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도은주는 자신이 생각한 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눈썹 펜슬을 꺼내서 냅킨에 뭔가를 써서 이진영 쪽으로 내밀고 눈웃음을 쳤다.
신희정은 그 내용을 보려고 도은주에게 몸을 기울였지만 도은주는 얄밉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신희정을 막았다.
“아 뭐야. 둘이 사귀어요? 전화번호라도 줬어요?”
도은주는 씩 웃으면서 먼저 핸드백을 메고 일어섰다. 독한 술을 반병 이상 마셨으니 멀쩡할 리 없다. 그녀는 비틀거리다 EV-1에게 부축을 받았다.
“그럼 신사분들 즐겁게 마시시길. 저는 미라쥬 호텔로 들어가렵니다. 이 상황에서 경찰 호위를 받는 거보다야 사설 경비가 있는 거기가 더 안전하겠지요.”
이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다. 제아무리 간 큰 암살자라도 버젓이 보안경비까지 있는 호텔까지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육군본부보다 함락하기 힘든 곳이 5성급 호텔이었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강남서의 경찰들은 그녀를 경찰차로 에스코트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벤츠에 올라 곧바로 송도에 있는 고급 호텔로 향했다.
신희정은 도은주가 월미도에서 떠나는 걸 보고 이진영 쪽으로 붙어 앉았다.
“그거 설마 호텔 방 번호?”
이진영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걸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더니 술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신희정은 멋대로 오해하고 꿍얼거렸다.
“와, 진짜 하여튼 여자에게는 사연 있는 퇴역병이 인기가 많다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보다, 아까 그놈 내곡동으로 보낸 것 같지는 않고. 참관해봐도 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초등학생 수업 참관하는 건 줄 알겠네.”
“나도 알아요. NIA 작전에 참여한 적 있으니까.”
신희정은 정색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겁니다.”
“블랙옵스라는 게 다 그렇죠.”
신희정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가 이진영의 잔에 막잔을 따랐다.
두 사람은 멋없게 막잔을 건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哎哟, 大爷, 你去邊度啊? (나으리? 어디로 가시는 거죠?)”
주인장은 그릇 밑에 끼워져 있는 돈을 보고 미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벌써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 * *
두 사람이 다시 나타난 곳은 인천항에 있는 보세창고였다.
곳곳에 하역을 기다리는 컨테이너가 정말 산처럼 쌓여 있고 야심한 밤에도 로봇들이 척척척 물건을 나르고 크레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여기 온 적 없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신희정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불붙은 담배를 입에 물고 신소재 수술 장갑부터 끼었다.
“입는 장비라 짜증나시겠지만 족적과 DNA를 안 남기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진영은 군말하지 않고 장비 가방을 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끽해야 군용 화생방보호복을 생각했던 그에게 앞에 놓여 있는 건 뜻밖의 물건이었다.
“이건 우주장비 아닙니까?”
“궤도 엘리 방어전 때 우리 회사도 참여했거든요.”
신희정도 수트 상의를 벗고 신형 우주복을 입으며 마치 우주비행사와 통신하는 흉내를 냈다.
“예압. This is ground control. Do you hear me, Major Tom? (여기는 지상관제소, 제 말이 들립니까, 톰 소령?)”
“My circuit’s still alive, I’m good. (제 우주복 회로는 살아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오래된 노래의 가사였다.
신희정은 우주복 헤드 모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바이저를 올린 뒤, 씩 웃었다. 우주복의 무선통신 모듈로 신희정이 말이 들린다.
– 점점 댁이 마음에 드는데요?
– 난 남자 취향은 아니라.
–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이 짓거리도 오랜만이군요.
신희정은 신형 우주복을 입고 우주복 옆에 있는 증기추진식 우주 기관단총을 잡았다.
이 기관단총은 화약식 자동권총을 닮았지만 슬라이드가 뒤로 재껴지면서 총알이 나가는 반대 방향으로 증기가 치익하고 튀어나온다.
이 방식 덕분에 우주에서도 반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동화기를 쏠 수 있었다. 무기까지 다 갖춘 신희정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말했다.
– 이 짓거리는 전쟁 때 같으면 하청줬는데 직접 해야 되네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니니 형사 양반은 여기서 기다리는 건 어때요?
– 갑자기 왜 그런…….
신희정은 EV-1을 슬쩍 쳐다봤다.
– 내 커리어를 생각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더러운 꼴이라면 깐웨 전쟁에서 많이 봤구요. 그리고 커리어는 박살 날대로 박살 난 터라.
신희정은 더 말리지 않았다, 이진영은 등을 돌려 EV-1을 막아섰다.
– 깡통, 넌 여기서 기다려라.
– 하지만 경직법상 저는 경위님과…….
– 멍충아. 이건 경찰업무가 아니야. 여기에 온 것도 상부에 보고해선 안 돼.
EV-1은 저 창고 안에서 뭐가 벌어지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잠자코 이진영의 말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안에는 또 다른 손님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영은 그들을 힐끔 쳐다봤지만 그들 역시 우주복을 입고 태양차단 바이저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신희정은 이미 그들과 낯이 익은지 뭐라뭐라 다른 통신채널로 말하면서 제스처를 취했다.
낯선 사람들 중 한 명이 바이저를 살짝 올리고 이진영을 쳐다봤고 이진영은 그 사람이 백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요?
신희정 아까 잡은 저격수에게 다가갔다. 저격수는 은색 덕테이프와 밧줄에 묶여 의자에 앉아있었고 우주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오자 겁을 먹고 흡흡흡흡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 과연 그럴까?
신희정은 작은 알루미늄 케이스를 열더니 아트로핀 주사기 같은 걸 꺼내서 놈의 목에 퍽하고 거칠게 주사를 놨다.
“으윽, 이, 이게 뭐야.”
– 정력에 좋은 약. 발기부전에 좋지. 어디까지나 부작용이긴 하지만.
이진영은 힐끔 먼저 온 손님들을 바라봤다. 저 약의 정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신희정은 우주복 팔의 아날로그 시계를 보다가 작은 손전등을 놈의 눈에 비춰 동공을 확인한 후 물었다.
– 네 이름은.
“모, 몰라…….”
– 네 이름은.
“我叫漢愈清. 我……. 叫我的律士. (내 이름은 한위칭, 내 변호사를 불러줘.)”
– 我唔係察, 你也唔係嫌犯. (난 짭새가 아니고 너 역시 용의자가 아니지.)
“咁, 呢係咩事啊? (그러면 이건 대체 뭐 하자는 거지?)”
–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냅다 기관단총을 한위칭의 새끼발가락에 대고 발사했다. 우주 증기기관단총의 장점 중 하나는 화약총의 선조흔이나 레일건 전류흔적이 남지 않아 총을 추적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의자가 뒤집힐 뻔했지만 NIA 소속의 로봇들이 의자를 꽉 잡고 발광하는 놈을 쓰러지지 못하게 막았다.
–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 니들 롱꺼 조직원들의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나도 이 짓 오랜만에 하려니 진절머리 나거든.
“너, 넌 뭐지?”
– 규칙 하나. 질문은 내가 한다.
기관단총을 엄지발가락에 대자마자 한위칭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규칙 둘, 넌 진실을 말해라. 로봇이 네 진실을 파악할 거다.
신희정은 한두 번 이런 일을 해본 게 아니었다.
홍채 반응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로봇이 척척 걸어와서 놈과 눈을 마주쳤다. 카메라 헤드가 척척 돌아가면서 겁먹은 저격수의 모습이 비쳤다.
– 손님도 많이 모셨으니 시간 없어. 스피드 퀴즈야. 알지? 막 질문하면 빨리빨리 대답해야 하는 거?
이번에도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널 보낸 놈은.
정말 스피드 퀴즈를 하는 것 같았다.
반응이 3초 정도 늦자 신희정은 인정사정없이 놈의 엄지발가락을 총으로 쏴버렸다.
문틀에 찍히기만 해도 아픈 곳을 총으로 난도질을 하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你疯狂啊! (미쳤어!)!”
– 널 보낸 놈은.
신희정은 인정사정없이 캐물었고 놈은 중국어로 중얼거렸다.
“请原谅! 我唔能供出那名字. 如果佢知道嘅话, 我就死啦. (쫌 봐줘요! 그 이름을 말한 걸 그가 알면 난 죽어요)”
– 無論如何, 在你被捕以后, 已经祸副命定. (어찌 되었든 니가 체포된 시점에서 네 운명은 결정된 거다.)
퍽.
신희정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구경하고 있던 또 다른 손님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뭐라뭐라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널 보낸 사람은.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고통 때문인지 필사적으로 버티던 저격수도 서서히 굴복하기 시작했다.
“헤, 롱꺼, 아, 아니 쎄잉꺼(星哥). 쎄잉꺼가 여, 여자를 따라붙으라고 했어.”
쎄잉꺼는 롱꺼, 웡꺼와 함께 월미도 난민지구 조직폭력배의 대보스였다.
– 쎄잉꺼는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그, 그건 몰라.”
신희정은 다시 시계를 바라보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알루미늄 케이스에서 주사기를 하나 더 꺼내 놈의 목에 갖다 댔다. 남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필사적으로 약 기운에 저항하려고 했다.
– 말해.
“그, 그냥 높은 사람.”
– 높은 사람 누구.
“我叫漢愈清, 我係廣東自由军, 二十三師, 第一团, 十三營……. (내 이름은 한위칭, 나는 광동자유군 23사단, 1연대, 13대대…….)”
광동자유군은 민주화 시위로 일어선 시민군이었고 간위예 전쟁에서 중공군에 패배해 해산당했다.
한위칭은 그 전쟁에서 광동자유군으로 특수부대로 참가했고 약물을 사용한 심문에 대비되어 있었다.
신희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먼저 온 손님들 쪽을 바라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위칭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관등성명과 전쟁 당시 계급만을 중얼거렸다.
알루미늄 케이스가 열리고 신희정은 세 대째의 자백제를 투여했다.
– 스폰서. 저격을 시킨 스폰서.
“노, 높으신 분.”
한위칭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자백제와 발이 뭉개진 고통으로 그의 정신력은 점점 더 소모되었다.
– 높으신 분이 한두 명이야? 경제계? 정치계? 어느 쪽? 아니면 로봇 회사? 그것도 아니면 북중국과 연관된 곳?
– 네, 네드 러드. 네드 러드. 한궈……. 이이윤(議員)
– 咩議員. (무슨 의원.)
– 구, 국회……. 국회의원. 한국…….
드디어 기다리던 키워드가 나왔다. 이진영이 보기에도 눈에 띄게 또 다른 손님들 쪽의 분위기가 술렁이는 게 보였다.
– 좋아. 더 말해봐.
놈은 대답 대신 광동자유군의 군가로 불렸던 홍콩밴드 비욘드의 해활천공(海活天空)을 불렀다.
“背棄了理想誰人都可以, 咁會怕有一天你共我. (이상을 버리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언젠가는 너와 나밖에 남지 않을지도 몰라.)”
모든 사람은 변하지만 절대로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배신하지 않겠다. 신희정의 고문에 대한 놈의 대답이었다.
놈은 피가 섞인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절대로 자신이 아는 걸 불지 않으려고 했다.
– 독한 새끼들.
진짜 누가 독한지 모를 일이었다.
신희정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백인에게 뭐라뭐라 말했다. 저쪽도 분위기가 한껏 험악해졌고 서로 격앙된 제스처를 취해가며 격론을 벌였다.
– CIA까지 다들 아주 바쁘시군 그래.
이진영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만으로 저 백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고가다리 총격적으로 군용 인공지능 개발회사인 버몬트 오토까지 로봇 살인에 연관되었으니 미국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군도 대량으로 로봇을 운용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미국 국방부까지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버몬트 오토가 오류가 일어났다는 걸 인정하면 방산 로봇 업체들은 크게 출렁이고 주가도 영향을 받는다.
신희정은 CIA와 상의를 마친 후 다시 놈에게 다가갔다.
– 네드 러드가 누구지? 국회의원인가? 야당? 아니면 여당?
“난 몰라. 엄마 보고 싶어. 마마, 마마. 니 딤웽퐁헤이응어….”
유아 퇴행.
더 이상 자백제를 썼다간 돌이킬 수 없었다.
한위칭은 이미 침을 질질 흘리고 눈동자가 완전히 풀어져 있었고 그의 동공 상태를 살피던 로봇이 신희정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