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28
제228화
여자는 진가구가 자주 가는 그 차찬탱의 바로 그 웨이트리스였다.
늘 피곤에 절어 ‘커피 리필?’을 외치던 그녀.
그녀 역시 한하린이나 진가구 또래의 여자였고 전쟁을 피해 방벽 안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이 웨이트리스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가정을 이루고 노년까지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오늘 진가구 일행과 함께 방벽을 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진가구의 말 한마디가 이 여자를 비참한 시체로 만들었다.
여자의 이마에는 아까 이만수가 했던 것처럼 가짜 한국 여권이 못으로 박혀 있었다.
저 여권은 진가구가 준 거였다.
펼쳐진 여권에는 다리미로 필름을 붙이는 바람에 사진도 삐뚤어지게 붙어있었다.
눈물을 흘릴 순 없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이만수가 의심할 수도 있거니와 진가구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화차지옥.
진가구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지옥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두 개의 불바퀴가 돌아가며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갈아버리고 불태워버린다.
웨이트리스.
중년 부부.
그 외에도 진가구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진가구의 선택으로 갈려 나갔다.
진가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 선택마저 스스로 할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가자, 만수.”
“어디로?”
“어디긴.”
진가구는 중화대루 근처의 9층 건물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예전 관광객 피살사건이 벌어졌던 음식점 건물이었고 근처에는 유인환이 푸만추 수염을 체포했던 골목이 보였다.
이 건물 위에 있는 철제 통신탑을 올라가면 딱 세탁소 간판과 사우나 간판에 가려져 있는 공간이 나왔다.
이 공간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아치로 연결되어 있었고 아치에는 ‘중화대루 상점가’라고 쓰여 있다.
상점가 아치는 불이 꺼져 있었고 휘황찬란한 중화대루의 조명에 가려져 그냥 철골 구조물처럼 보였다.
여기서 옆으로 꺾으면 높다란 통신탑이 하나 나온다. 이 통신탑은 유사시에는 재밍 신호로 주변 통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었다.
진가구는 미리 가져다 놓은 건케이스를 열었다.
EVR-14E.
당해룡을 죽이러 갈 때 쓴 그 총이었다. 상점가 간판의 높이나 중화대루의 거리까지 전부 당해룡을 쏠 때와 아주 유사했다.
당시에 체잉꺼가 ‘시험’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진가구와 이만수는 당해룡을 처치하며 중화대루에 오는 방문객을 쏘는 연습을 한 셈이었다.
“이야, 이거 신기한데? 열화상 기능도 있어?”
이만수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열화상 쌍안경을 가지고 중화대루 앞 곳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가구는 한숨을 내쉬었고는 조준경으로 식장을 조준했다.
마침 화동이 꽃을 특사에게 건네는 장면을 예행 연습 중이었다.
건너편 올드차이나 레스토랑에서는 웡꺼의 여자 비서가 꽃을 받고 아이의 손을 잡는다.
진가구는 여자 비서의 등 뒤를 조준경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탕.”
하마터면 진가구는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이만수는 낄낄 대면서 씩 웃었다.
“그 한 방에 50억이야. 나도 형님한테 들었어. 아니 그리고 이번 표적은 100억을 줄 수도 있다고 그랬어.”
“100억은 무슨 소리야?”
“나도 들은 게 있다고. 우리 표적이 지금 가장 지지율이 높대? 상금도 흥정을 할 수 있다는 거지. 횟감이나 요릿감도 시가대로 오르잖아? 이것도 시가대로 요금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아, 진가구, 걱정 마. 이 형님이 다 알아서 흥정할 테니까.”
100억.
진가구도차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액수였다.
이 정도 돈이면 경찰을 매수하고 난민지구를 탈출하는 건 물론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떵떵거리며 평생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 표적을 쏘게 되면 진가구는 사면서를 받을 수 없다.
그는 심부장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사면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수, 저 말이야. 내가 혹시 실패하면…….”
“어? 실패라니? 아 한 방에 죽이지 못했을 때? 그땐 웡꺼 형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니, 그 돈 말이야. 내가 잘못되면 하린이에게 전해줄 수 있겠어?”
이만수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형제? 네가 죽다니?”
형제.
이만수는 처음으로 진가구를 형제라고 불렀다.
가라앉는 차에서 구해 준 후 이만수는 진가구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만약의 경우란 게 있잖아? 경찰이나 육군 놈들도 잔뜩 들어올 테고.”
이만수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형제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게 우리들의 신조 아니야?”
전에 한하린이랑 한번 자 보고 싶다 어쨌다 했던 놈이라 그 말이 백퍼센트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형제, 네가 실패하면 내가 반드시 성공시킨다. 걱정 마.”
“글쎄다. 넌 총도 못 쏘잖아?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
이만수는 농담인 줄 알고 씩 웃으며 괜히 진가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진가구는 어느 한쪽에도 서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그렇게 두 개의 불바퀴 사이에 놓인 그에게 선택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차라리 시간이라도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x6 지카담판(じか談判, 직접 담판하다.)
“자, 시간 없어! 빨리빨리 움직여어어!”
강력전담부장이 메가폰을 들고 직접 전담부 소속 대응팀들을 지시했다.
대한민국 정부 특사 이세화 역시 메이크업과 의상 등 준비를 마쳤다.
“임금님 행차가 따로 없군.”
이진영은 테이블에서 소총을 점검하다 말고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의전 자체는 대통령 수준이었고 정말로 임금님이 굴다리에 행차하는 것 같았다.
중부서 주차장에는 수많은 엑소슈트와 공격 로봇이 도열해 있었고 랜드쉽 두 대까지 특사의 리무진 차량 뒤에 세워져 있다.
얼핏 보면 특사를 호위하는 게 아니라 중화대루에 쳐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육군은 정말로 수틀리면 이 병력을 그대로 중화대루에 투입해서 롱꺼, 웡꺼를 생포한 후 전쟁을 끝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경찰로서는, 특히 치안담당부서인 중부서로는 육군의 대규모 병력을 딱히 환영할 수는 없었다.
육군 야전군이 이동하면서 반전주의 시위자들이 몰려들어 한바탕 난리였다.
반전주의자들은 하얀 옷을 입고 중부서 건너편 도로에서 춤을 추고 전쟁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냥 평화주의자만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이곳에는 온갖 이념을 가진 단체들이 다 몰려들었다.
난민 해방론자들, 러다이트 계열이지만 난민을 때려잡자는 극우 쪽 놈들.
이진영 때문에 여러 번 기절했던 중부서 서장은 수많은 시위단체 때문에 또 한 번 기절할 뻔했다.
심지어 정보국은 시위단체들 사이에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끼어서 폭발 테러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래저래 격무에 시달리는 건 중부서 형사들이었다.
또 하필 이세화가 44팀을 경호책임자로 찍은 것도 문제였다.
44팀은 완전무장을 하고 본청에서 공격 로봇 두 대를 더 지원받아 김대현과 전상영이 마지막 체크를 하고 있었다.
“자, 다들 모여어어!”
이진영은 방탄조끼까지 갖춰 입고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특별 경계령이 떨어진 이래 순찰업무와 각종 경계 업무를 뛰느라 초췌해진 44팀 팀원들은 눈빛만은 초롱초롱 반짝였다.
“이세화 선배가 우리를 경호팀으로 뽑긴 했지만 우리는 그냥 구색만 맞추면 돼. 알지? 진짜 경호는 저 정보국 경호부서에서 알아서 할 거야.”
이미 어제부터 이세화의 주변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정보국 요원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축형 레일건이 든 서류가방을 들고 그 어떤 사람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저…… 팀장.”
이번에는 이진영도 놀라지 않았다. 전상영이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는 안 됩니다.”
포메라니안 프랑소와즈가 낑낑 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었지만 이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녀석은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개집으로 쏙 들어갔다.
“다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굴다리에서는 앞에 나서지도 말고 절대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진영은 걱정 많은 노인처럼 설교하고는 팀원들의 장구를 점검했다.
군대에서 하던 가락이 있는지라 전투 전 신병들의 전투장구를 점검하는 분대장처럼 보였다.
“출발 5분 저어어어어언!”
강력부장이 고함을 지르고 경찰들은 모두 바짝 긴장하고 중부서 강력부 행어를 나섰다.
바깥에 있던 육군 병력들도 출발 5분 전 고함 소리를 듣고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육군 장갑차와 고기동 차량에 보병들이 우르르 타고, 그 옆을 엑소슈트 부대가 차르르르 롤러대시 소리를 내면서 먼저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이세화는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중부서 계단을 내려와 리무진에 탑승했다.
리무진을 열어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자친구 신희정이었다.
“와,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다 보네요?”
“마님, 시끄럽사옵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얼른 타시지요?”
신희정은 복화술로 이세화에게 쫑알거리고는 그녀를 차에 태웠다.
오늘 경호 총책임자는 신희정이 아니었고 현장 차석지휘관이라 따로 할 일이 많은데도 그는 현장에서 여자친구를 배웅했다.
신희정은 이진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팀장님. 잘 부탁합니다. 제가 나갈 수 있다면 벌써 나갔을 거예요.”
“걱정 마시길. 이브이도 있으니까요.”
신희정은 EV-1을 돌아보며 로봇의 흉부장갑을 툭툭 두드렸다. 그는 친구인 이진영만큼이나 EV-1도 깊이 신뢰하고 하고 있었다.
신희정은 경호담당부서에 오케이 사인을 내리고 차에서 물러섰다. 이세화의 뒤를 따르는 정보국 지휘차에는 신희정의 부하 ‘감 팀장’이 올라탔고 신희정은 감미영 팀장에게 따로 뭔가 이야기를 건넸다.
이윽고 VIP가 리무진에 오르자 이진영과 44팀, 그리고 다른 대응팀도 움직였다.
경찰 경호팀은 리무진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고 EV-1, 빅베어 그리고 새로 배치된 공격 로봇 두 대가 리무진의 모서리 네 방향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앞으로 전진했다.
처음에는 모든 경호는 자기들이 맡겠다고 난리였던 육공도 EV-1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닫았다.
육군도 경찰의 이 고성능 로봇에게 여러 번 물을 먹었으니 EV-1의 성능이야 따로 브리핑할 필요도 없었다.
양옆으로는 육군 KF-37 로봇들이 두 줄로 전술방패를 들고 있었다.
어지간한 로켓이나 미사일 공격 따윈 이 로봇들의 방어망을 뚫을 수 없었고 그 뒤에 따라오는 랜드쉽 두 대의 화력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랜드쉽은 지상전의 최강자였고 대전차 로켓이나 미사일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중장갑의 전차가 그르르 중부서의 아스팔트 바닥을 박살 내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이래저래 손해만 보는 중부서였다.
작년 7월 츠루마츠를 박살 내고, 가을에 희망빌라에서 전차 두 대가 박살 난 이후 처음으로 육군이 굴다리에 진입하고 있었다.
이세화를 호위하는 10여 미터짜리 긴 행렬은 가장 가까운 방벽 검문소에 다다랐다. 검문소의 육군은 바리케이드와 차량 차단용 송곳판을 치우고 이세화 쪽으로 경례를 붙였다.
행렬은 지상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쐐애액!
공군과 해군 전투기가 저공비행하면서 여차하면 집속폭탄을 떨어뜨릴 기세로 롱꺼 패거리를 압박했다.
경찰의 블랙스와트나 육군의 특수전 지원단 틸트로터, 헬기도 이세화의 특사 행렬을 하늘에서 엄호하고 있었다.
이세화의 리무진은 천천히 방벽을 나왔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난민지구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