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45
제245화
웡꺼도 쎄잉꺼도 제각각 술잔을 쳐들고 처음 회합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두 손으로 술잔을 마셨다.
두 명의 보스. 두 명의 세력.
군소조직의 똘마니들 사이에서는 안 그래도 두 부대 중 누가 더 셀지 말이 오가기는 했다.
그리고 잠꺼나 체잉꺼 같은 조직들에서는 누구에게 가세할지도 중요한 화젯거리였다. 웡꺼와 쎄잉꺼 이 두 조직이 격돌하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롱꺼는 자신의 지분까지 내어주며 이들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지만, 회합은 반쪽 성공이었다.
술잔이 오가고 원형 테이블은 어느새 두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스들은 각자 웡꺼와 쎄잉꺼에게 인사를 하면서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눴다. 얼핏 보면 보스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들이 각 당끼리 모여 수군거리는 모습 같았다.
롱꺼는 축하주를 받으면서 아직 양복주머니에 들어있는 지전을 만지작거렸다.
두 보스가 싸우게 되면 과연 그는 얼마나 또 지전을 뿌려야 하는 걸까?
웡꺼와 쎄잉꺼는 조직의 두 기둥이었고 난민들을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했다. 그 기둥 둘이 싸우면 집은 무너지게 된다.
롱꺼는 다시 한숨을 술잔에 담에 마셨다. 그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웡꺼, 쎄잉꺼. 페어차일드, 미국. 그 많은 키워드들이 그의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롱꺼는 여전히 추운 난민지구의 등록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앞에는 쇠파이프를 든 무뢰한들이 사람들을 마구 밀치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건 사람들에게 밟혀 으스러진 꼬마의 시체뿐이었다.
롱꺼는 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 * *
인천 중부서 강력전담부는 경기도 부천 춘의동의 축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강력전담부 행어는 텅 빈 강당 같은 곳이기도 했고 헬기가 왔다 갔다 하기에는 차라리 뻥 뚫린 축구장이 편했다.
이진영은 멍한 표정으로 관중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평상시대로라면 그의 옆에서 검은 프레임의 로봇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와 쾌활하게 농담을 주고받을 테지만 EV-1은 보이지 않았다.
이세화를 호위하고 중화대루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후 EV-1은 자신을 희생해서 이진영 등 호위 병력을 구급선으로 대피시켰다.
그 뒤로 EV-1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혼당한 홀애비가 따로 없구만요.”
김대현이 이진영 옆자리에 앉으며 음료수를 한 캔 내밀었다.
“야, 임마. 결혼도 못 해본 놈이 뭘 안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이진영은 살갑게 김대현을 맞아줬다. 김대현도 관객석에 앉아 담배를 물고 멍하니 축구장을 바라봤다.
축구장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세워져 있고 강력전담부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 갔다.
인천이 점령당하고 중부서까지 함락당했다고 하더라도 강력전담부가 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본청은 강력전담부를 그대로 부천으로 옮기면서 각종 난민범죄를 수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월미도에서 난민들과 티격태격하며 쌓아온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방벽이 부평 일대의 육군방어선으로 바뀌고 사무실이 부천 축구장으로 바뀐 것뿐 중부서 강력전담부가 평소에도 하는 일 그대로였다.
이진영과 김대현이 나란히 앉아있자 터덜터덜 유인환도 방탄복 차림으로 기어 나와 옆에 앉았다.
김대현은 말없이 맥주 한 캔과 담배를 건넸고 세 사람은 무슨 축구 경기에 전 재산을 걸었다가 탈탈 털린 사람들처럼 멍하니 경기장만 바라봤다.
그러고 있자니 윤숙희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팀장님, 밥은 드셨어요?”
“어? 밥. 어. 그대는 식사는 자셨나?”
“아뇨, 밥이 넘어가겠어요?”
윤숙희는 담배 냄새를 질색하면서도 유인환 옆에 앉았다. 유인환은 그래도 선배 생각한답시고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껐다.
“유인원, 그냥 피워도 돼.”
“예? 하지만.”
윤숙희는 위스키가 든 힙플라스크를 꼴꼴꼴 기울였다. 그녀는 성에 안 차는지 종이봉투에 든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켰다.
이진영이 손가락을 까딱해서 위스키병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유인환과 김대현이 술병을 가로채면서 먼저 위스키를 마셨다. 크으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44팀 팀원들은 관중석에 앉아 술을 마시며 대놓고 농땡이를 피웠지만, 이들을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력부장도 관중석에 옹기종기 앉은 44팀 팀원들을 보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처참한 패전 속에서 44팀과 이진영이 활약하며 이세화를 구출한 것은 빛나는 공적이었다.
구룡의 눈 중 유일하게 이세화만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소총을 쏘며 진두지휘하는 그녀의 모습이 방영되며 그녀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테크노 진보 계열인 안보문명당이 약한 안보 부분에 있어서 이세화는 약점을 보강하는 탁월한 후보였다.
그녀를 구해낸 공적을 따지자면 EV-1과 이진영의 공이 제일 컸다. 게다가 분전한 44팀원들 역시 경찰의 공적을 칭송하며 딴 데로 눈을 돌리기 좋은 소재였다.
그러나 44팀 전원은 지금 내사 중이었고 모든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의 뒤에는 본청 내사 9팀이 따라붙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네 사람이 담배와 술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전상영이 조사를 받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전상영의 옆에는 예의 포메라니안 개가 주인더러 힘을 내라는 듯 앙앙대고 있었지만 전상영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암울했다.
그는 말없이 잭 다니엘 위스키를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선배 밥은요?”
“어, 뭐. 어.”
이진영의 질문에 전상영은 똑같이 어뭐 하면서 얼버무렸다.
3주 하고도 3일이나 진행된 강도 높은 조사에 다들 입맛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진영도 취조실에서 먹는 설렁탕 맛이 기가 맥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여유도 하루이틀이었다.
이진영은 담배를 물고 막 착륙하는 헬기를 노려봤다.
“시발, 또 헬기 온다.”
이진영을 시작으로 다른 네 명이 투덜투덜거렸다.
“이번에는 육공이네요.”
“육공 새끼들이 가장 지랄 맞더라고요.”
“아, 저 새끼들 야실야실 약 올리는 게 짜증나요.”
전상영은 이진영의 뒤에 앉아있었고 눈빛을 빛내면서 이진영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 팀장.”
“예 선배.”
“그냥 다 폭파시켜 버릴까?”
어째 이 사람이 말하면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전상영은 불과 10여 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중화대루 곳곳에 로봇을 침투시켜 중화대루를 폭파시켰다.
본인 말로는 살인 로봇들의 방벽 붕괴에 영감을 얻었다지만 중화대루를 박살 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웡꺼의 상징이었던 중화대루의 간판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여러모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웡꺼의 본거지를 공격한 그 공만 해도 44팀 전체가 내사팀에 시달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44팀 중 김상현과 임은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진영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김대현에게 말했다.
“대현아, 은혜는 어때? 통화는 해봤어?”
“예, 트라우마죠 뭐. 지금이라도 복귀한다고 난린데 제가 말렸어요. 의리는 있는 녀석이라.”
“그냥 전출시키는 게 맞지 않냐? 안 그래도 내가 전출서는 써 놨어.”
이진영은 내사 상태긴 하지만 아직 임은혜의 직속상관이고 전출 정도는 보낼 수 있다.
“저도 걔네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설득했는데 말을 들어 처먹어야 말이죠. 아주 쇠고집이라.”
“뭐 하긴. 그 녀석이라면 인형탈이라도 쓸 테니 현장 배치해달라고 난리겠지.”
이진영은 또 담배를 꺼내서 팀원들과 나눴다.
윤숙희는 보통 때라면 흡연자들에게 질색할 테지만 그냥 내버려 두고 다시 돌아온 위스키를 마셨다. 그녀는 크으하는 소리를 내고 안주로 오징어 숏다리를 으적거리며 물었다.
“아, 팀장님. 그 잘 쌩긴 요원은 괜찮대요?”
“웬다이아아아.”
이진영은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살풋 웃음을 띠며 오래된 노래 ‘I will always love you’를 흥얼거렸다.
뜬금없는 노래에 사정을 아는 44팀 팀원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세화와 44팀은 사설구급선을 통해 무사히 제부도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세화와 44팀은 서울로 천신만고 끝에 기자회견을 하던 와중이었다.
롱꺼는 2중 3중으로 덫을 놨다. 44팀 팀원들은 안 그래도 특별병과번호 놈들, 그중에서도 천수관음의 장거리 저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저격수는 뜻밖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이세화에게 권총이 겨눠지고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신희정이 몸을 날렸다.
무려 정보국 현장 차석지휘관이 몸을 날려 총알을 대신 맞아주는 모습은 오래된 영화 보디가드의 한 장면이었다.
캅킬러 총알 두 발이 신희정의 옆구리와 팔뚝을 꿰뚫었지만, 그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이세화를 구해냈다.
여섯 발의 총알 중 한 발이라도 이세화에게 맞았다면 구룡의 눈 계획은 완전히 성공을 거뒀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덕분에 잘생긴 그의 외모가 TV에 방영되었고 그의 신분을 차마 다 밝힐 수 없었던 정보국은 그가 이세화 후보의 경호직책이라고 밝혔다.
잘생긴 경호원과 미모의 국회의원 후보?
이세화와 신희정은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화젯거리가 될 만도 했다.
TV에서는 인천이 함락된 충격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신희정이 몸을 날려 총탄을 막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영상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노래가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였다.
영화나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제는 ‘웬다이아’하면 ‘아아, 그거.’하고 알아듣는 수준이 되었다.
어찌 보면 그 역시도 이세화의 인기를 견인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고 44팀에도 미담이 되어야 할 테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44팀에게는 잔인한 현실을 드러내는 계기였다.
44팀 전원이 내사를 받게 된 것도.
이진영이 폐인처럼 담배와 술만 마시게 된 것도.
바로 그 마지막 킬러 때문이었다.
롱꺼가 심어놓은 마지막 저격수는 바로 44팀 선임수사관이자 부팀장인 김상현이었다.
김상현은 신희정의 활약으로 암살에 실패하자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그 뒤는 내사팀의 수사로 모든 것이 밝혀졌다. 중부서 형사들 중 웡꺼의 돈을 받지 않는 사람은 이진영과 중부서에 새로 배속된 44팀 팀원들밖에 없었다.
김상현은 낭비벽이 심한 와이프 때문에 지속적으로 웡꺼의 돈을 받고 있었고, 웡꺼는 마지막 순간에 김상현을 압박했다.
김상현이 이진영에게 뜬금없이 ‘가족을 생각하라며’ 히스테리컬하게 화를 냈던 이유도 계속해서 웡꺼측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김상현은 가족 때문에 웡꺼의 암살의뢰를 받아들였다.
김상현은 최후까지 망설였다.
그는 이세화가 중화대루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이 모든 고뇌를 형사수첩에 적어놨고 그 수첩의 메모들이 이진영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김상현이 죽었다.
경찰은 현직 경찰이 관여한 사건을 묻느라 진땀을 뺐고 경위야 어찌 되었든 이세화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안보문명당 쪽에서도 딱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3주 내내 매타작하듯 내사의 연속이었다.
임은혜는 탈출하다 총에 맞았고 경찰의 얼굴마담이랄 수 있으니 병원에서 열외였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