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3
제23화
마치 경찰 신고 당시로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당시 촬영한 사진들이 정확히 벽면에 겹쳐졌다. 이진영은 돌돌이의 뒤로 걸어가서 피해자가 쓰러져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 아파트는 2천 년대 초쯤 만들어진 전형적인 복도식 아파트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장과 작은 덧문이 있고 그걸 열면 거실로 연결된다.
24평짜리 아파트. 전쟁 전에도 바다 전망을 제외하면 흔하디흔한 구조였다.
거실에는 피칠갑이 되어 있었고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돌돌이는 현장 경찰의 족적과 지문 등은 파란색으로 덧칠해서 표시해주었고 나머지 것들은 형광색으로 분류해서 좌르륵 보여주었다.
도은주는 감식 로봇이 신기했는지 허리를 약간 숙이고 프로젝터 모듈 바로 위에서 재현되는 현장을 관찰했다.
“백헌강은 이곳에 서서 저쪽 주방에 죽어있는 여자를 처음 발견했다고 합니다.”
빨간색 형광 마크 위에서 이진영은 거실 가운데 있는 화장실을 바라봤다.
도은주 역시 이진영을 따라서 주방 아일랜드 싱크대 뒤에 누워있는 피해자 시체를 발견했다.
이 사진 기록은 감식반이 아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파트너 로봇의 기록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도은주는 처참하게 찔린 여자의 시체를 보고 마치 공포영화를 볼 때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백헌강은 로봇더러 칼을 들고 오라고 해서 이곳으로 불렀고 마침 그곳에 서 있던 피해자가 칼에 찔렸다.”
돌돌이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략적인 피해자와 로봇의 위치 역시 띄워주었고 프로젝터의 화면에 이진영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도은주가 있는 곳에서 보면 딱 위치가 겹쳐지는 그럴싸한 랑데부였다.
납치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남아있는 족적이나 흔적 등을 보면 모든 것이 백헌강에게 유리했다.
그는 피해자에게 접근도 하지 않았고 그저 로봇더러 주방에서 칼을 가져오라고 했을 뿐이다.
현장 재현을 보면 중국식 발 같은 게 주방에 드리워져 있었고 가정용 로봇은 일어나서 냉온수기에서 물을 마시려는 피해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칼을 찔렀다.
“당황한 로봇은 칼을 빼려다가 동맥을 건드렸고 피가 왈칵 뿜어져 나오면서 앗 하는 순간에 피해자는 절명. 백헌강의 옷에 묻은 피는 피해자를 구하려다가 묻은 피.”
3차 작성 조서의 내용을 중얼거리면서 이진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임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무 부자연스럽잖아요? RV-H07 가사 로봇이 식칼을 들 때 이런 식으로 칼날을 바깥쪽으로 드나요?”
이진영은 갖고 있던 조서 종이를 말아서 대검을 손으로 잡는 시늉을 했다. 희망빌라에서 로봇이 발견되었을 때도 두 손으로 칼날을 바깥으로 들고 있었다. 도은주는 이진영의 동작을 보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뇨, 절대로 그런 경우는 없어요. 가정용 로봇 설계의 제1 목표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불상사를 막는 거예요.”
“이를테면…….”
“가열도구 등 조리도구의 취급부주의로 사고가 여러 번 있었죠. 이 식칼 사고도 로봇 도입 초기에는 많았어요.”
도은주는 자신의 개인 태블릿을 돌돌이에 연결해서 여러 가지 소송사례들을 벽면에 투영시켰다. 그녀는 회사에서 나오기 전 신흥동 사건과 가장 유사한 사건의 동영상을 준비했다.
“이건 거의 50년 전쯤의 사례일 거예요. 모퉁이를 돌다가 어린아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푹.”
동영상은 모자이크가 되어 있지만 끔찍했다.
로봇은 식칼 칼날을 바깥으로 하고 걸어오다가 딱 로봇의 허리높이에 있는 아이를 찌르고 푸륵하고 동작이 멈췄다.
“경위님도 아시다시피 이건 보스톤 존슨 대 버몬트 오토 사건이죠. 그래서 모든 로봇 메이커는 위험한 물건을 들 때 디폴트 자세를 무조건 이런 식으로 바꿨어요.”
도은주는 이진영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들고 칼을 잡는 동작을 바꿨다.
칼날을 로봇 쪽으로 하고 칼날 끝을 다른 손으로 잡는다. 이렇게 하면 로봇은 급작스러운 위험 요소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 증거가 로봇이 칼날을 바깥쪽으로 하게 잡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 없어요. RV-H07의 인공지능은 훨씬 이전 모델부터 안정성에 두고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로봇이 감당하기 힘든 이익형량에 부딪히게 되면 어떨까요?”
“이, 이익형량이요?”
로봇 설계에서도 이익형량과 비례의 원칙은 굉장히 중요한 화두였고 인공지능 설계자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가령 가정부 로봇이 이 문발 뒤에 있는 사람을 강도로 판단했다면 말이죠.”
“강도라면……. 이미 방어규정이 있어요.”
그녀는 에코백을 열어서 또 다른 랩탑을 꺼냈다. 그녀는 직접 노트북을 조작해서 보여주었다.
“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라면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습니다. 최선은 이렇게 팔을 잡거나 끌어안아서 범인의 동작을 방해하는 것뿐이지요.”
도은주는 설명에 심취해서 이진영을 안는 시늉을 했고 이진영은 헛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 죄송. 아무튼 흉기로 상대를 찔러서 제압한다거나 하는 건 선택지에 없어요. 얘는 군용 로봇이 아니라 홈 로봇이에요.”
이진영은 도은주의 설명을 듣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요, 이 로봇은 홈 로봇이죠. 탐지 스펙은 가시거리 1백 미터, 비가시광선 탐지기능 없음, 각종 무장제어 기능 없음. EV-1이나 제가 전쟁 때 함께 했던 로봇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도은주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뜨악한 표정으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만약 이 로봇이 다른 로봇을 막으려고 했다면요?”
“예?”
“로봇 3원칙 간의 충돌입니다. 타인의 주거를 침입한 로봇을 막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로봇은 인간을 해치지 않고, 인간의 명령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 그건. 있을 수 없어요. 자신의 의도를 뛰어넘는 이익이 충돌하면 로봇은 다운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봇은 다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운되면 로봇 제2원칙, ‘저 로봇에게서 나를 지켜라’라고 명령한 백헌강의 명령을 거부하게 되니까요. 이 명령은 1원칙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에도, ‘로봇은 1,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을 지킬 수 있다’에도 위배되지 않습니다.”
도은주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살인 현장을 바라봤다.
“그, 그럼 이건.”
“이런 상황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거죠. 로봇이 착각하게 만든 겁니다.”
이진영은 피해자가 쓰러진 곳으로 걸어가 백헌강이 서 있었던 곳을 노려봤다.
“놈은 피해자를 로봇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방어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은주는 손톱을 오독 씹으면서 사건 현장을 바라봤다. 이진영의 가설은 설득력 있었고 로봇이 사람을 찔렀다는 현장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하지만 어떻게요? 아무리 가정부 로봇이라지만 인간보다는 탐지능력이 월등합니다. 이 아이들은 편견도 없고 그저 센서에 보고 들리는 걸 그대로 파악합니다.”
이진영은 그때 아일랜드 탁자에 뭔가를 올려놓았고 도은주는 그게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군용 디코이 플레어입니다. 고가도로에서 사용하고 난 깡통이긴 하지만요.”
“아…….”
도은주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주임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건 논리오류, 시각오류를 만들어서 인공지능의 미사일 유도 등을 피하는 거죠.”
도은주도 군용 미끼 모듈이 뭔지는 알았다.
그건 일종의 논리폭탄이었고 저급한 인공지능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곳에 로봇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논리폭탄은 전쟁 때나 사용되지 민간용으로 사용되진 않았다.
“그, 그럼…….”
돌돌이가 이진영 대신 컴퓨터 그래픽으로 설명해줬다.
“문제의 로봇은 가정용 로봇에 비싼 스킨까지 씌웠지요. 이건 섹스봇입니다.”
이진영은 로봇의 얼굴이 피부가 스킨이 제대로 씌워진 걸 보고 ‘섹스봇’이 아닐까 의심했고 그의 추측은 맞았다.
“섹스봇에게 가사 일을 맡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식칼로 식재료를 썰다 스킨이 찢어지거나 하면 비싸니까. 그래서 이 집안에는 문제의 RV-H07 로봇 외에 또 하나의 로봇이 있었습니다.”
이진영은 돌돌이에게 문제의 로봇을 비추게 했다. 지금은 경찰서 창고행이 되어 없었지만 분명 이곳에는 가사도우미 로봇이 한 대 더 있었다.
이 로봇은 고물 요리 로봇이었고 RV-H07보다 전 세대 로봇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구형 요리 로봇은 이곳에 있고 바로 이곳에서 원격으로 디코이를 가동시키면 대략 이렇게 됩니다.”
도은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논리폭탄으로 하필 한 곳에 피해자와 요리 로봇이 겹쳐져 보였고 요리 로봇은 꼬챙이를 들고 마치 백헌강을 찌르려는 듯한 행동처럼 보였다.
실은 그 요리 로봇은 위스키에 넣을 얼음을 송곳으로 깨고 있을 뿐이었다. 요리 로봇의 모습이 절묘하게 논리폭탄에 ‘영상이 튀면서’ 피해자와 겹쳐졌다.
“그, 그럼 RV-H07은 사람을 저 로봇으로 착각해서?”
“예, 아마도요.”
“하지만……. 하지만 전 여전히 이해가 안 가요.”
“제가 주임님에게 묻고 싶은 부분도 그거입니다. 돌돌아, 셧다운.”
돌돌이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서 풀이 죽은 듯 삐리비립하는 소리를 내면서 셧다운됐다.
진영은 가지고 온 경찰용 전파 방해 모듈을 작동시키고 매너 있게 도은주에게 의자를 내밀었다.
그는 아일랜드 싱크대에 엉덩이를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은 도은주를 빤히 쳐다봤다.
“시, 심문인가요?”
“아뇨. 그냥 질문입니다. 어차피 돌돌이도 껐고 지금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증거로 사용되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묻고 갈 이야기죠.”
“뭘 묻고 싶은 거죠?”
이진영은 깔끔하게 치워진 아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류요. 태성 AI가 호리코시의 로봇 프레임을 사용했을 때만 나타나는 특정한 오류.”
“제가 그걸 인정할 것 같은가요?”
“인정 안 하실 것 같으니 이런 곳으로 불렀습니다. 그쪽 회사 쪽의 입장도 있고.”
도은주는 의자에 앉아 빤히 이진영을 쳐다보다가 검지와 엄지로 V자를 만들어 내밀었다.
이진영은 천천히 담배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끼워주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파트는 불이 꺼졌고 바깥에서 비치는 푸른 불빛과 바다의 탐조등 덕에 도은주의 뺨이 파랗게 비쳤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도 파랗게 너울거리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도 호리코시와 우리 회사의 물건들이 자꾸 사고를 치길래 감사자료까지 샅샅이 뒤졌어요.”
이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해자가 쓰러진 곳을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까 광저우 이야기를 물으셨죠?”
도은주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곳은 지옥이었습니다.”
이진영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맛깔나게 담배를 피웠다.
“거기서 가장 끔찍했던 것도 로봇이고, 가장 고마웠던 것도 로봇이었습니다.”
담배 연기가 바닷바람에 흔들려 봄날 아지랑이처럼 몽환적으로 보였다.
“중공군은 로봇 3원칙이고 뭐고 일부러 로봇 3원칙이 오염된 로봇 살인부대를 투입했어요. 총탄과 포탄에 맞아도 그 짱개 로봇들은 좀비처럼 바닥을 기어 와서 우리를 죽였어요. 그 미친 로봇들을 막아주는 건 아군 로봇들이었지요.”
“아,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중공군은 자신의 로봇에게 죽기도 했다면서요?”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봇 3원칙이 오염된 로봇들은 더 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들은 피아식별도 하지 않았고, 한국군이 대피한 곳에서는 중국공산군 부대와 혈전을 치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