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5
제225화
그때 진가구는 이진영이 난민번호를 운운한 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 난민번호.”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진가구는 다른 사람들의 난민번호를 수첩에 적어놨었다.
“일단 류모성하고 란 아주머니는 아니고. 그 할머니는 나이가 많으실 테니 난민번호가 앞자리일 테고.”
진가구는 소거법으로 이진영과 함께 갔거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웠다.
워낙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이라 죽은 사람들을 추리해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아리까리한 3명의 이름을 추려냈다.
난민번호만 있으면 대략적인 주소를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체잉꺼의 완장을 끼고는 동사무소 격인 난민행정출장 사무소로 향했다.
대한민국은 난민지구를 완전히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난민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출장 사무소를 열었다.
새로 태어난 난민이나 아니면 지금껏 등록하지 않은 난민들은 이곳에서 등록하고 월미도 난민지구에 한해서는 합법적으로 가게를 열 수 있다.
오늘 류모성과 함께 한 난민들은 혹시나 해서 전부 난민번호에 등록된 사람들로 뽑았다.
난민번호도 없는 무적자라면 진가구도 웡꺼의 첩자인지 출신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미사일에 총에 난리가 났으니 웡꺼 놈들의 순찰 간격이 좁아졌고 웡꺼의 지휘관이 진가구를 불러세웠다.
체잉꺼의 완장은 어딜 가도 무적이었다.
웡꺼의 트럭에 탄 지휘관은 완장을 알아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형제. 어디 가는 거지?”
“어,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출장 사무소에.”
“출장사무소? 거긴 벌써 불탔는데?”
“이런 제기랄, 바늘에 대한 정보를 들었는데 확인해 봐야 해.”
“그래? 그러면 우리를 따라와 그쪽 정보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 마침 그쪽으로 가니까 탈래?”
떨떠름하긴 했지만 진가구는 트럭에 올라탔다.
테크니컬 트럭에는 소년병 몇 명이 타 있었다. 전부 류모성 또래의 10대 초반 소년들이었다.
소년들은 약이나 술에 취해 멍한 표정이었다.
웡꺼 놈들은 아프리카에서 군벌들이 소년병을 부리는 방법을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아이들을 첫 살인에 무디게 하려고 약에 취한 상태로 사람을 죽이게 만든다.
아이들은 점점 더 약에 의존하게 되고 그럴수록 생체 로봇이나 다를 바 없는 총 쏘는 기계가 된다.
소년병 중에 제법 짬밥이 있는 녀석은 담배를 연달아 피우며 진가구에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진가구는 그 미소가 공포스러웠다.
아이는 푸른 반다나를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반다나에 말보로 담배를 끼워 넣었다.
행색은 베테랑이지만 저 아이도 방벽 안에서 자랐으면 분명 부모한테 응석을 부리고 반찬 투정이나 할 나이였다.
진가구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지금 한하린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눈앞에 있는 소년처럼 웡꺼의 소년병이 되는 것이었다.
난민지구의 남자아이들은 총과 노란 완장을 받을 수 있기에 웡꺼의 소년병으로 많이 지원한다.
그리고 많이 죽는다.
딱히 조직간의 항쟁이나 경찰과의 전투가 아니라도 약물중독으로 많이들 죽는다.
진가구도 지하도박장 근처에서 약에 취해 죽은 소년병들을 많이 봤었다.
“형제, 다 왔다.”
진가구는 정신을 차리고 트럭에서 내렸다.
푸른 반다나의 소년병은 뭐가 그리 좋은지 트럭에서 내리는 진가구를 보면서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형제, 바이바이.”
“시발, 난 네 형제가 아니야.”
진가구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그렇게 대답하고 중화대루 앞의 가게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직도 가게들이 운영 중이었지만 관광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각국 대사관들은 서가영의 피습 직후 모든 자국민들에게 월미도에서 신속히 빠져나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중화대루도 그렇고 근처의 가게들도 공허하게 네온사인 불빛만 번쩍일 뿐이다.
진가구는 대로를 가로질러 지휘관이 일러준 곳으로 향했다.
행정 출장사무소라고는 해도 로봇 몇 대와 컴퓨터 단말기가 다였다.
웡꺼 놈들은 혹시나 싶어 행정 출장사무소의 로봇과 콘솔을 옮겨놨다. 옮겨놓은 사무소에도 웡꺼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고 놈들은 다가오는 진가구를 바라보고 기관총을 겨눴다.
“오, 형제 무슨 일이지?”
“바늘에 대한 정보가 있어. 난민번호를 검색해야 해. 그리고…….”
진가구는 중화대루의 경비 상태를 힐끔 쳐다봤다.
“아, 저거. 뻥지 사절이 온다니 준비는 해놔야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난민지구와 다르게 중화대루 앞은 무슨 영화제라도 열리는 것처럼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고 지금 꽃꽂이나 인테리어가 한창이었다.
진가구는 생화 꽃에 물을 뿌리는 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난민지구 사람들은 수도가 딱 끊어져 갈증에 시달리는 판인데 이곳은 고작 체면치레를 위해 생화를 가져다 놨다.
경비대의 지휘관은 진가구의 비웃음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흥, 나도 동감이야. 뻥지 새끼들 뭐가 이쁘다고 이 꽃단장을 해야 하는 건데?”
“그러게나 말이야.”
진가구는 대충 맞장구를 쳐주고는 간이 사무소 안으로 들어왔다.
로봇들은 반쯤 분해되어 있었고 콘솔 역시 이런저런 장치들이 붙어 해킹이 되어 있었다.
웡꺼는 원래부터 인신매매 목록을 관리하던 조직이 따로 있었고 그 방법을 응용하여 새롭게 난민번호를 관리했다.
진가구는 난민번호를 적은 쪽지를 접수원에게 내밀었다.
웡꺼의 노란 완장을 차고 있는 접수원은 별 관심 없다는 듯 행정 로봇에게 쪽지를 내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가구는 난민번호와 이름 그리고 대략적인 거소를 손에 넣었다.
“그놈들이 짭새라고? 척살령 내려줄까?”
웡꺼는 바로 체계적인 잠입경찰 제거를 위해 행정사무소를 공격하고 정보를 빼냈다.
롱꺼 조직이라고 모든 난민들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척살령? 그래주면 고맙고.”
“어, 연락처 남겨주면…… 아 무선 통신은 안 되지. 혹시 결과가 궁금하면 여기로 연락 줘.”
접수원은 크게 써놓은 유선 전화번호를 가리켰다.
그 번호를 받아 적으면서도 진가구는 양심이 거리꼈다.
지금 척살령이 떨어진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었고 어쩌면 진가구가 경찰인 걸 모르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이제 그는 딸린 가족이 하나 더 불어난 아버지였고 여기서 비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진가구는 행정사무소를 나와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대략적인 거소가 나왔고 웡꺼 놈들이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들을 찾는다면 3명 전부 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웡꺼에게 잡혀 죽기 전에 그 사람들이 진가구의 정체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특히 관리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면 치명적이었다.
지금 난민지구에서는 그깟 관리번호 따위 없어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판에, 일곱 자리의 관리번호는 너무나 맛있는 먹이였다.
진가구는 쪽지에 쓰여 있는 사람들 중 중화대루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난민지구의 주소는 대한민국의 무슨무슨길 하는 주소보다는 난민끼리 통용되는 구역 번호를 더 많이 쓴다.
구역 3. 이 구역은 바로 신간척지에 무작위로 구역을 나누고 난민들을 수용하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각 구역마다 텐트촌들이 빼곡하게 사각형으로 나뉘어 있어서 한국 쪽의 지도보다 찾기 쉬웠다.
“제기랄, 빨리 짐을 싸야 해! 징병관이 찾아올 거라 그랬어!”
텐트촌 한구석에서 소리가 들렸고 진가구는 총을 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소리가 들린 곳은 쪽지에 써 있는 바로 그 텐트였다. 아까 진가구와 대피한 사람들 중 중년 부부 두 명이 잽싸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진가구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텐트 그림자에 숨어 천천히 중년 부부에게 다가갔다.
중화대루와 그 근처에 있는 가게들만 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혀서 그런지 난민들의 텐트는 더더욱 어두웠다.
사람들은 중화대루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링로드 공사 현장 바로 밑이나 진가구의 거주구 근처 등으로 피했고 이곳 텐트촌은 텅 비어 있었다.
진가구는 AK-99 소총을 꺼내 탄젠트식 가늠자로 그림자를 겨눴다.
그러나 진가구가 총을 발사사기 직전 갑자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텐트촌을 비췄다.
중년 부부가 두려워한 것은 ‘징병관’이었다.
웡꺼의 공격부대는 더 이상 식량이나 물을 미끼로 사람들을 끌어내는 것이 통하지 않자 난민번호를 등록한 성인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이 중년 남자도 그 빨간 징병딱지가 나왔고 웡꺼의 지휘관이 몇몇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빈 텐트촌에 광동어로 이름 몇 개가 메아리치고 대답이 없자 지휘관은 턱 끝으로 부하들에게 잡아 오라는 시늉을 했다.
징병관의 부하들도 소년병이 많았다.
아직 앳된 소년들은 사냥개처럼 흰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이름을 외쳤다. 중년 부부는 텐트촌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남편 쪽을 먼저 텐트 뒤로 돌아가라고 했다.
진가구가 숨어 있는 곳에서는 부부의 행동이 그림자로 보였다.
약에 취한 소년병들은 귀가 굉장히 밝았다.
텐트 방수포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쪽으로 슬금슬금 야행성 동물처럼 몰려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하는 진가구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야투경 등 장비가 있어도 야간전에서 저 체구가 적은 소년병들과 싸우는 건 꽤 힘들어 보였다.
“여자다아아!”
“여자다아아아!”
소년병들은 중년 여자를 발견하고 여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웡꺼의 지휘관은 트럭에 기대 담배를 피우다가 급히 소년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여자는 터진 트렁크를 든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뭐야? 남편은?”
“모, 몰라요. 아까 폭탄이 터지면서 어디로 갔어요.”
불빛 아래 드러난 웡꺼의 지휘관도 잘 쳐줘야 고등학생 정도였다.
놈은 다른 소년들 사이에서 거들먹거렸고 진가구는 그 모습이 어딘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의 한 장면 같았다.
사냥한답시고 미쳐버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지도자 잭.
헤드라이트에 비친 모습은 딱 그 모습이었다.
놈들은 완장을 차고는 있었지만,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놈들은 50이 훌쩍 넘은 아줌마 주위를 돌아다니며 음탕하게 눈알을 굴렸다.
마구잡이 징병에 마구잡이 강간.
웡꺼조차도 부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아식별이 되지 않아 자기들끼리 교전을 벌이는 판이니, 군대의 기강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롱꺼 조직이 중심을 잡으며 난민들에 대한 강간, 살인들을 막았다.
웡꺼나 쎄잉꺼조차도 롱꺼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구역에서는 치안을 확보했지만, 지금은 준 전시상황이었다.
제재가 사라지자 웡꺼의 개들은 전쟁을 앞두고 완전히 고삐가 풀린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소년들은 중년 여자를 곧 강간할 기세였다.
“잠깐, 형제들.”
진가구가 나오자 소년들은 일제히 진가구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그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야. 좀 봐주지 그래?”
오히려 그 말이 이놈들 대장의 비위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는 놈이 체잉꺼의 완장을 보고도 삐딱하게 그를 쳐다봤다.
“이건 우리 웡꺼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병사를 모집해서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그걸 좀 봐달라는 거야.”
진가구는 꿍쳐둔 담배 몇 갑을 내밀었다. 소년 중대장은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탁하고 쳐버렸다.
바닥에 담배가 나뒹굴고 진가구는 인상을 찌푸렸다.
“뇌물은 통하지 않아. 한 사람을 데려가거나…… 아니면 네가 끌려갈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