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42
제242화
월미도 일대와 인천 시가지 일부분을 눈뜨고 빼앗긴 건 여러모로 대한민국의 치욕이었다.
한국전쟁 이래 대한민국은 단 한 번도 영토 안에서 사단급 이상의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내전이든 뭐든 한국으로선 최악의 교전 상황에서 패퇴하여 인천 서부를 전부 웡꺼에게 빼앗겼다.
이는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었다.
정규국가인 북한과 교전해서 빼앗겼다면 그래도 이해나 하지, 인천을 점령한 건 반란군조직이면 그나마 다행이고 세계 최대의 폭력조직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LA를 무력으로 점거한 거나 마찬가지다.
명색이 링로드를 통해 선진국의 입지를 다지려고 했던 대한민국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치욕이 없었다. 또한 인천이 그냥 도시라면 모르지만, 이곳은 링로드가 지나가는 국가 기간산업이 걸려 있는 도시였다.
모든 것은 궤도 엘리베이터 스타즈 앤 스프라이츠의 전 지구적 순환망, 링로드를 둘러싼 이권 문제가 기묘하게 뒤틀리면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링로드.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페어차일드의 가주(家主)가 벌써 롱꺼와 접촉해서 링로드 개발 이익을 놓고 회담을 했다는 소문이다.
만약 페어차일드가 롱꺼를 협상 대상으로 인정하고 링로드 개발 이익을 공유한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눈꺼풀 깊이까지 파고든 가시를 빼낼 수 없게 된다.
지금도 가개통된 링로드로 값싼 궤도 태양광의 전기와 전 세계의 물류가 롱꺼의 영역으로 집중되고 있다.
링로드의 순환망은 배로 보낼 때보다 더 빨랐고 가개통된 지금도 물류량이 점점 늘고 있었다.
7년 후 인천지구 구간이 완성되는 순간, 북미, 북중국, 남중국을 잇는 거대 물류망이 완성되고 이는 희망봉 발견이나 수에즈 운하 개통에 비교될만한 인류의 대업적이 될 터였다.
뱃길에서 링로드 운송으로 모든 운송이 대체되는 것도 시간문제였고, 각종 선박 사고들이나 몇 주씩 걸리는 운송 시간도 링로드만 완공되면 이젠 바이바이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을 때 물류량이 급변한 것처럼 링로드가 각 구간 최종완공 되면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묶이게 된다.
일본 등 다른 나라가 웡꺼에게 지금까지는 월미도에 전혀 신경도 안 썼으면서 인도적 지원이라는 둥, 식량 공급을 서두르는 이유도 페어차일드와 똑같은 이유였다.
결국은 다 돈 때문이다.
맥주를 마시며 어부들은 링로드를 바라보면서 롱꺼와 웡꺼의 찬양을 하고 있었다.
고복격양(鼓腹擊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난민인 그들에게는 정말 나랏님이 누구든, 지배자가 누구든 알 바 아니었다.
어부들에게 진흙탕물을 튀기며 차량 여러 대가 지나갔다. 흙탕물 속의 구더기들이 타이어에 깔려 터지고 갈색 흙탕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어부들은 생선에 흙탕물이 튀자 벌컥 일어나서 화를 냈지만 이내 차량들을 확인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고급 세단에 휘발유 차량.
난민지구에 이걸 타고 다니는 사람은 몇 없었고 롤스로이스 팬텀 앞에는 검은 바탕에 붉은 용이 그려진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로, 롱꺼다!”
“로, 롱꺼께서 오셨어.”
인천시를 점령한 후 롱꺼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신경 쓰느라 무슨 대통령 의전차량처럼 이동할 때는 붉은 용 깃발을 붙이고 다녔다.
롱꺼의 세단 뒤에는 무장 장갑차량이 세 대나 뒤따르고 있었고 그중 한 대는 전자전 차량이었다.
대한민국은 벌써 몇 번이고 아미타 여래의 사정거리 밖에서 장거리 미사일을 날려 롱꺼나 웡꺼를 제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번번히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인공지능이 들어있지 않은 장비라도 아미타 여래는 각종 무선 신호를 가로채서 바다로 처박아 버렸다.
단파 무전, 레이저 유도, 멍텅구리 폭탄, 위성폭격 등등.
대한민국 국군이 안 써본 방법이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미국의 정보자산이나 궤도폭격을 사용하면 인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훨씬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페어차일드의 입김 때문인지 아직도 뜨뜻미지근하게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해당되지 않는다.’라며 대한민국 정부 더러 알아서 잘 하라는 입장이었다.
한미상호 방위조약 제 1조의 전문을 잘 곱씹어 보면 ‘당사국은 관련될지도 모르는 어떠한 ‘국제적 분쟁’이라도…….’라고 나와 있었다.
롱꺼 등 난민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조직도 아니었고 그 어떠한 교섭단체도 아니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미국 입장에서는 그냥 폭력조직이 한 도시를 점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사태는 대한민국의 내부 치안 문제지 미군까지 끼어들 문제는 아니었다.
심지어 인천에 주둔한 일부 미군기지까지 철수하거나 공격받았음에도 미국은 내정간섭을 근거로 전혀 월미도 사태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대량으로 북한 측의 무기가 나돈 정황을 들어서 이건 북한의 침략 전쟁의 일환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코웃음만 쳤다.
북한에서 대량의 무기, 특히 탄약이 들어온 건 사실이지만 웡꺼 놈들은 미국의 제너럴 에어로믹스의 엑소슈트 랜서를 굴리거나 호리코시의 장갑차도 많이 썼다.
‘무기만으로 판단하면 우리 미국도 적국이냐?’하는 식이었다.
다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내부사정으로는 링로드 근처를 누가 관리하든 페어차일드가 개발에 뛰어들기만 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페어차일드는 미국 상하원 의원들을 다 구슬려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동북아의 막대한 개발 이익은 어차피 대부분 미국의 부가 될 터였다.
롱꺼는 롤스로이스 차량 안에서 링로드를 노려봤다.
230만 난민조직의 정점에 선 자.
한국의 대권 잠룡들을 차례로 거꾸러뜨린 자.
3차 봉기를 마침내 성공시켜서 대한민국의 영토 일부를 점령한 자.
여러 가지 별명과 전설이 뒤따랐지만. 링로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한없이 서글펐다.
롱꺼가 탄 차량은 외곽지역에 서서히 멈춰서고 롱꺼는 변검 가면을 쓴 채 차량에서 내렸다.
롱꺼의 차량 뒤에서 밀착 우주복 차림의 부동명왕이 내리고 탁탑천왕과 제석천도 내렸다.
이 3인방은 비록 EV-1에게 제대로 엿을 먹긴 했지만, 호위병으로서 이보다 더 든든한 이들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 옆에는 머리에 ‘긴고아’를 쓰고 수척해진 표정의 정 대령이 뒤를 따랐다.
롱꺼는 정 대령과 부하들을 이끌고 허름한 해운상사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난민들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등록사무소 건물로 쓰이던 곳이었다.
그는 등 뒤의 부하들에게 손을 뻗어 따라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나 혼자 가겠다.”
“롱꺼, 위험합니다.”
“이곳의 하늘과 바다는 어차피 아미타여래의 것 아니더냐? 그리고 겨우 2층 올라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심복들은 롱꺼를 만류했지만 롱꺼는 그대로 혼자 해운상사 건물로 들어갔다.
해운상사 건물은 오래되어 곳곳이 콘크리트가 부서졌다.
난민지구 건물들이 다 그렇듯 바닷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된 탓이다.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녹슨 철근이 보이고 그 옆에는 검붉게 변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롱꺼는 피가 튄 벽에 손을 올리고 한참 동안 핏자국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광저우와 산동반도, 상하이 등 중국의 해안 일대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대피한다.
그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빽빽한 난민선을 타고 한국으로 왔다.
뱃길로는 불과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찌나 난민들이 많이 배에 탔는지 압사되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화장실은 꿈도 못 꾸고 똥오줌을 아무 데나 싸니 퀴퀴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이 우는 소리와 어른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끔찍하게 귀에 꽂힌다.
기자 한 명은 난민선의 상황을 보고 18세기 노예무역선 같다며 현장 사진을 폭로하기도 했다.
전 세계가 난민들의 사진에 분노했지만, 그런 종류의 분노는 금방 휘발되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사진을 찾아 헤매는 좀비나 마찬가지였고 언론은 그 수요 따라 생산할 뿐이었다.
난민들은 골칫거리였다.
북중국은 당연히 난민들을 반동분자라고 몰았고, 남중국은 북중국의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래저래 애물단지가 된 ‘광동자유국’의 난민들은 원래는 임시거처에 불과한 대한민국에 발을 딛었다.
“가혹한 겨울이었다.”
롱꺼는 핏자국에 댄 손을 바르르 떨었다.
간위예 전쟁이 끝난 건 8월쯤이었지만 12월이 다 되도록 난민들을 어디로 보낼 건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은 특별법을 만들어 이들을 월미도 신간척지에 임시수용한다고 발표했고 난민번호 등록을 시작했다.
롱꺼의 말대로 가혹한 겨울이었다.
이미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신간척지 외곽에는 좍 철조망이 깔리고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민들에게 겨눴다.
철조망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던 난민들은 북중국의 스파이로 간주되어 전원 사살되었다.
결국 겨울이 와서 난민들이 얼어 죽기 시작하자. 한국 정부는 난민으로 등록한 사람들에게만 방한피복과 쉘터보강재 그리고 식량을 나눠줬다.
난민번호를 등록하라고 부추긴 이유는 남중국과 똑같았다.
스파이 색출.
실제로 난민 중에 북중국의 스파이가 있기도 했고 대한민국 정보국은 그걸 트집 삼아 몇몇 난민들을 사형대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처형한 사람들이 전부 다 스파이였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정보국의 전신인 안전기획부는 간첩을 잡는 것보다 만드는 것을 더 잘했으니.
결국 사람들은 스파이로 몰리는 게 무서워서라도 앞다퉈서 난민번호를 등록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날은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인천 앞바다의 바닷바람이 매섭게 얇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몸을 때리고 롱꺼도 부들부들 떨면서 식량과 옷을 받기 위해 이곳에 서 있었다.
밀치기가 싸움으로 번지고 사람들은 남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다른 사람의 머리를 파이프로 때리고 노약자나 여자들에게서 식량을 빼앗았다.
한국 정부는 분명 이런 상황을 중재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했지만, 아직도 롱꺼는 한국 ‘사업자’의 무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등록사업자는 무표정하게 동물원 속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롱꺼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의 군경은 물론 관리책임이 있는 등록사업자도 전혀 분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등록사무소 업무를 대행하는 자는 간위예 난민 특별법에 나오는 민간사업자였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등록할 난민이 줄어드는 건 일거리가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난민 등록 건수대로 성과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도급사업자 입장에서는 이 귀찮은 일을 다 끝내고 빨리 대금이나 받고 치웠으면 했다.
등록소와 경찰이 난민들의 폭동을 그냥 방치하면서 점점 피해가 심해졌다.
롱꺼가 손을 올린 핏자국은 그때 튄 피였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지옥.
롱꺼는 그 와중에 전투식량 한 푸대와 방한복을 잡고 그 아귀다툼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어린아이였다. 나중에 롱꺼는 그 아이가 독감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 등록하러 왔다는 걸 알고 오열했다.
추위가, 배고픔이 난민들이 인간성을 스스로 박탈하게 만들었다.
“그깟 MRE가 뭐라고. 그깟…….”
롱꺼는 가면을 벗고 슬픈 눈으로 등록소 곳곳에 있는 핏자국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폭력 사태가 일어난 후 등록소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등록소를 폐쇄한다고 해서 폭력 사태가 끝난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각종 자선단체에서 들어온 물자들이 불공평하게 분배되기 시작했다. 바로 각종 폭력조직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