회사 측에서 귀띔이 있었어요.”
“하긴, 그쪽 회사도 난리긴 하겠네요.”
호리코시와 태성AI는 연일 주주와 반기계주의자들에게 맹공격을 받았다. 청소 로봇 판결에 081 진압 로봇 사건 두 개만으로도 회사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특히 태성은 유럽 쪽에서 집단소송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있고 미국 국방부 납품에서 탈락할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호리코시쪽은 뭐래요?”
“그쪽은 늘 그렇죠. 스미마셍이나 연발하다 은근슬쩍 우리에게 공을 떠넘겼어요.”
“그래서 주임님이 구원투수가 된 모양이군요.”
도은주는 다소 거북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주임님은 여기서 태성 AI 측의 과실은 없다는 증거를 가지고 가면 회사로서는 땡큐겠군요.”
만약 백헌강 사건도 인공지능에게 과실이 인정된다면 태성 AI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이진영은 노란 출입금지 테이프를 마치 권투선수가 링에 오를 때처럼 아래위로 벌려 줬다.
“레이디 퍼스트.”
스커트를 입은 도은주의 늘씬한 다리가 테이프를 넘어오고 이진영은 괜히 딴 곳으로 눈을 돌렸다.
“신사시네요?”
이진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프를 넘어왔다.
현장은 이미 감식 로봇에 의해 3차원 데이터가 작성되었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핏자국도 없고 마치 신축한 아파트 복도처럼 보였다.
“가자 돌돌아. 일해야지.”
이진영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23팀의 감식 로봇 돌돌이가 돌돌거리면서 이진영의 뒤를 쫓아와서 바로 현장 화면을 벽면에 프로젝터 모듈로 투영시켜줬다.
360도 전면에 사건 현장의 끔찍한 모습이 비치면서 도은주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