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5
제25화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겁니다.”
“예?”
“이게 참고인 진술이었다면 돌돌이를 켜고 당신의 진술을 녹음했겠지요. 중요한 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은 미끼거든요.”
“제가 미끼요?”
이진영은 권총을 내리고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하얀 손수건을 건네받기 전에 투각하고 콘크리트가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콘크리트가 뚫리기도 전에 도은주를 끌어안고 옆으로 뒹굴었다.
카앙.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도은주의 눈앞에서 뭔가가 불꽃놀이를 하듯 퍽하고 터졌다. 탄이 도탄되며 건너편 ‘파라다이스’의 ‘이’ 부분에 칵하고 박혔다.
“깡통 어디냐!”
– 3431밀(Mil). 남동쪽 바로 포착했습니다.
도은주는 이진영의 품에 안겨 창밖을 바라봤다. 이 아파트의 남동쪽에서 갑자기 퍽하고 소리가 들리더니 아파트 옥상 물탱크가 박살 나는 게 아닌가?
물이 사방으로 퍽하고 비 내리는 것처럼 튀고 마치 투명 인간이 일어서는 것처럼 사람 형체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광학 위장이라. 이번에는 꽤 돈을 쓰셨군. 어이! 멋쟁이 요원 양반! 뭐 하는 거요! 나라면 한 방에 맞췄을 거요!”
– 나 참! 잡소리 넣지 마쇼! 방해되니까!
파앙!
이번에는 도은주도 공기를 가로지르는 저격총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퍽하고 피가 튀면서 누군가가 아파트 옥상에서 윙슈트 낙하산을 펼쳤다.
그러나 낙하산이 채 펴지기도 전에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 있던 NIA 소속 로봇들이 의문의 암살자의 다리를 낚아채고는 스파이더맨처럼 아파트 외벽에 라미네이트 폼으로 고정시켜버렸다.
“이, 이 새끼들이이이이!”
암살자는 옴짝달싹 못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그 사이 로프를 타고 신희정이 양복 차림으로 멋지게 도은주와 이진영의 앞에 착지했다.
“와, 이런 미인인 줄 알았으면 좋은 형사 역할은 내가 맡는 건데. 형사 양반 아주 침대까지 갖다줄깝쇼?”
“요원 양반, 말은 고맙지만 일부터 처리합시다.”
“저는 레이디 퍼스트라.”
“퍽이나.”
신희정은 두 사람 중 먼저 도은주를 일으켜 세웠고, 이진영은 아일랜드 싱크대에 기대어 스스로 일어섰다.
“누굴까요?”
“누구예요?”
먼저 누굴까요는 신희정이었고 뒤이어 누구예요는 신희정에게 삿대질하며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도은주였다.
이진영은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도은주에게 말했다.
“NIA 신희정 요원입니다. 이쪽은 태성 AI 설계 엔지니어링 도은주 주임.”
“저건 또 누구예요?”
도은주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벽면에 매달린 범인을 가리켰다.
“그건 우리도 모르죠. 이제부터 같이 밥도 먹고 찬찬히 알아봐야지요.”
“그렇죠. 원래 사귀려면 천천히 알아보고 적당히 무르익으면 고백해야죠.”
두 사람의 농담에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뭐요?’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쏘아봤다.
“정말 나를 미끼로 이용한 거예요?”
“예, 수단과 트릭은 대애충 알아냈지만 아직 ‘누구냐’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누구냐? 이 사건은 백헌강이잖아요?”
그녀는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잠깐. 당신 말대로라면 그 오류를 이용한 사람이 또 있다는 건가요?”
도은주는 뾰루퉁한 표정에서 금방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관여하시면 당신도 위험합니다. 지금 저격은 제가 아니라 당신을 노린 거예요.”
도은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파트 벽에 매달린 범인을 바라봤다.
“경관을 붙여줄 테니…….”
“싫어요. 저도 따라갈래요. 이미 충분히 위험해진 상황이고, 동의도 없이 미끼로 사용되었다면 진상을 알 권리 정도는 있는 거 아닌가요?”
이진영은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긁적거렸고 신희정은 재미있다는 듯 짓궂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고거슨 이제 국가정보부 NIA측 관할이니…….”
신희정은 억울하다는 듯 두손을 펼치며 항변했다.
“아니 지역경찰 양반. 이럴 때만 NIA 팔아넘기는 겁니까? 나 참 공부가주로 낚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도은주는 그 말을 듣고 째릿하고 이진영을 쏘아봤다.
“공부가주? 설마 이중 약속까지 잡고 누구한테 술을 사 줄지 간 본 거예요? 술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아 진짜 하나도 못 믿겠네.”
이진영은 못 당하겠다는 듯 두 손을 펼치고 항복 표시를 했다.
“자자 성난 시민들이여 다들 진정하시고. 일단 저녁부터 먹죠. 나도 배고파 죽겠으니까. 가자 깡통!”
기이잉.
갑자기 벽 옆에서 뭔가가 구동되는 소리가 들리면 EV-1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비를 마친 EV-1은 도은주와 이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 아파트 안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도은주는 이젠 질렸다는 표정으로 EV-1을 바라봤다.
방금 전 도탄된 대구경 저격총은 바로 EV-1이 장갑방패로 막아낸 것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로봇까지…….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도은주는 입술을 예쁘게 실룩였다.
* * *
세 사람과 로봇 하나는 월미도로 자리를 옮겼다.
굴다리에서 가까운 월미도 내부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월미도 외곽은 관광객들도 찾는 명소였고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월미도에서 가까울수록 집값이 싸지는 방벽 너머처럼, 월미도 안에서도 굴다리에서 가까울수록 집값이 싸지고 위험도도 증가했다.
세 사람은 포장마차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술잔을 기울였다.
“내가 가운데에요. 두 사람이 서로 몰래 수작질 부리는 건 못 봐주겠어.”
도은주는 억지로 두 남자의 가운데 끼어 앉았고 두 남자는 어색했는지 괜히 투명 페트병에 담긴 술을 기울였다.
“진짜네.”
“정말 진짜였네.”
도은주와 신희정은 동시에 말했다. 생수 페트병에 들어있어서 뭔가 수상쩍은 저급 알콜주처럼 보였지만 뜻밖에도 공부가주는 향만 맡아봐도 진짜 고급품이었다.
술을 가져다준 가게 주인인 노인은 연방 고개를 숙이면서 이진영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공자 백몇 대손이라던가? 고건 좀 미심쩍지만 아무튼 술은 진짜예요. 곡부 전통 방법으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니까?”
“하지만 궤도폭격으로 기왓장 하나 안 남았을 텐데?”
신희정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술병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다.
“굴다리에서 만들어진다는 게 문제지만 기법은 전통 기법 그대로예요.”
이진영은 알싸한 술향을 먼저 즐기고 술잔을 털어 넣었다.
뒤이어 나오는 요리들도 허름한 국숫집치고는 제대로였다. 도은주는 제대로 된 청초육사를 맛보고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삭아삭한 고추 식감과 고기의 식감이 어우러지는 고급스러운 요리 느낌이었다.
신희정도 금세 한 잔을 비우고 꽃빵에 고추잡채를 올려 우물거렸고 도은주는 아까 화를 낼 때는 언제고 정신없이 요리와 술을 즐겼다.
“이건 강남에도 없는 맛이에요.”
“그렇겠지요. 난민들만 낼 수 있는 맛이니까.”
“난민들이요?”
“이건…….”
“도시농장 플랜트가 아니라 노지 재배 야채에요. 굴다리 근처에 밭이 있거든요. 돼지고기도 직접 도축한 거 갖다 쓰고.”
이진영은 볶음국수를 후루룩거리면서 공부가주를 한 잔 더 들이켰다.
“저, 전부 불법이잖아요?”
“난민이 노점을 열고 타인 명의로 크레딧을 받는 것 자체가 불법이죠. 난민증 외에 신분증이 안 나오는 난민들은 크레딧을 쓸 수 없으니까.”
이진영은 머리 위에 있는 거대한 수송로 링로드를 바라봤다.
전 세계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이어지는 공사대금과 기타 비용처리를 위해 세계통합 가상화폐를 발행했다. 그게 바로 크레딧이었다.
간위예 전쟁 후 북쪽으로 밀려난 소위 북중국도 우여곡절 끝에 링로드에 참여하다 보니 간위예 전쟁의 난민은 그 세계화폐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북중국의 링로드 참여 조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진영은 도은주에게 술을 마저 따라주고 말했다.
“아무튼, 당신은 이것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강남서에 연락했으니 곧 호위 병력이 올 겁니다.”
도은주는 이진영에게 삿대질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이래 봬도 경찰인데 말입니다?”
“흥, 나도 위협받았는데 이대로 되돌아가서 모른 척하고 살아라? 저격은 나를 노렸다면서요?”
신희정은 낄낄거리며 이진영 쪽에 있는 만두를 가져가려고 했지만, 도은주는 텁하고 신희정의 손을 잡고 그를 째려봤다.
“당신도 웃지 마요.”
“왜 불똥이 나한테 튑니까?”
“그럼 댁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해주시든가. 왜 나를 노린 거죠?”
신희정은 이진영더러 어떻게 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곳은 굴다리에서는 멀지만 난민지구는 난민지구였다. 도청위험도 있고 어쩌면 벌써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진영은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당신을 죽이려 한 건 내가 당신에게 힌트를 얻을까 봐서입니다. 저는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만약 놈이 우리를 마크하고 있고 진실에 다다르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고를 칠 거라 예상했죠.”
“사고를 쳤고. 그럼 이유는 뭐지요?”
이진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누가 그 오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도은주는 신희정의 팔을 놔주고 술잔을 꺾어서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용한다? 누가요.”
“그걸 추려내기 위해 함정을 판 겁니다. 오늘 잡은 놈은 그 단서를 알고 있겠지요.”
“형사님이 생각하는 범인은 누군데요?”
이진영은 대답 대신 도은주처럼 술을 털어 넣었다.
“추리소설에서 가장 잡기 쉬운 범인은 누굴까요?”
도은주는 뜬금없는 말에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고 이진영은 바로 이어서 말했다.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
“아…….”
세 사람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정확한 주어를 밝히지 않고 대화를 하려니 힘들었고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걸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다.
1.5리터 페트병이 다 비워지고 안주도 새로운 게 올라올 때까지 세 사람은 말없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을 생각했다.
그러나 로봇이 살인을 저지른 상황을 반기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부터 재야정치인들까지. 연일 정부의 친기업, 친로봇 정책을 비난하며 어게인 20XX를 외치는 시위대도 있고, 로봇을 적극적으로 때려 부수는 사람도 있었다.
“ABC 살인사건 같네요.”
한참 후 도은주가 꺼낸 말에 이진영과 신희정은 양옆에서 그녀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당신이 방금 추리소설 얘기했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왠지 ABC 살인사건이랑 비슷하다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이진영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가 언급한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었다.
작중 범인은 ABC 순으로 사람을 죽였고 사람들은 공통점을 발견한 후 무차별 살인사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작중 전화번호부의 ABC순으로 발생한 살인은 실은 한 가지 살인사건을 숨기기 위한 범인의 트릭이었다.
“뭔가를 숨기기 위해 수많은 사건들을 만들어냈다는 건가요?”
“나라면, 내가 ‘그 상황’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수많은 이익단체들 뒤에 숨겠어요.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오지 않는 가장 현명한 방법 아닐까요?”
신희정과 이진영은 양옆에서 도은주를 빤히 바라봤고 그녀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눈썹을 찡그렸다.
“이왕 묻는 김에 더 묻죠. 당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