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4
제224화
행어로 되돌아오자 44팀 팀원들은 잠도 안 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팀장님! 대체 어떻게 빠져나오신 거예요?”
이진영은 TV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방송국 놈들이 문제야.”
이미 정부 측의 특사가 내일 중화대루로 방문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고, 방송국 헬기들은 안 그래도 고공에서 난민지구를 촬영하던 와중이었다.
이진영과 EV-1이 웡꺼의 영역을 들쑤시자 야밤에 화려한 그림이 연출되었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미사일.
보병용 대전차 로켓의 오렌지색 폭발광.
어둠을 뚫고 시커먼 밤하늘을 수놓는 예광탄들.
그 와중에 굴다리 안쪽의 네온사인 불빛이 폭발과 예광탄 불빛에 어우러져 각종 불빛들도 환락가의 네온사인처럼 보였다.
“저, 팀장.”
“아이 깜짝이야.”
전상영도 어느 틈에 잠에서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이진영의 뒤에 서 있었다.
요새 44팀 팀원들도 전상영의 표정보다 포메라니안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다.
이진영도 개가 헥헥대는 걸 보고 전상영이 상당히 궁금해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이진영도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대놓고 난민출신 경찰들에게 사기를 쳤다.
점수 따윈 다 거짓말이고 닭장 속의 닭처럼 신나게 정보를 따오다가 도축되는 비정한 잠입경찰의 세계.
난민지구를 떠날 수 없는 잠입경관들은 난민지구 바깥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저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하나둘 죽어 나간다.
이보다 더 쉬운 사기는 없다.
가끔 난민지구 밖을 벗어난 선배 썰 좀 풀어주고 이름도 쓰여있지 않은 대통령 사면서를 보여주면 난민들은 깜빡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번에 롱꺼 조직은 조직 내에서 모든 잠입경찰을 싸그리 일소한 마당에 앞으로 과연 바늘이 되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의문이었다.
“아무튼, 자세한 건 내일 경호 일정을 끝내고 말해드리지. 오늘은 다들 잠이나 주무셔. 아, 그리고 류모성과 모친은 무사히 대피했으니 다들 안심하시고.”
류모성 사건의 담당자이기도 했던 김대현은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이진영이 방벽 너머로 나갔던 이유도 류모성이었고 팀원들은 전부 안심한 투였다.
“상현이는 어디 갔어?”
임은혜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까 밤에 순찰 나갔다 돌아오셔서는 야식 먹으러 나가신다 그랬는데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야전침대에 누웠다.
주변은 아직도 시끌시끌했지만, 차라리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진영은 한승아와 같이 살게 된 이후 혼자서 잠이 드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 * *
“하린아, 잘 들어. 아직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어. 분명 우리만을 위한 태양이 뜰 거야.”
한하린은 이제 간신히 쉘쇼크에서 진정되었다. 그녀는 물기가 촉촉한 눈망울로 진가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웡꺼의 공격부대를 피해 도망 나와 간신히 그들의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임시 난민거주구는 어제 낮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몰려들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판국에 노점거리에서 불꽃이 치솟자 사람들은 더더욱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불안할 때는 가장 손쉬운 도피처로 술이나 약을 택하기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술판을 벌이거나 값싼 마약에 취해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임시 가건물에도 천막을 걸어서 이곳이 아편굴인지 아니면 거주지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한하린은 불안한지 계속 바깥을 쳐다봤다.
“오빠 봐. 하린아. 할 말이 있어.”
한하린은 손톱을 오독오독 깨물면서 남자친구를 바라봤다.
진가구는 그녀의 가련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이마에 키스하고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한하린의 떨림이 진가구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가련한 새 같은 여자.
어느 정도 떨림이 진정되자 진가구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그동안 쭉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 경찰이야.”
한하린의 눈동자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몰랐고 아까 이진영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
“오, 오빠가 경찰이라고?”
“어,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진가구는 잠입경찰 자격으로 한하린과 국적을 받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설명했다.
한하린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지 다시 오돌오돌 몸을 떨다가 진가구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오빠, 무서웠지? 미안. 난 그것도 모르고.”
“괘, 괜찮…….”
한하린의 말을 듣고 진가구는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까 배신자만 없었어도 두 사람은 이진영과 함께 방벽 안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나면서 진가구는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한하린의 품에서 오열했다.
그가 바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어 한하린과 심심할 정도로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다였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묻고 반찬 투정을 하다가 치킨 한 마리를 들고 퇴근하고, 집에서 한하린은 아이를 돌보다가 환하게 그를 맞이하는 평범한 일상.
두 사람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그 일상을 간절히 원했다.
까짓 가종보험 따윈 없어도 라종보험이라도 누군가를 속이거나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일상.
하지만 진가구에게 주어진 삶은 혹독했다.
그는 체잉꺼의 명령에 따라 불과 이번 주만 두 자릿수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여기 남게 된 이상 최소 한 명 이상을 죽여야 했다.
구룡의 눈.
체잉꺼의 명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진가구가 건너 건너 류모성의 이야기를 듣고 오늘 밤 난민지구를 떠나려던 것도 더 이상은 살인이 신물 났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잠입경찰로서의 공적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조야가 준 여권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미사일 한 발이 두 사람을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만약 그곳에서 한하린이 쉘쇼크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이진영을 따라 방벽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가구는 고개를 들고 한하린을 쳐다봤다.
한하린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눈물이 진가구의 정수리를 적시고 있었다.
“오빠. 혼자서 너무 많은 것을 지려고 하지 마. 나, 나도 오빠의 가족이잖아.”
가족.
진가구는 중국군의 폭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에게도 부모님과 동생이 있었고 실없는 농담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간위예 전쟁이 끝나고 그에게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가족.
진가구는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던 게 뭔지 깨달았다.
대한민국 국적도 경찰이라는 지위도, 보험이나 연금도 아닌 바로 가족.
한하리는 미소를 짓다가 ‘앗’하는 소리를 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갑자기 방 한구석의 작은 화장대 서랍을 뒤지더니 진가구에게 뭔가를 가져왔다.
“아!”
진가구도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하린은 눈물 때문에 화장이 번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임신테스트기였고 선명한 두 줄이었다.
아까 그녀는 방벽 바깥으로 떠나기 전에 챙긴다는 걸 깜빡했었다.
진가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남자보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한하린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해댔으니 콘돔이 성하겠어?”
진가구는 귀엽게 질책하는 한하린을 콱 끌어안았다.
바깥에는 웡꺼 놈들이 약에 취해 돌아다니고 허공으로 마구 총을 쏴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진가구는 그녀를 끌어안다 말고 그녀의 배에 귀를 갖다 댔다.
“바보야. 지금 태동이 들릴 리 없잖아.”
“아, 알았어. 하린아. 너 지금 먹고 싶은 건? 아, 아니다. 기저귀부터 마련해야 하나?”
초보 아빠가 그렇듯 진가구는 그녀의 임신 소식에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하린은 차분하게 진가구의 손을 잡고 그를 앉혔다.
“오빠, 난 오빠만 있으면 돼. 오빠만 무사하면 된다고.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젠 그만하자.”
전부터 줄기차게 한하린은 체잉꺼의 부하 노릇은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한하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진가구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체잉꺼, 아니면 심 부장 어느 쪽이든 그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오빠,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 난 한국 국적 없어도 돼. 분명 우리 아이는…… 오빠가 방금 말했지?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뜰 거라고. 분명 화사한 햇살 속에서 걷게 될 거야.”
진가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한하린은 진가구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뚝. 아빠가 될 사람이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쓰나? 그리고 알겠지? 경찰도, 조직도 다 잊어. 그냥 다 잊는 거야.”
진가구도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였고 심 부장이나 체잉꺼나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 선택을 하기 싫어 류모성과 함께 탈출하려고 했지만, 그는 도돌이표처럼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체잉꺼냐? 아니면 대한민국 경찰이냐?
체잉꺼나 심 부장이나 언제든 진가구의 신분을 폭로해서 제거할 수 있다.
진가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불안요소 하나를 더 생각해냈다.
아까 이진영이 데리고 간 사람은 류모성 모자를 포함해 두 명뿐이다. 배신자 아줌마는 이진영의 손에 죽었고, 나머지 7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중에 4명은 같이 도망치다 눈먼 총알에 죽는 걸 진가구는 목격했다.
남은 사람은 3명.
그중에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아니 한국어를 몰라도 진가구가 말한 관리번호 3304012 일곱 자리 번호를 듣고 그게 잠입경찰 관리번호라는 걸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린아. 오빠, 잠시만 바깥 상황 살펴보고 올게?”
한하린은 대번에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걱정 마. 그냥 바깥 상황만 살펴보고 오는 거야. 쓸데없는 짓 안 해.”
거짓말이다.
진가구는 가지고 있던 권총을 한하린에게 건넸다.
“오빠, 이건 왜?”
“혹시 또 모르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고…….”
진가구는 사재기한 물건들을 바라봤다.
아까는 급히 이곳을 떠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다. 지금 난민지구에서는 식수가 부족해서 기우제를 지내야 할 판이었다.
물이나 식량 때문에 잠입경찰이라 핑계를 대고 아무나 죽일 수도 있다.
“걱정 마. 총을 쏠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지. 그리고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거 알아보러 가는 거야.”
역시나 거짓말이다.
이제 진가구와 한하린이 난민지구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진가구는 이제 그의 아이를 품고 있는 아내를 안심시키고 바깥으로 나왔다.
임시거주구 복도에도 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오직 미래에 대한 희망만으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억지로 억눌렀지만 지금 희망 따윈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가혹한 선택뿐이었다.
또한 막막했다.
이 야밤에 각지로 흩어진 난민들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