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73
제273화
쎄잉꺼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세 명의 대보스 중 쎄잉꺼는 가장 현실적이었고, 가장 폭력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롱꺼, 당신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야. 그냥 편의주의자야. 조직폭력집단인 우리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이상을 이루려고 했던 형편없는 이상주의자. 황만개나 나를 죽이면 난민들을 통솔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요. 근데 봐봐요. 결국에는 이 모양 이 꼴이라니까.”
쎄잉꺼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롱꺼, 당신에게는 감사해요.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내가 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 난민 전체가 내 사업체에 취직하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이 바라던 게 아니었을까요? 혁명, 자유여.”
쎄잉꺼는 롱꺼가 일이 이렇게 되고도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금 쎄잉꺼마저 죽이면 월미도의 난민사회는 완전히 붕괴한다. 지금도 웡꺼 조직들이 산산조각 흩어지며 내전 양상을 벌이는데 쎄잉꺼마저 사라진다?
월미도와 인천이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수많은 자칭 호걸들이 전국시대처럼 난립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피해를 받는 건 난민들이었다.
쎄잉꺼는 그 사실을 알고 롱꺼를 압박했다.
“형님은 죽이지 않겠습니다. 긁어 부스럼이에요. 저도 출구 정책이 필요하거든요. 아무리 구멍투성이인 정의라고 하더라도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양대가리처럼 필요하거든요.”
오늘 쎄잉꺼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바로 ‘선양(宣讓)’이었다.
중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장면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평화롭게 정권을 물려준 권력 교체였다.
쎄잉꺼 입장에서는 내전 상태인 난민들을 추스를 구심점이 필요했고 롱꺼를 양대가리 삼아 걸어놓고 뒤로는 자기 멋대로 사업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었다.
쎄잉꺼가 용무가 끝났다는 듯 선글라스를 끼고 자리에 일어서려고 했다.
“앉아라. 쎄잉.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또 덕담인가요? 그건 당신을 따르는 아가들에게나 하시죠.”
롱꺼는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이 회의장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이번에는 쎄잉꺼의 입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롱꺼는 허튼소리로 협박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가 폭탄을 설치했다면 설치한 것이다.
롱꺼가 히죽 웃었다.
“이 자리에 네가 오든, 웡이 널 죽이고 오든 똑같았어. 너희들은 나와 함께 죽는다.”
“자, 잠깐. 형님. 여기서 저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시나요? 내전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멍청아. 정 대령이 풀려났다. 아미타 여래는 더 이상 이곳을 지켜주지 않을 거고 빵즈 육군이 밀려 들어올 거야.”
롱꺼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내가 왜 결정적인 리모콘을 웡에게 맡겼는지 모르겠나? 너와 웡, 그리고 나! 이렇게 권력이 삼각 균형을 이뤄야 외부에서 건드리지 못하니까! 그동안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우리 셋이 다 같이 있어야 놈들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롱꺼는 참아온 분노를 토해냈다.
“너 혼자 살아남는다고 내전이 끝날까? 레드 아리마와 페어차일드가 혼자 남은 널 제거할 걸 왜 생각을 못 해? 이젠 다 틀렸어. 이 멍청아. 네 이기심이 동포들 전체를 불구덩이로 끌고 갈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다 같이 지옥으로 가는 편이 나아. 우리들이 사라지고 나면 남은 동포들에게는 한 줄기 가능성이 열리겠지.”
롱꺼는 폭탄 스위치를 탁자 위에 올리며 동시에 피를 컥하고 토했다. 롱꺼가 눈에 띄게 수척해진 건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롱꺼는 전쟁 때 궤도폭격이 떨어지는 곳에 있었고 미세파편이 폐를 찌르면서 만성적인 폐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문룡, 너도 죽는다. 우리들의 시대는 월미도 조폭들의 시대는 여기서 끝나게 될…….”
텅.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체잉꺼의 어깨와 다리에서 연달아 피가 퍽하고 튀었다.
앞에 앉아있던 쎄잉꺼의 하얀 당의에도 피가 튀기고 쎄잉꺼는 뒤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뭐지?”
총을 쏜 사람을 알아본 건 체잉꺼였다. 체잉꺼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지, 진가구! 너, 너는 분명 죽은 줄…….”
다시 총알이 체잉꺼의 팔을 때리고 진가구가 소총과 권총을 들고 회의장에 난입했다.
그는 여전히 체잉꺼의 완장을 차고 있었고 사다우카 조차도 진가구가 섞여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진가구는 총신과 개머리판을 자른 오브레즈 피스톨로 체잉꺼의 팔다리를 쏴버렸다.
“으아아아악!”
체잉꺼가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피웅덩이에서 헤엄치듯 꿈틀거렸다.
“너, 나를 버림패로 쓰려고 그랬지? 나중에 다 들었어. 구룡의 눈 암살자들은 모두 죽었고 한국과의 협상을 위해 냉동실에 넣어져 있더군.”
진가구는 아마 형사가 되었어도 대성했을 것이다.
그는 경찰학교에서 배운 대로 구룡의 눈 암살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했다.
박성훈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자살한 한국 놈을 빼놓고는 명목상의 암살자들은 전부 한 곳의 냉동고에 모아져 있었다.
진가구가 체잉꺼의 목을 밟고 비아냥거리고 있을 때 사다우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꼼짝 마. 안 그러면 다 뒤지는 거야.”
진가구는 놈들을 노려봤다.
쎄잉꺼와 너무 가까웠다.
그들은 진가구가 쎄잉꺼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걸 보고 주춤거렸다.
근접전에서라면 사다우카는 순식간에 진가구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진가구는 놈들이 접근하기 전에 방아쇠만 당기면 쎄잉꺼를 죽일 수 있었다.
진가구는 롱꺼와 쎄잉꺼 중간에 끼어들면서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시발 조직의 높으신 분들 쌍판때기가 이렇게 생겼군. 말단에서 구르고 구르면서 어떻게 생겼을지 늘 궁금했었어.”
쎄잉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중에 한 명은 진가구도 오며 가며 몇 번 본 사람이었다.
“당신이 롱꺼였다고?”
롱꺼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씩 미소를 지었다.
진가구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만, 또다시 오브레즈 피스톨과 폭탄 스위치를 들어 보이며 호위병력을 물러서게 했다.
“아무튼, 이런 멋진 회담장에서 잘도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했었지. 춘절 회의에서 이 지랄을 하자고 결정했던 거 아닌가!”
진가구는 집요한 조사로 어떻게 봉기가 일어났는지 추적했다.
“나도 다 들었어. 난민 어쩌고저쩌고. 위선이 어쩌고저쩌고. 다 좋다 이거야. 다 좋다 이거라고! 근데에 롱꺼! 난 내 아내가 죽었다! 당신이 일으킨 봉기 첫날에 고작 쌀 한 푸대! 물 한 병 때문에 죽었다고오오!”
롱꺼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진가구를 바라봤다.
“동포? 동포오오! 웃기고 있네! 동포들을 생각했으면 봉기 따윈 일으키지 말았어야지! 누가 당신들더러 봉기를 일으키라고 말했지? 동포들 중 누가 당신들더러 우리의 운명을 밀실에서 결정하라고 했냐!”
이세화가 웡꺼의 면전에서 지적했던 대로였다.
이들은 난민의 대표자가 아니었고 감히 난민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다. 이들이 무작정 일으킨 봉기 탓에 1만 단위로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건 단순히 난민 간의 내전이 아니라 그냥 전쟁이라고 보는 편이 나았다.
어떤 사람은 경찰로 몰려서 어떤 사람은 식량을 훔치다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내전에 휘말려서.
“내 아내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롱꺼! 당신이 그 잘난 입으로 밟혀 죽은 아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어? 어!”
진가구는 난민번호 0000042라 적힌 난민등록카드를 쥐고 고함을 질렀다.
하필 그 난민번호 카드도 경찰 인사기록카드처럼 노란색이었다.
“당신의 판단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 내 이웃도 폭도로 변해 내 아내를 죽였다고! 난민동포들을 괴물로 만든 건 당신이야.”
쎄잉꺼는 씩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거봐요, 형님. 제가 말한대로…….”
“너도 닥쳐! 이 개새끼야!”
탕!
진가구는 참고 참은 분노를 다 터뜨렸다. 쎄잉꺼의 당의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투에서도 단 한 번도 핏방울이 튀지 않았던 하얀 옷이었다.
진가구는 앞으로 쓰러지는 쎄잉꺼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넌 뭐 잘난 줄 알아! 위선? 차라리 위선이라도 착한 척을 하는 놈이 나아. 돈에 미쳐 사람들을 죽여댔으면서 뭐가 좋다고 박수를 치고 지랄이야! 깡패 새끼들 주제에.”
쎄잉꺼도 롱꺼처럼 피를 입으로 질질 흘렸다.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쎄잉꺼도 위험했다.
그 순간, 사다우카가 움직였다.
사다우카의 나이프가 진가구의 무릎에 박히고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두 명의 사다우카가 쎄잉꺼의 옆을 막아섰다.
– 팀장님 막아야 합니다. 자폭할 기세입니다. 이대로라면 난민들도 위험해집니다.
이진영의 궁극적인 목적은 쎄잉꺼와 같았다.
이번 난민 사태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려면 그 죄를 씻어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정보국에서 괜히 구자연 검사를 부른 게 아니었다.
정보국에서도 진짜 출구전략은 전설적 조폭인 롱꺼를 체포하며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또한 진가구는 돌입 전에 ‘롱꺼를 잡으려면 따라오라.’라고 말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참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잡다’라는 동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었고 진가구는 체포가 목적이 아니었다.
만약 이진영이 진가구에 대한 케이스를 공유했다면 노련한 수사관인 윤숙희가 뭔가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진영이 배려한답시고 내사사건이 걸렸다는 걸 말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EV-1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사태가 터졌다.
사다우카는 근접전의 달인이었고 제일 먼저 롱꺼의 폭탄 스위치부터 나이프로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러나 진가구는 롱꺼가 아니라 전상영이 설치한 폭탄 스위치를 잡고 있었다.
진가구는 배에 칼이 박혔지만, 폭탄 스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다 같이 죽는 거다! 롱꺼! 잘 말했어! 월미도 조폭의 시대는 끝나는 거다! 네놈들의 똘마니 짓이나 하던 나 진가구와 함께!”
롱꺼는 이마를 땅에 대고 쓰러졌다. 그는 이미 진가구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죽었다.
쎄잉꺼도 죽어가고 있다. 그는 붉은 테이블에 고개를 옆으로 하고 피를 꿀렁꿀렁 토해내고 있었다.
“하린아아아아아!”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버튼을 누른 진가구.
모든 사람의 모습이 폭발에 모두 사라졌다. 전상영은 이곳을 올라오면서 사각형 빌딩 한 곳만 무너지도록 폭탄을 설계했다.
폭발이 위로 치솟아 오르고 롱꺼의 폭탄 역시 같이 기폭했다. 롱꺼의 폭탄까지 더해지면서 폭발은 전상영의 예상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진가구우우우우!”
감미영 팀장과 이진영이 동시에 진가구를 불렀다.
진가구는 감미영에게 놈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폭탄이 터질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끌겠다는 핑계를 대고 마스크를 하고 체잉꺼 패거리에 숨어들었다.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진가구가 대보스 두 명을 쏴 죽이고.
체잉꺼와 쎄잉꺼 조직의 중간보스들, 그리고 사다우카까지도 폭발에 휩쓸리게 만들어 저승길 동무로 삼을 줄은,
진가구는 그의 유언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피의 밤.
롱꺼, 쎄잉꺼, 웡꺼는 전부 죽었고 난민들은 폭력조직이라는 구심점을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그의 자폭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월미도의 모처에 숨어있던 정 대령은 헤드셋을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을! 롱꺼 이 개자식! 메인 허브가 박살 났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긴고아자국이 남아있는 이마를 긁으면서 성질을 부렸다.
어디라면 가장 안전하게 노드허브의 중추를 숨길 수 있을까? 정답은 바로 이 구룡성채였다.
하지만 전상영의 폭탄이 문제였다.
이 광기의 폭탄마는 노드허브 전체에 신호를 쏴주는 메인허브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