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66
제266화
기다렸다는 것처럼 탁탑천왕의 드론이 날아왔지만 새로운 EV-1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EV-1은 제석천과 비슷한 매니퓰레이터 암을 장비하고 있었다.
전방에 푸른 번개가 좌자작 뻗어나가고 살충제를 맞은 날파리처럼 후두둑 드론들이 떨어진다. 전기충격은 범위만 조금 좁을 뿐 제석천과 거의 맞먹는 위력이었다.
“와오! 이브이, 너 진짜 끝내주는구나!”
– 심봉근 경위님, 감탄은 나중에 하시죠. 팀장님 탑승하시겠습니까?
이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 팔을 심하게 다쳤어. 그리고 원래 기계보병은 바깥에 매달리는 게 일이지.”
– 알겠습니다.
EV-1은 두 사람을 태우고 뒤로 좌라락 뒤로 롤러대시를 했다.
새로 바뀐 EV-1 프레임의 진짜 성능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다.
마이크로웍스는 저 전격 장비는 물론이고 중화대루에서의 일전을 분석해서 특별병과번호에 대응할 수 있는 병기들을 EV-1에 장착시켰다.
현재의 EV-1은 놈들에게 있어 완벽한 카운터 펀치였다.
위타천이 EV-1에게 달려들었고 빠른 속도로 선회하면서 EV-1의 등 뒤를 노리려고 했다.
하지만 EV-1은 빠르게 턴픽 기동을 하면서 위타천의 공격을 피하고 냅다 펀치를 먹여버렸다.
EV-1의 스승은 이제 전설이 된 제리였다.
EV-1의 주먹이 크로스카운터로 위타천에 틀어박히고 동시에 전자식 파일벙커가 사출되었다.
쾅!
위타천의 달 개척용 엑소슈트는 굉장히 튼튼했지만 EV-1은 아까 심봉근이 구멍을 내놓은 바로 그곳에 카운터를 넣어버렸다.
지금 EV-1이 장비한 파일벙커는 쇠말뚝이라기보다는 기사의 창처럼 길었다.
위타천의 몸체를 뚫고 파일벙커가 반대쪽으로 비죽 나왔고 하필이면 창이 놈의 내부 방열판 부품을 건드렸다.
위타천의 방열판이 박살 나며 등 뒤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위타천은 부품의 과열뿐만 아니라 충격을 감소시켜주는 유동액도 냉각시켜야 했다.
고속으로 이동하고 급정지를 하다 보면 인간의 신체는 깡통 안의 토마토처럼 으깨져 버린다.
바로 관성으로 인한 신체 손상을 막기 위해 위타천의 ‘본체’는 오렌지색 유동액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유동액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급기야 엑소슈트 접합부로 쏟아져 나왔다.
EV-1은 발로 위타천을 잡고 파일벙커를 뽑아 버렸고 위타천의 프레임은 그대로 쿵하고 무릎을 꿇어버렸다.
위타천이 무릎을 꿇는 사이 놈의 등을 타고 제석천과 부동명왕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제석천의 번개가 부동명왕의 검에 휘감기더니 마치 마법검처럼 EV-1을 갈랐다.
빠지지직.
전류가 EV-1의 검은 몸체에 휘감기려는 찰나 EV-1은 옆으로 핑핑 클레이 사격 원반 같은 전도체를 사출했다.
마이크로웍스는 특별병과번호의 카운터 장비를 EV-1에 탑재했고 이 전도체는 제석천의 능력을 막기 위한 장비였다.
앞으로 날아오던 푸른 번개가 전도체와 유도되어 그쪽으로 방향이 꺾였다. 전투기의 적외선 플레어나 레이더 기만체와 똑같았다.
그리고 EV-1은 허리춤에 숨겨져 있던 매니퓰레이터 암을 펼치며 바로 발도술을 선보였다.
카앙!
부동명왕의 검과 EV-1의 검이 부딪치면서 큰 공진이 일어났다.
우웅.
주변의 모든 물체들이 악기처럼 공진했고 선로 표지판 부품들이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분해되어 쾅쾅 떨어져 버렸다.
– 팀장님! 트리거를!
이진영은 한 손으로 트리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권총으로 제석천을 쏴버렸다.
탕탕탕!
제석천이 총알을 피해 옆으로 몸을 트는 사이 EV-1은 차폐연막탄을 발사했다.
순간적으로 EV-1의 모습이 사라졌고 천수관음은 바이포드 로봇들을 이동시켰다.
아미타여래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예측 사격이었다. 천수관음은 아미타여래와 링크되어 있었고 EV-1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쪽으로 피할 수 없는 올레인지 저격을 꽂아 넣었다.
30여 대의 바이포드 로봇에서 동시에 레일건이나 화약총이 불을 뿜고 연막탄 속으로 수많은 탄자들이 내리꽂혔다.
그러나 EV-1은 아미타여래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로봇이었다.
– 피했다고?
EV-1은 시각센서로 천수관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고 연막 속에서 한 곳에 멈춰 섰다.
단 한 발의 총탄도 EV-1의 밉살스러운 검은 프레임을 맞추지 못했다.
이진영의 머리와 등 뒤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지만 EV-1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부상당한 위타천이 중얼거렸다.
– 저 로봇, 설마 아미타와 호각이라는 건가?
아미타여래가 지휘하는 천수관음의 저격은 단 한 번도 목표를 빗나가지 않았다.
EV-1은 또다시 날아오는 저격을 전술방패를 들어서 가볍게 튕겨주면서 대구경 저격총만 피해버렸다.
특별병과번호의 체면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도펠졸트너 프레임이라지만 EV-1은 특별병과번호를 상대로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줬다.
생각해보면 전에도 EV-1은 공격 로봇이라는 한정적인 성능만으로 특별병과번호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 팀장님, 저들과의 결판은 다음을 기약해야겠군요.
그들의 적은 특별병과번호뿐만이 아니었다.
웡꺼 놈들이 테크니컬 트럭에 탄 채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웡꺼의 영역이었고 육군은 지원군을 보낼 기미가 전혀 없었다.
EV-1은 적어도 위타천이나 부동명왕 중 한 놈을 제거할 수 있는데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진영과 심봉근의 탈출이었다.
– 놈을 쫓아.
– 하지만 곧 영역 밖이다.
아미타여래는 그 이상 EV-1을 쫓으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심어놓은 노드허브가 깔린 곳은 인천이라는 한정적인 영역이었다. 또한 아미타여래도 대한민국 전역을 해킹할 수는 없었다.
놈의 능력은 컴퓨터의 CPU처럼 클럭 한계가 있었고 일정 범위 이상을 넘어가면 ‘한계-리미트’에 다다르게 된다.
– 그놈, 대체 뭐지?
아미타여래는 목 뒤에서 케이블을 분리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EV-1은 물리적인 장비뿐만 아니라 해킹능력이나 클럭에 있어서도 자신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 설마 그 ‘노블코어(NobleCore)’인가? 초인공지능. 특이점.
아미타여래는 마이크로웍스에 연금되어 있었고 한국 정보국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넷에 접속하여 특이점과 초인공지능에 대해 검색했다.
하지만 EV-1의 정체는 마이크로웍스에서도 한정적인 사람만 접근할 수 있는 기밀 중에 기밀이었다.
마이크로웍스까지 해킹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아미타여래는 인공 망막에 비치는 EV-1의 퇴각 모습을 보면서 옆에 있는 마지막 특별병과번호에게 중얼거렸다.
– 모두가 나서서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 * *
EV-1은 가볍게 특별병과번호의 추격을 뿌리치고 부천역으로 되돌아왔다.
그곳을 지키던 육군 병사들은 또 웡꺼의 엑소슈트 부대가 쳐들어온 게 아닌가 하고 깜짝 놀라 총을 겨눴다.
EV-1은 부천역을 곧장 통과해서 소신여객 터미널로 향했다.
심봉근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탁탑천왕의 드론이 팔을 파고들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기도 했다.
파일럿석에서 심봉근이 내리자마자 육군 의료 로봇이 그 자리에서 수술을 시작했다.
“난 괜찮아! 그보다 우리 팀은! 다른 팀원들은!”
이진영은 의료 로봇을 뿌리치고 전진기지 브리핑실로 달렸다.
EV-1도 그의 뒤를 쫓아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현장지휘소 안에는 신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짧게 말했다.
“안전가옥과 베이스캠프가 다 털렸어요.”
신희정은 불타는 안전가옥과 웡꺼 놈들이 들이닥친 베이스캠프를 보여줬다.
베이스캠프의 물자는 이미 웡꺼 놈들이 털어 갔고 포로로 육군 특전단 병사들이 잡혀 있는 모습도 보였다.
이진영은 김대현이나 유인환의 모습이 모니터에 잡힐까봐 그게 무서웠다.
모니터에 비친 웡꺼놈들은 노란 깃발 아래 포로로 잡은 태스크포스 13 팀원들을 무릎 꿇게 하고 항일대도를 꺼냈다.
뒤의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놈들은 특전단 사람들을 고문하며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캐낼 것이다.
신희정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태스크포스 13의 작전은 이대로 실패한 걸까?
“도대체 어떻게…… 안전가옥이나 베이스가 들켰다는 징후는 전혀 없었어요.”
이진영은 말없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드타워 폭파가 화근이었는지 몰라요. 제기랄, 안 그래도 너무 화려하게 저질렀다 싶었어요.”
실제로 소드타워 폭파가 화근이었다.
안전가옥과 베이스가 털린 건 어떻게 보면 이진영의 실수 때문이었다.
질산화합물을 실을 때 한 통이라도 더 트럭에 실으려고 중기관총을 바다에 버린 것.
테크니컬 트럭들은 반드시 중기관총을 무장하게 되어 있었고 정유공장 CCTV에서 ‘탁일항’이 기관총 거치대만 떨렁 있는 걸 보고 단서를 잡았다.
롱꺼 조직에 다들 바보만 있는 건 아니었다.
탁일항은 아미타여래를 이용하여 트럭에 탄 인원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찾아냈다.
나름 노드허브나 인공지능을 피한다고 피했지만, 탁일항은 집요하게 이진영을 추적했다.
그리고 탁일항의 목적은 단순히 웡꺼를 대신하여 소드타워를 공격한 놈들을 잡으려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는 와중에 사태는 또 급변했다.
탁일항과 특별병과번호가 등장하며 쎄잉꺼와 웡꺼의 충돌은 무마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탁일항의 다음 수는 이진영과 신희정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워, 웡꺼가 죽었어!”
웡꺼의 목이 인천시청에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었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웡꺼가 죽은 시간은 장례식 행렬이 충돌하며 본격적으로 교전이 벌어진 직후였다.
* * *
소드타워 지하주차장.
하얀 우주장갑복을 입은 놈들이 하나둘 청소차에서 내리기 시작한다.
놈들은 탁일항이 이곳에 왔을 때 체크해 놓은 자외선 표시를 보고 여유롭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놈들은 전원 광학위장복을 가동시켜 희미하게 실루엣만 보였다.
소드타워에는 광학위장을 막기 위해 원래부터 무게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 역시 탁일항이 무력화시켜 두었다.
퍽, 퍽.
TV를 보며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백여 명의 ‘사다우카’는 소리 없이 소드타워를 오르면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죽였다.
마치 조용한 도살장처럼 퍽퍽하고 진동 블레이드가 박히는 소리와 피가 후두둑 쏟아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보안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사다우카는 탁일항이 준 정보대로 각각의 경비초소 따위를 전부 무력화시켰다.
7만 군세의 웡꺼 핵심부가 겨우 백여 명밖에 안 되는 사다우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놈들은 병사들이 부른 창녀나 로봇들 역시 전부 처리하면서 웡꺼의 방으로 전진했다.
감시카메라는 진작에 다운되었고 웡꺼의 병력들은 속속 장례행렬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웡롱의 부대장 배덕환 역시 급히 트럭을 몰고 장례행렬로 향했고 이곳은 완전히 비워진 상태였다.
모든 것이 탁일항의 계획대로였다.
놈은 쎄잉꺼에게 웡꺼를 팔았고 쎄잉꺼는 웡꺼 쪽에서 싸움을 걸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관을 받쳐 든 놈을 저격하며 우발적으로 벌어진 싸움이었지만 쎄잉꺼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충돌이 일어나자마자 심복인 사다우카와 함께 소드타워로 우회해서 달려왔다.
놈은 접의자를 든 체잉꺼와 함께 우아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에는 사다우카가 ‘도살’한 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