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36
제236화
잘려 나간 다리나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을 사이보그의 의체로 있지도 않은 신체를 긁어서 해결할 수는 없다.
로봇의 육체도 간지러움을 느끼게 설정할 수 있지만, 손톱으로 피부를 벅벅 긁는 그 느낌을 백퍼센트 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듯, 인간의 본능은 잃어버린 자신의 신체를 그리워했다.
지금 이진영의 눈앞에 있는 자들은 육군의 비윤리적이고 가혹한 실험 끝에 탄생한 병기들이었다. 각각 헤드모듈과 군복으로 가려진 아래에 인간의 살점이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있는 건 뭘까? 특히 기계와 결합된 사이보그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로봇 3원칙?
도은주는 로봇 3원칙이 인공지능이 인간을 추월하지 못하게 막는 지연정책이라고 말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우월했고 특별병과번호야 말로 그 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신체를 포기하고 무수히 많은 드론을 제어하거나, 전기를 제어하는 능력.
이런 건 인공지능의 보조를 받는다고 해도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다.
이들이 하나같이 불교의 각종 신 이름이 붙은 것도 의미심장했다. 어떤 의미로는 특별병과번호의 소유자들은 모두 인간을 초월했다.
그러나.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로봇과 더 구분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알라딘과 똑같았다.
램프의 지니는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소원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고 램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들은 램프의 지니처럼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우습게도 이들은 아직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필 이들에게는 그 존재의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증명이 분쟁이고 전쟁이며 살육이었을 뿐.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제석천은 마치 예언을 하듯 말하며 손을 들었다.
이진영은 저도 모르게 놈의 손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고 그곳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오, 이런 개 시부랄.”
공군의 전자전 통제기가 흔들리더니 수직으로 지상으로 처박힌다.
파일럿은 억지로 조종간을 잡아당겼지만 ‘플라이 바이 와이어’ 방식의 플랩은 잔뜩 위로 올라가 그냥 냅다 아래로 비행기를 메다꽂고 있었다.
쾅!
구 인천항에 전자전기가 내리꽂히면서 어마어마한 진동이 중화대루까지 전달되었다.
지금껏 재밍에 눌려있던 무전들이 일시에 회복되면서 주변은 윙윙거리는 시끄러운 무전 소리들로 가득찼다.
– 오 이런 맙소사! 조종간이 말을 듣지 되지 않는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 전자 항법체계가 무력화되었다! 해킹인가? 다시 말한다! 해킹인가아아?
전자전 통제기를 시작으로 제트 전폭기가 폭탄을 가득 매단 채 난민지구에 처박혔다.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그 불꽃을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이 치솟아 올랐다.
단 한 명이 북중국 인민군 2개 사단을 막았다.
이진영은 비로소 특별병과번호 아미타여래의 진가를 중화대루 위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 캐논볼 레이스. 너희들은 그게 그냥 방벽을 무너뜨린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중요한 건 살인 로봇이 아니야. 살인 로봇과 함께 넘어간 뭔가지.
제석천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을 이었다.
– 너희 경찰과 정보국은 살인 로봇과 폭탄테러에만 신경 쓰느라 아미타여래의 노드허브가 곳곳에 설치되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뭐, 뭐라고?”
– 캐논볼 레이스를 연 진짜 이유는 아미타의 노드 허브를 곳곳에 심기 위함이었다. 인천시 전역은 이제 아미타의 것이다.
이진영과 EV-1은 인천시 로봇등록소를 천수관음과 정 대령 등이 습격한 것이 순전히 살인 로봇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놈들의, 롱꺼와 페어차일드의 진짜 의도는 노드허브를 실은 로봇들이 인천 곳곳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청소 로봇, 가사 로봇, 섹스돌, 행정 로봇.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로봇들에 아미타여래가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우회 허브포트가 설치되었다.
이 허브포트는 페어차일드가 제공했고 결국 인천시 전체가 아미타여래에게 해킹당하고 있었다.
아미타여래는 노드허브를 이용해 월미도에 진주한 육군의 전술행정망 C6I까지 해체해버리고 각 무기에 배당된 전임 인공지능까지 해킹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만에 링로드 밑까지 밀어버릴 것을 자신하며 들어온 육군 부대들은 대번에 아미타여래의 해킹 능력에 밀려 속속 인공지능이 정지되기 시작했다.
헬기의 로터가 정지되어 텐트촌에 처박히고 랜드쉽의 방어기능이 풀려서 능동방어로 대전차미사일을 막아내지 못하는 기괴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번 공격에서는 EV-1조차도 아미타여래의 해킹 능력을 견디지 못해 잠시 동안 방어를 위해 기능 정지까지 되었다.
쾅! 쾅! 쾅!
중화대루 근처에 속속 헬기와 항공기들이 떨어지고 밖에서는 환호성이 치솟아 올랐다.
난민들은 한국군이 별 힘도 못 쓰고 속속 무력화되기 시작하자 서서히 웡꺼와 롱꺼에게 열광적으로 변했다.
전투기들이 맥없이 추락하고 헬기들이 건물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모습은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롱꺼가 한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롱꺼, 롱꺼, 롱꺼! 롱꺼!”
놈들은 하늘에 총을 쏘면서 롱꺼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껏 난민으로서 참고 참은 서러운 기분들이 한 번에 둑이 무너지면서 난민들은 점점 더 광신적으로 변했다.
난민지구 안에 들어와 있는 이세화와 호위병력으로서는 이만저만한 대재앙이 아니었다.
그들을 구출할 병력은 불과 5킬로미터 앞에서 고립되어 재래식 병기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미타여래의 광역해킹은 각종 최첨단 무기들을 못 쓰게 만들었고, 그로써 한국군에게 재래식 전투를 강요했다.
인공지능으로 관리되는 전차는 물론이고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스탠드 얼론 시스템이 아니라면 각종 조준이나 화력지원 시스템 역시 무력화되었다.
결국 화약병기와 레일건만 쓰는, 말이 재래식이지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거기에 국군의 통한 전술망인 C6I망이 장악당하면서 구식 무전이 아니고서야 부대 간의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아미타여래가 괜히 가장 먼저 공군 전자전 통제기를 격추시킨 것이 아니었다.
중화기만 없으면 숫자에서 웡꺼 패거리는 압도적인 우위였다.
육군은 기세등등하게 난민들의 천막을 깔아뭉개며 들어왔지만, 지금은 건물 위에서 날리는 로켓 공격에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후퇴하라! 뒤로 후퇴하라!”
육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수동으로 움직이라고!”
“저는 수동 운전할 줄 모릅니다!”
“아니! 육군 학교에서는 대체 뭘 배웠어!”
장갑차에 탄 장교가 병사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자신도 수동운전을 할 줄 몰랐다.
원래 어지간한 병과는 전부 운전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장갑차도 전임 인공지능이 일반화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설마 전임 인공지능이 멈추는 일이 있을까?
물론 그런 상황을 상정한 훈련은 존재했다.
그러나 어떤 군대든 ‘가라’로 훈련을 하면 호된 교훈을 받게 마련이었다.
장갑차는 전임 인공지능이 락다운 되면서 꼼짝하지 못했고 그 위로 화염병과 대전차 로켓이 들이 꽂혔다.
화약식 반응장갑이 로켓탄 몇 발을 튕겨 냈지만, 영원히 막을 수는 없었다.
장갑차에서 불꽃이 치솟고 펑하고 장갑차 큐폴라가 하늘 높이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진다.
웡꺼의 공격부대는 곳곳에서 육군의 장갑차량을 공격하면서 기세가 올랐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자 난민들은 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와대와 용산 국방부에서 경악할만한 장면이 하나 더 연출되었다.
아미타여래의 노드허브는 인천 시가지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신간척지에서 바다 건너편에는 인천 신공항이 있었고 거기에도 노드허브가 무수히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군용 항공기가 떨어졌을 때 신희정은 수석지휘관의 지휘를 받지 않고 모든 민항기는 수원과 천안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오늘은 정보국에게도 대재앙의 날이었다.
신희정이 그렇게 난민들이 911 테러 사건을 벤치마킹해서 하이재킹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수석지휘관 회의에서 경고했건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과연 2중 3중으로 보안이 되는 항공기 전임 인공지능을 어떻게 해킹하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인천시가지와 공항 일대는 아미타여래의 영역 안이었다.
군용기를 해킹한 마당에 민간용 화물기를 해킹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 회항 명령을 듣지 못한 화물 민항기 하나가 상공에 나타났다.
“화물편 KE4055! 급선회합니다!”
물건이 가득 실린 화물기 KE-4055가 인천공항에 착륙하다 말고 급격히 선회하여 방벽 쪽으로 고도를 낮췄다.
폭탄 로봇의 방벽 테러는 애교 수준이었다.
거대한 화물민항기가 그대로 난민 방벽에 부딪쳤다.
쿠웅!
지진이 난 것처럼 방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육군의 방어초소 하나가 아예 비행기 파편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물기 엔진이 떨어져 나가며 도미노처럼 방벽 옆면을 때리고 도미노처럼 방벽이 앞으로 무너졌다.
3차 난민봉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난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짓누르던 방벽이 무너지는 걸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화물기가 추돌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웡꺼의 공격부대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무너진 방벽으로 달려 나갔다.
캐논볼 레이스로 방벽이 무너졌을 때는 방벽의 일부분이었지만 굉장히 많은 난민들이 방벽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 방벽을 넘는 건 웡꺼의 공격부대였다. 놈들은 RPG-7 같은 구닥다리 병기로 멀쩡한 방벽초소들을 하나둘 제압하며 마침내 인천시가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웡꺼가 무리하게 난민들을 징집하며 공격부대의 몸을 불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노란 완장을 찬 웡꺼의 부대가 메뚜기처럼 무너진 방벽을 넘는다.
육군의 방어계획은 방벽 방어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그 방벽이 무너졌을 때 예비대의 움직임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웡꺼의 공격부대는 방벽과 가까운 신흥동이나 만정동, 송도 일대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미 송도에도 롱꺼 산하 조직의 끄나풀들이 숨어 있었고 방벽 너머로 웡꺼 놈들이 들이닥치자 놈들도 일제히 봉기했다.
사실 정보국과 신희정은 아미타여래를 이용한 광범위한 공격에 대해 거의 신들린 무당처럼 상당한 부분을 예견했다.
비행기 납치 테러, 인공지능 해킹에 따른 육군의 졸전.
신희정은 특별병과번호를 캐기 위해 홍콩에서 죽을 뻔했고 아득바득 긁어온 정보를 청와대까지 제공했다.
그들이 신희정의 경고를 조금이라도 귀담아들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다.
육군은 그저 간위예 전쟁에 준한 전자전 대책만 신나게 짜놨을 뿐, 광범위한 해킹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북중국군 2개 사단이 아미타여래 하나에게 엿을 먹은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아미타여래는 정말로 육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다 예측한 듯한 부대 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방벽이 무너질 걸 예상하고 예비대를 배치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