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6
제226화
그때 뜻밖의 사람이 진가구를 도왔다.
짝!
갑자기 이만수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면서 소년 중대장의 뺨을 때렸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지랄이야? 장유유서도 모르냐?”
이만수는 소년 중대장의 뺨을 마구 때리다가 놈에게 주먹을 날려 쓰러뜨리더니 발로 놈의 배를 걷어찼다.
소년 중대장은 꼼짝도 못 하고 이만수에게 두들겨 맞았고 소년들은 먹이를 빼앗긴 침팬지처럼 끽끽대는 소리를 내면서 이만수에게 총을 겨눴다.
이만수는 겨눠진 소총을 손으로 잡더니 발로 뻑하고 소년병을 걷어차서 AK-99 소총을 발로 밟았다.
“어린누무 새끼들이 어디서 어른한테 총을 겨누고 그래! 웡꺼 형님이 그렇게 가르쳤어! 어! 이 쌔끼들 어디 한 번 총알 한 번 맞아봐야 정신차릴라나!”
폭력에는 폭력.
어쩌면 진가구가 너무 안이했는지도 모른다.
이만수도 체잉꺼의 완장을 차고 있었지만, 소년병들은 굴복시킨 건 그의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소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총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았다.
“꺼져 이 새끼들아.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들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
이만수의 기세에 눌린 소년병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자신들의 중대장을 부축해서 트럭에 실었다.
“너희들 분명 나중에 문제가 될 거다.”
“이 새끼들. 말하는 꼴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건지 원.”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건지 물어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트럭에 탄 소년병들이 혼비백산해서 사라지고 이만수는 진가구를 보며 씩 웃었다.
“진가구, 너가 여기 웬일이냐?”
“만수, 너야말로 여긴 왜 온 거냐?”
“내가 먼저 물었잖아? 혹시. 이쪽이랑?”
이만수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는 바짝 겁에 질렸다.
어둠 속이라 그녀는 진가구를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
징병관이 사라지자 텐트 뒤에서 쭈뼛쭈뼛 남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 사람들?”
이만수는 갑자기 나타난 중년 남자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진가구가 한국어로 말했다.
“괜찮으세요?”
“예, 괜찮아요.”
중년 남자는 무심코 한국어로 대답했다.
진가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정말로 중년남자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미안합니다.”
탕탕.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중년 부부가 풀썩풀썩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만수는 진가구가 냅다 총을 쏘자 깜짝 놀랐다.
“뭐, 뭐 하는 거야?”
“너도 한국어 들었잖아? 한국 짭새였었어.”
“짭새였다고? 깜짝이야. 그럼 미리 말해주지.”
“미안, 말하면 도망칠 수도…… 있어서.”
네온사인 불빛에 나란히 부부의 시체가 누워있다.
진가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끌려가는 대신 진가구가 경찰이라고 먼저 찔렀을지도 모른다.
진가구는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나란히 누운 부부의 시체가 어딘지 자신과 한하린의 얼굴처럼 보였다.
“뭐야 왜 또 똥씹은 얼굴인데?”
“그냥, 뭐 아는 사람이었거든.”
“아는 사람? 근데 희한하네. 이런 늙다리들이 경찰이라니.”
이만수는 부부의 소지품을 뒤적거리다 아까 진가구가 나눠준 가짜 여권을 발견했다.
“진짜 한국 짭새가 맞긴 했네.”
이만수는 여권의 사진과 부부를 대조하다가 시체의 얼굴 위에 각각 여권을 엎어뒀다.
“만수, 넌 여기 왜 온 건데?”
“왜 온 거긴? 내일 일 때문에 온 거지.”
이만수는 중화대루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넌 걱정도 안 되냐? 아까 나와 본다메?”
“아, 그게.”
“타겟도 정해졌겠다. 너 대신 내가 좋은 저격장소를 알아놨어. 이 근처야. 한번 가볼래?”
이만수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아니, 처리해야 할 바늘이 하나 더 있어.”
진가구는 좀처럼 죽은 중년 부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만수는 그게 무슨 대단한 책임감인 줄 알고 오히려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도울게. 한국 짭새라면 난 질색이거든.”
“…….”
이만수는 아직 진가구가 잠입경찰이라는 것을 모른다.
만약 놈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돌변할까?
진가구는 이만수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너무나 두려웠다.
체잉꺼가 과연 조용히 그의 신분을 숨겨줬는지도 문제였고, 체잉꺼 가지고 있던 원본 인사카드의 복사본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뭔 생각하는 거야? 가자. 짭새 죽이러.”
이만수는 괜히 진가구의 팔을 툭하고 치고는 건들거리면서 앞서 걸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진가구는 남은 한 사람의 주소를 이만수에게 보여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중화대루의 대로를 걸어서 폐선지구로 빠져나갔다.
이곳은 굴다리에서도 꽤 깊숙한 곳이었고 월세가 싸기로 유명했다.
주소는 마치 링로드 구조물 밑에 검은 성처럼 자리하고 있는 구룡성채였다.
이 구룡성채는 홍콩에 있었던 까우롱쎄잉짜이(九龍城寨)와 똑같이 생겼다. 사실 구룡성채라는 이름도 까우롱쎄잉짜이와 똑같이 생겨서 따온 말이었다.
건물은 콘크리트 건물이 우물 정(井)자로 마구잡이로 붙어 있었고 건물이 외벽으로 마구 중축되며 더더욱 기묘한 모양이 되었다.
외벽에는 광동어 번체자 간판들이 마구잡이로 붙어 있고 건물 외벽에는 삐죽삐죽 빨래 걸이용 파이프가 길게 늘어져 있다.
원래 이 콘크리트 건물들은 링로드 건설 인원들을 위한 관사였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항만주둔군 인원의 막사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수많은 빈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건물 안 역시 겉모양처럼 더럽고 혼잡했다.
좁은 복도가 구불구불 연결되어 있고 수많은 방들이 개미굴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진가구처럼 조직에 소속된 조폭이라도 들어오길 꺼렸다.
1년 내내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하고 네온 불빛이나 싸구려 형광등의 조명 불빛만 안을 비춘다.
안에는 때 지난 붉은 춘련이 붙어 있고 등사기로 만든 프린트 마약 광고나 옛날 전쟁 전의 광고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뭐해, 진가구? 안에 있다며?”
“만수, 너는 무섭지도 않은 거냐?”
“뭐가?”
“아니, 여긴 조직원들도 들어갔다가 못 나오는 데잖아?”
“쫄았냐? 난 여기 잘 알아. 여기서 살아본 적도 있고. 그러니 이 형님만 믿고 따라와.”
진가구는 태평한 이만수를 보고 안도감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잘 몰랐다.
구룡성채의 1층은 쓰지도 않는 거대한 우편함 실이었다.
옛날 링로드 공사의 인부들이나 관계자들의 우편을 위해 각각의 구획, 방마다 우편함이 빼곡이 마련되어 있었다.
원래는 사다리처럼 생긴 로봇이 왔다 갔다 해야 했지만, 이 건물에 로봇은 거의 없었다.
바닥은 또 어찌나 축축한지 입구 근처에는 오래된 동굴마냥 녹색 이끼가 끼어 형광등 불빛에 유난히 초록색으로 반짝였다.
진가구와 한하린이 사는 곳도 주거환경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지린내와 구리구리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1층에 개미굴처럼 죽 늘어선 나무 문 뒤에서는 야릇한 남녀의 교성이 들린다.
이곳은 매춘굴이나 아편굴로도 유명했다.
중화대루도 굴다리 깊숙한 곳이라 어두웠지만, 이곳은 밤 그 자체를 칼로 잘라서 내던져 놓은 듯했다.
굴다리는 영원한 밤이 계속된다는 건 사실 이 구룡성채의 밤을 뜻하기도 했다.
중화대루의 ‘밤’이 네온사인 불빛으로 화려한 화류계의 밤이라면, 이곳의 밤은 음습하고 퀴퀴하고 숨겨놓고 싶은 그런 밤이었다.
진가구는 타일 바닥을 뚜벅뚜벅 밟고 구룡성채의 정(井)자 모양의 정중앙 네모 모양으로 뻥 뚫린 중앙정원으로 향했다.
건물들이 사각형 모양으로 죽 올라가고 뻥 뚫린 가운데 중앙정원에는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바로 저 천막이 늘어선 곳이 아편굴이었다.
이곳 천막에서 위를 올려보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네 면의 건물들이 보이고 천장은 링로드 구조물에 막혀 있었다.
저 멀리 링로드 구조물에서는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용접 불꽃이 반짝거리고 비행 등을 깜빡거리며 헬기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진가구, 너 여기 처음 와보냐?”
“어.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야.”
“난 1차 봉기 때까지 여기서 살았어. 그때는 저 링로드가 저만큼 완공되지 않아 여기에 햇볕이 들었거든. 뭐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 말이야.”
진가구는 ‘이게 나쁘지 않다고?’ 항변하는 표정으로 이만수를 바라봤다.
“진가구, 너는 굴다리가 싫은 모양인데, 나는 여기가 좋아. 흐흐흐 여기 분위기도 좋고 우리 사무소의 분위기도 좋아해.”
“왜?”
“그야 돈이 없어도 마음껏 살 수 있으니까. 거슬리는 놈은 죽여도 처벌받지 않고, 여자도 마음껏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잖아? 그리고 제일 재밌는 게 한국 놈들하고 외국 관광객이야. 굴다리에 찾아오는 놈들 표정을 봤어?”
이만수는 킬킬 웃으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놈들은 자극을 바라면서 굴다리에 방문하고 마치 동물원 원숭이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지듯 우릴 바라보잖아? 근데 난 반대로 놈들이 동물원 원숭이들 같다고. 바깥에서는 점잖은 척하는 놈들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추하게 노는 꼴을 보면 그 모습이 꽤나 볼만하거든. 아직 중학생 뻘인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놈들. 그중에는 무슨 어떤 나라 장관도 있고 의원들도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만수는 어느 정도 계단을 올라간 후 마치 이곳이 자신의 성이라도 되는 듯 팔을 벌리고 말했다.
“똑같다는 거야. 그놈들이나 우리나. 저 방벽 밖의 삶이나 여기나. 다들 자극을 찾아 좀비처럼 어슬렁거리며 결국 월미도로 기어들어오느냐 원래 이곳에서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이만수는 계단을 올라가며 중앙정원에 나뒹구는 사람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다들 쾌락에 취한 관음증 환자들이지. 총알이 튀고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그런 걸 원해서 이곳을 관음증 환자들처럼 들여다보잖아? 이곳에 누가 사는지는 관심 따윈 없어. 난민들이 누군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르뽀 작가들은 그럴듯한 소재로 쓰고, 소설작가나 영화감독들은 그럴듯한 화면이 나오니까 난민지구를 영화화하고 그러지. 근데 다들 그냥 지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자극제로 써먹다가 지루해지면 다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되돌아가는거야. 우린 그런 배경을 제공하는 서비스 업종일 뿐이야.”
진가구는 이만수의 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공원에 가면 해적분장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로봇들 있잖아? 그거랑 똑같다니까? 조폭과 창녀의 분장을 하고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는 환상의 놀이공간. 그게 월미도라 이거야.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너가 나쁜 손님은 저렇게 뒈진다는 거지. 그것도 참 좋아. 여긴 손님들의 갑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복도 한구석에는 총에 맞아 죽은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 시체를 내다 놓은 놈은 진가구와 이만수에게 눈을 부라리며 ‘너네도 죽고 싶냐?’하는 투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