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52
제252화
놈들은 광동어로 뭐라뭐라 그러더니 뜬금없이 여자에게 숫자를 세라고 다그쳤다.
“算數, 從一數到十啊? (숫자를 세라. 1부터 10까지.)”
광동어는 6성조 체계이고 한국인은 흉내는 내도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정확히 성조를 따라 할 수 없었다.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어설픈 광동어로 대답했다.
“얏이…….”
두 남자는 3까지만 듣고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唔係同胞呢. (동포가 아니군.)”
여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놈들은 여자의 뺨을 세게 후려치고 두 놈이서 팔다리를 각각 나눠 잡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건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이진영은 레일건을 놈들에게 겨눴다.
‘뭐하는 거요. 놈들이 죽었다간 웡꺼 놈들이 알아챌 수도 있소.’
김명중이 대뜸 이진영의 레일건을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어차피 우리는 놈들을 이간질하려고 들어온 거 아닌가요? 대놓고 죽여버리죠.’
‘작전지역에서는 내 명령을 따르시오. 한 명, 한 명 다 구하다가는 우리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어째 이진영은 아까부터 가슴이 답답했다.
태스크포스 13은 명령권이 애매했다.
경찰, 육군, 정보국. 일단은 정보국이 명령권을 가지고 있지만 육군은 현장 경험을 이유로 그 말에 따를 기세가 아니었다.
태스크포스 13은 출발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고 과연 쐐기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이진영은 의심스러웠다.
여자의 티셔츠가 찢겨 나가고 여자는 도와달라며 한국어로 비명을 질렀다.
골목 저 너머는 꽤 번화한 거리였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국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무시했고, 같은 완장을 단 놈들은 휘파람을 휘익하고 불며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운명을 깨닫고 그냥 무감각해지는 걸 택했다.
여자는 딱 임은혜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고 보다 못한 김대현이 소총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한 놈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누군가가 뒤에서 예리한 나이프로 웡꺼 놈들의 목을 그어버렸고 뒤이어 야구방망이로 무릎을 꿇고 여자를 덮치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퍽, 두개골이 깨지면서 또 다른 강간범 놈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홈런.’
이진영은 저도 모르게 홈런이라고 읊조렸다. 아마 배트에 맞는 게 사람 머리가 아니었다면 정말 시원시원한 스윙이었다.
“괜찮아요?”
야구방망이를 든 남자는 깔끔한 한국어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뜯긴 앞섶을 손으로 가리며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구한 사람을 쳐다봤다.
웡꺼의 점령지구는 완전히 약육강식의 무법지대였고 게다가 이 남자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두 명을 죽였다.
세 명째가 여자 본인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괜찮아요. 나쁜 사람 아니니까. 이거 입어요.”
남자는 자신의 자켓을 벗어서 여자에게 내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번화가의 가로등 불빛에 남자의 옆모습이 보이고 이진영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진가구?’
나이프와 야구방망이로 강간범을 죽인 놈은 다름 아닌 잠입경관 출신 진가구였다.
진가구를 아는 건 이진영뿐만이 아니다. 캐논볼 레이스 건으로 자주 굴다리에 들어갔던 김대현과 유인환도 진가구를 알아봤다.
‘팀장님. 저 친구 그 잠입경찰이라던…….’
‘맞아.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제 이효진에게 심 부장 살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이진영은 왜 진가구가 여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민출신 잠입경찰, 소위 ‘아웃소싱 언더커버’의 결말은 둘 중 한 가지였다. 조직에게 들켜서 죽던가, 아니면 경찰을 배신하고 조직에 붙던가.
이효진은 진가구가 이세화의 저격을 포기하고 조직을 배신했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 말이 맞다면 진가구는 더더욱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이세화는 유일하게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롱꺼 패거리의 암습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이세화는 각종 TV에 등장하며 롱꺼와 난민을 구분해서 대응할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롱꺼에게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굉장히 거슬릴 터였다.
그 암살의 첫 시도를 날려 먹은 사람이 웡꺼의 영역에 있다는 게 이상했다.
‘저 친구…….’
진가구는 시체를 질질 끌어서 태스크포스 13이 숨어있는 근처에 버렸다.
맨 앞에 있던 육군 요원이 나이프를 거꾸로 들고 더 들어오는 순간 진가구를 죽이려고 했다.
진가구는 다행히 안쪽까지는 들어오지 않았고 놈들의 완장을 떼고는 대충 쓰레기 더미를 덮어 시체를 숨겼다.
그는 아직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왔다.
“뭐 하는 거예요. 빨랑 가요. 여기서 부천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 군인과 만날 거예요. 아, 그리고 주민증 같은 거 가지고 있으면 빨간 완장. 롱꺼 놈들에게 보여줘요. 롱꺼 놈들은 웡꺼랑 달리 한국인들을 그냥 보내줍니다.”
진가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여자와 눈높이를 맞춘 뒤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그러나 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바닥에 튄 핏자국만 바라봤다.
“내가 안내해 줄까요?”
진가구는 피로 얼룩진 체잉꺼의 완장을 들어 보였다.
“아뇨, 괘, 괜찮아요.”
여자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고 진가구는 여자의 태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롱꺼는 3주 전 인천시를 완전히 점령한 후 한국 국적자들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줬다.
이 여자도 그때 이곳을 나가려 했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진가구가 물었다.
“왜 여기 남은 거예요?”
“그, 그건. 돈 때문에……. 빚도 좀 많고 가게가 있거든요. 기본소득이 취소되어서 돈을 안 벌면 살 수가 없어요.”
기본소득이 취소되었다면 가게라는 게 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웡꺼놈들도 꼬이고 하는 걸 보면 불법적인 일이 분명했다.
진가구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아니, 금전맹어호(金錢猛於虎)겠군. 시발 그놈의 돈이 뭔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그리고 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여자는 진가구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요. 이 근처는 웡꺼 놈들이 많으니까. 또 놈들이 지랄하면 이거 보여주세요. 형제의 여자는 안 건드니까.”
진가구는 놈들에게 뺏은 노란 완장을 여자의 손에 들려줬다.
여자는 진가구에게 머리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번화한 거리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개새끼들……. 강호의 도리는 바닥에 떨어졌고 남아 있는 건 전부 개새끼들이야.”
진가구는 여자가 사라진 후 한국어 욕을 남기고는 거리로 나갔다.
이 근처에서는 피 묻은 배트를 들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진가구도 사라진 후 골목에서는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이진영과 44팀은 더더욱 씁쓸한 표정으로 쓰레기 더미에 묻힌 시체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극비작전이라지만 그들은 자국민이 몹쓸 짓을 당하는 걸 눈뜨고 지켜봐야 했고, 정작 그녀를 구한 건 난민인 진가구였다.
‘이 팀장님, 저 사람 아는 사람인가요?’
‘예,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이진영은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진가구는 롱꺼 패거리의 점령지구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이효진이 진가구의 기록을 들고 온 이상, 그가 심 부장을 죽인 건 분명했다.
구룡의 눈 암살에 지레 겁을 먹은 경찰 고위 관료들이 벌벌 떨면서 현장직도 아닌 이효진에게 사건을 떠넘길 정도였다.
“혼돈 그 자체군.”
이진영은 한 마디로 인천의 상황을 정리했다.
웡꺼 놈들은 점령군처럼 곳곳에서 으스대며 돌아다녔고 일반 난민들도 놈들의 분위기에 편승해 승전국 국민처럼 활기차게 돌아다닌다.
우울한 표정에 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들은 거의 한국인이었다.
지금 인천의 모습은 그동안 난민-한국인 관계가 역전된 모습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난민들은 한국인이 방벽 붕괴 전에 그랬던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고 아까 그 여자처럼 생업 때문에 남은 한국인들은 종이라도 된 것처럼 굽신거린다.
웡꺼 놈들의 말 한마디면 한국인은 죽는다.
재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길거리로 개처럼 끌려 나와서 얻어맞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밖에서 피상적으로 볼 때와 달리 안으로 들어와야 피부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거리에 널린 시체들이나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치안은 모두 롱꺼의 인천 점령이 오래 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롱꺼는 회합에서 웡꺼를 압박해 치안을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웡꺼는 그 명령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회합의 내용은 모르지만 다른 경로로 롱꺼가 치안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건 정보국이나 경찰도 알고 있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페어차일드는 폭력적인 방법을 쓸지언정 사업가지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업 파트너는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해야 했다.
곳곳에서 웡꺼 패거리들이 약탈을 하고 사람을 후려 패는 모습이 목격되었고 이는 앞으로 다가올 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페어차일드 쪽에서 협상을 걷어찰지도 모른다.
‘롱꺼와 웡꺼 패거리 사이도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군.’
이진영은 편의점 앞을 가리켰다.
충돌은 웡꺼와 민간인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었다. 붉은 완장을 찬 롱꺼 조직원들이 싸움이 터질 때마다 웡꺼와 충돌했다.
조직원들은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못했고 2차 봉기 후 조직숙청이 벌어졌을 때처럼 핏대를 세우며 말싸움을 했다.
아직까지 서로에게 총을 쏘는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웡꺼 놈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패대기치며 롱꺼 놈들에게 대드는 모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웡꺼는 봉기 직전 수많은 사람들을 어거지로 징집하며 몸집을 불렸고, 그 말은 어중이떠중이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식량을 받으러 왔다가 끌려왔던 사람이 짜릿한 승전을 맛보고 웡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우리 아니고서는 니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데! 어! 우리가 아니었으면 인천을 점령하지도 못했어!”
감미영 팀장도 이진영에게 놈들의 말을 통역 받고 한숨을 폭 쉬었다.
저딴 놈들에게 육군이 어이없이 패퇴한 건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아미타여래의 초월적인 해킹 능력 때문이었다.
웡꺼 놈들은 군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최소한의 규율도 찾아볼 수도 없는 마적떼 그 자체였다. 가게마다 돈을 내지 않고 약탈하며 사람을 패대기치고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이 마적떼가 아니라면 뭐가 마적떼란 말인가?
이진영은 분노를 참으며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아미타여래가 있는 한 저 마적떼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군의 모든 장비는 놈이 노드허브를 깔아놓은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먹통이 된다.
미사일, 사격통제 인공지능, 공격 로봇. 인공지능이란 인공지능은 모두 무력화되고 몇몇 장비들은 아미타여래의 뜻대로 놀아나기도 했다.
해킹할 수 있다는 건 로봇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쪽이 못 쓴다고 해서 저 마적떼 놈들도 공평하게 못 쓰는 게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진영은 인천이 함락되고 나서야 뒤늦게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송도 폭탄테러’의 진정한 배후가 누군지 알아챘다.
당시 도은주 부장은 마이크로웍스의 보안을 뚫어낼 정도라면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고 말했다.
결국 로봇들의 알고리즘을 깨버릴 수 있는 연산 능력을 가진 건 아미타여래밖에 없었다.
아미타여래가 마이크로웍스 로봇의 보안 프로토콜을 뚫고 살인 로봇을 대량으로 만드는 동시에 노드허브를 곳곳에 배치했으리라.
그런 아미타여래의 영역 안에서 유일하게 의지를 가지고 활동한 로봇이 딱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