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2
제222화
진가구는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류모성 외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가구……. 당신 혹시 체잉꺼 밑에 있는.”
“맞아요. 저에요. 근데 경관님 혹시…….”
진가구도 이진영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이진영은 여권을 받고 고민이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이브이, 기록은?”
– 제가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해킹할 수 있겠어?”
– 아뇨, 아예 독립 서버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경찰망을 통한 해킹에 대비한 것 같습니다.
진가구의 얼굴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심 부장, 심 부장을 연결해주십시오. 그 사람이라면 분명 제 신분을 증명해 줄 겁니다.”
“심 부장?”
심 부장이라면 아까 이한경이 주관하는 회의에도 참석한 경찰고위 인사였다.
“이브이, 심 부장 연결해.”
다른 난민들은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이진영과 진가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진가구도 심 부장 이야기가 나오자 희망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제 아내고 아내는 류모성처럼 특별체류자격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폐쇄된 난민지구 동사무소의 서류 양식이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난민지구 사정에 나 몰라라 해도 결혼이나 출생신고는 받아줬고 자세한 사정을 난민번호에 기록해야 했다.
하지만 진가구의 서류는 너무나도 허술했다.
아직 행정 로봇의 도장조차 받지 않은 혼인신고서였다.
이진영은 진가구의 뒤에 있는 한하린을 짠한 눈으로 바라봤다. 진가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허술한 서류까지 만들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는 사람만큼은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11명의 난민들은 이진영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전에만 해도 스티로폼을 타고 쿠바 난민들처럼 인천 앞바다에서 도망쳐볼 수 있었지만 해군과 해안경비대는 아예 물리적으로 긴 그물망을 만들어 인천 앞바다를 봉쇄했다.
잠수를 한다고 해도 인공지능 소나 때문에 아무 소용없었다.
– 심 부장님 연결되었습니다.
“예에, 심 부장님. 다름이 아니라 지금 제 앞에 관리번호 3304012 경관이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가구는 초조하게 이진영을 바라봤다.
– 관리번호 3304012? 그게 누구죠? 그리고 관리번호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는 성격이군요. 그 자체가 대외비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진가구가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이진영의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심 부장 이 개자식아. 나다! 설마 내가 여기 있는데 날 부정하려고 하는 거냐?”
– 그쪽이 누군지는 모르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시발롬아. 다 들었어. 체잉꺼한테 다 들었다고. 점수고 뭐고 다 가짜라며? 나를 평생 조직에 받아놓고 부려 먹으려고 한 거잖아. 그리고 날 팔아먹으려고 한 거잖아? 안 그래?”
– 정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이진영 팀장이나 바꾸시죠. 그쪽이랑 할 얘긴 없습니다.
진가구는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지! 내가 뭐 큰 거 바라나? 아니에요. 심 부장님.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내 신분 좀 증명해 주세요. 내 아내만이라도 긴급 피난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 당신과 더 할 얘기는 없습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그때 이진영이 전화에 대고 말했다.
“뭐야 당신,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관리번호 정도는 확인해 줄 수 있잖아? 지금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에요.”
이진영은 도장이 찍히지도 않은 혼인신고서를 구겨질 정도로 꽉 틀어쥐었다.
– 난 모르는 일입니다. 이진영 팀장. 당신이 멋대로 난민지구 안으로 들어간 건 내가 중부서와 본청에 직접 항의하겠습니다.
진가구가 비장하게 말했다.
“표적, 알아냈어.”
–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 환장할 거잖아? 안 그래? 표적 알아냈다고. 알고 싶으면 내 아내부터 빼줘. 그리고 같이 온 사람들도 빼줘.”
-진가구…….
심 부장의 말을 듣자마자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진영은 진가구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고 진가구조차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 진가구 씨. 이렇게 나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정식 보고계통으로 신청하고 그러셔야지.
“뭔, 정식 보고계통. 위성 전화를 꺼냈다간 사방에서 웡꺼 놈들이 벌떼처럼 달려올걸? 알고 싶으면 내 아내를 특별 긴급피난으로 방벽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줘요.”
– 그건…….
그때 이진영이 전화를 빼앗아 단호하게 끊었다.
“무, 무슨 짓이야. 당신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진가구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진영은 얄밉게 미소를 지으며 EV-1을 쳐다봤다.
“이브이, 난민번호 검색해주겠어?”
진가구는 이진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당신도 경찰이 그거냐? 시팔, 우리 난민들은 사람도 아니고 벌레만도 못하다는 거냐고? 어?”
이진영은 멱살을 잡힌채로 광동어로 다른 사람들에게 난민번호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쭈뼛쭈뼛하면서 난민번호를 EV-1에게 불러줬다.
진가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진영을 때리려고 했다.
기잉.
그걸 두고 볼 EV-1이 아니었다. EV-1은 어빈 프레임 시절 사람보다 더 빠른 주먹을 피하고 카운터를 넣었었다.
“이, 이건. 어빈 프레임?”
진가구는 로봇 격투 도박 관리가 주 업무였고 EV-1의 메인프레임에서 손을 뻗은 어빈 프레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왜, 어빈 프레임이 여기에? 설마, 그때 동우 엔지니어링이?”
“영리하군. 그래서 잠입경찰이 된 거겠지만.”
이진영은 멱살을 잡힌 채로 빙긋 미소를 지었고 진가구는 스르르 멱살을 풀었다.
“우리의 주적은 누구다?”
이진영은 대한민국 군대에서 흔히 하는 농담을 말했지만 진가구는 그걸 알아듣지 못했다.
“간부 새끼들은 다 그래. 잘 나가면 지들 공이고 나쁜 건 현장 경찰이라. 진가구 경관. 안 그래?”
진가구는 이진영의 말을 듣고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의 관리관인 심 부장은 그를 노예처럼 부려 먹었지만 이 도깨비 같은 한국 경찰은 그를 경관이라고 불러줬다.
“난민번호상에는 범죄이력은 없군. 조폭이랑 연결된 선도 없고. 이브이, 류모성과 어머니, 그리고 진가구 경관을 제외하고는 체포형식으로 끌고 간다.”
– 죄목은요? 아, 난민특별법 위반이겠군요. 멋대로 난민지구를 나온 혐의.
진가구는 이 명물 콤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워낙 이진영이 배배 꼬인 성격이라 EV-1도 돌려 말하기의 대가가 되었다.
“어이, 진가구 경관. 난민들이 멋대로 난민지구를 떠나서 골치 아파. 체포하는 데 손 좀 빌립시다.”
진가구는 이제야 이진영과 EV-1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난민특별법 중 거주지 이탈 위반.
이건 난민지구를 나와야 죄가 되고 이진영은 에둘러서 모든 사람들을 체포형식으로 난민지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고 말한 것이다.
“어이, 수갑. 경찰학교에서 배우긴 했겠지? 일단 방벽을 넘어갈 때는 모양새가 중요해서.”
진가구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계속 자신이 조폭의 똘마니인지 대한민국 경찰인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이진영은 심 부장과의 대화만으로 진가구가 잠입경찰이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를 동료경관으로 대했다.
“경찰이 눈물이 많으면 쓰나?”
– 팀장님, 사돈 남 말 하십니다.
“이브이, 부하 경관도 여기 있는데 상관의 체면을 좀 세워주지 않겠나?”
이진영이 진가구에게 담배를 나눠주려고 할 때였다.
남은 10명의 난민 중 한 명이 갑자기 위쪽으로 붉은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게 아닌가?
“짭새(衰人)다아아아아! 짭새다아아아아아!”
중년 여자 하나가 광동어로 쐐이얀이라고 고함을 질렀다.
잠입은 롱꺼만 하는 게 아니었다. 란 아주머니와 친한 가겟집 주인은 잠꺼의 중간보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바늘’을 잡으면 포상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자는 돈 때문에 본인도 방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발로 걷어차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이진영은 여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지금은 인정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새벽이 되고 잠잠해졌던 웡꺼 놈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EV-1은 주변 레이더를 먹통으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사람의 눈까지 해킹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다람쥐처럼 웡꺼의 감시병이 뛰다가 붉은 마그네슘 신호탄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저기다! 저기 있어!”
앗하는 사이에 웡꺼의 공격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하게 배치된 초소에서 마약에 취한 병사들이 기어 나오고 마구 사방으로 총을 쐈다.
“이브이! 퇴로는!”
– 이미 계산해놨습니다!
“류모성! 이브이에 타라!”
이진영은 류모성과 할머니 한 분을 보병지휘관석에 태우고 진가구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내를 데리고 이쪽으로 와!”
그러나 웡꺼의 로켓이 진가구와 이진영의 사이에 처박혔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난민 하나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다행히 한하린과 진가구는 무사했지만, 한하린은 사람의 살점과 피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공황발작을 일으켰다.
“으으으으, 으으으으.”
진가구는 발작으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한하린을 콱 안아줬다. 그녀는 궤도폭격을 두 번이나 경험한 이후로 옆에서 큰소리만 나도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다들 저 사람들을 따라가요!”
진가구는 여자친구의 손발을 주물러주며 다른 난민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난민 중 한 명의 배신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로켓 공격으로 천막이 무너지고 예광탄이 치솟아 오르면서 무너진 천막 쪽으로 놈들의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EV-1은 기분전환 삼아 한 말이었겠지만, 어쩌다 보니 정말로 웡꺼 놈들의 대비태세가 어떤지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돼버렸다.
“이브이! 진가구와 그 와이프는!”
– 구할 수 없습니다. 웡꺼의 공격부대가 옵니다.
테크니컬 트럭과 놈들의 엑소슈트 부대가 몰려오는 걸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공군기의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예광탄이 올라왔을 때 이미 공군기가 이상징후를 감지하고 쐐애애액하는 소리를 내며 선회하고 있었다.
– 경찰본부에서 협조 거부했고 국방부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정치가 새끼들! 조폭 따위의 눈치를 보다니!”
내일 이세화가 대통령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고 경찰이나 국방부나 괜히 롱꺼를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했다.
벌써 월미도 난민지구는 불바다가 되었고 타오르는 불 건너편에서 진가구가 실신한 아내를 엎고 이쪽을 애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테크니컬 트럭이 몰려들면서 여기저기서 광동어로 ‘죽여, 죽여!’ 하는 소리가 들린다.
x5 불타는 수레바퀴 안에서는 누구도 나올 수 없다.
진가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아내를 들쳐업은 채 다시 지긋지긋한 난민지구로 되돌아갔고 이진영은 그 모습을 짠한 표정을 지켜봤다.
“제기랄! 제기라아알!”
이진영은 진가구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광저우 전역에서 수도 없이 본 장면이었다.
피난민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해변까지 도망쳤고 그는 거기서 혼자 살아 돌아왔다.
마지막 관광객.
참전용사들이 자조적으로 부르는 별명이었지만 그는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여권 없이 중국 여행을 한 관광객이었지만 정작 난민들과 광저우 시민들은 북중국, 남중국 두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
남중국 중화민국은 광동자유군 출신들을 받기 꺼렸고 북중국은 난민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