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86
제286화
“오, 그럼 애기엄마한테 줄 선물 사려고?”
“예, 뭐. 예.”
박민영은 대충 얼버무렸다.
“뭐어야. 사건도 아닌데 왜 여기서 얼쩡대는겨?”
“그게……. 그 사건이 좀 맘에 걸려서요. 귀타귀.”
박민영은 지지난 주에 마이크로웍스 부장이 살해된 사건을 신고받고 제일 먼저 현장으로 향했다.
이 살해사건은 굉장히 독특했다.
마치 아즈텍 인신공양 의식처럼 머리가 으스러지고 심장이 뽑혀 높은 에어컨 실외기에 걸려 있었다.
그 정황만으로도 미스테리에 환장하는 44팀과 ‘특별대응팀’ 팀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근데 그거 부장님이 2팀에 배당했잖아? 마이크로웍스랑 관련된 사건이라 빡세게 해결해야 한다믄서.”
“예, 저도 알고 있어요. 근데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미스테리라면 이진영도 사족을 못 쓴다.
“신고자를 찾으려고 하는데 영 어디가 어딘지.”
“오호, 광동어 때문이로군.”
“예, 그것도 있고 사람들이 웡꺼 간부 수색인 줄 알고 잘 협조를 안 해주네요.”
이진영은 박민영과 어깨동무를 했다.
“그럼 이 특별팀장님께서 도와줄까?”
박민영은 27세라 이진영의 막내 동생뻘이었고 영월에서 올라왔다는 이유만으로 이진영은 박민영을 꽤 챙겨줬다.
이진영의 부모님도 영월 근처의 시골에 귀농하셨고 그 덕에 그는 박민영을 더 친근하게 여겼다.
“아뇨,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쫓는 거라.”
“뭐, 어때? 나도 딱히 사건은 없어서.”
박민영은 신입사원이고 이진영은 부장급이라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말이 경감이지 시골 작은 군에서는 경찰서장을 맡기도 하는 계급이었다.
박민영은 땀을 닦으면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거 현장으로 가보자고. 나도 궁금했거든. 마침 근처 아닌가?”
이 괴상한 사건의 현장은 마침 여기 중화대루 골목이었다.
박민영의 파트너 로봇 치도리의 현장 검증과 감식은 완벽했다.
EV-1은 해당 감식 사진을 프로젝터 모듈로 현장에 쏴줬다.
비 오는 당시 생생한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군청색 경찰 우비를 입은 박민영의 모습과 신고자 그리고 처참한 사체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을 지나가던 취객이 머리가 으스러진 피해자를 보고 우웩하고 구토를 했다.
이진영은 경찰뱃지를 보여주며 꺼지라는 시늉을 했고 취객은 영어로 짭새가 어쨌다는 둥 욕을 사라졌다.
“기이한 사건이군. 이브이 어때?”
– 치도리의 초동 감식견해에 동의합니다. 고성능 엑소슈트 혹은 로봇이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럼 둘 중 하나가 마이크로웍스 개발부장을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거군.”
– 둘 다 아닐 수도 있고요. 현장 증거만으로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에어컨 실외기에 심장을 올려놓는 건 인간으로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사이보그일 수도 있지.”
EV-1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 쪽이든 심장을 올려놓은 놈은 인간은 아닙니다. 그리고 팀장님과 일하다 보면 꽤나 이상한 우연이 겹치는 것 같습니다. 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연? 기연이면 무슨 천년설삼이나 신비한 무공을 손에 넣는 건 아니겠지? 이왕이면 항룡십팔장, 구음신공 이런 거 배우고 싶은데?”
박민영은 참지 못하고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진영과 EV-1의 대화는 가만 듣고 있다 보면 이게 2인조 만담 코미디인지 아니면 업무 대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 기묘한 우연입니다. 이 사건의 신고자와 탈영병 사건의 목격자가 동일합니다.
정말 기묘한 우연이었다.
“팀장님, 탈영병은 뭡니까?”
“어쩌다 보니 해군 탈영병이랄지 실종자 수색 요청을 받아서 말이야.”
이진영은 짧게 유인영 소령부터 사건을 설명해줬다.
박민영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팀장님, 탈영병이랑 이 사건 연관 있는 걸까요?”
“고건 모르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난민사무소의 등록주소는 이미 제가 갔다 왔습니다. 벌써 이사 갔다고 하더라고요.”
“이사 갔겠지. 하지만 말이야. 다 아는 수가 있지.”
이진영은 업소녀에게 받은 종이쪽지를 마패처럼 보여줬다. 박민영은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지구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이진영과 박민영, EV-1은 종이쪽지에 써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브이, 이곳과 나는 악연이 있나 보다 야.”
x2 인천의 안전을 위해 아자아자.
희망빌라.
하필 여자는 전에 정 대령이 눈속임용으로 폭파시킨 그 희망빌라에 살고 있었다.
이곳도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임시 원룸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페어차일드는 불과 몇 주 만에 모듈식 공법으로 이런 신축 원룸들을 양산해냈고 희망빌라가 폭파된 자리에도 뉴 희망빌라가 들어서 있다.
워낙 정 대령이 깔끔하게 폭파했는지라 기반공사를 위해 건물을 헐 필요도 없었다.
이진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때 백헌강이 도구로 쓴 로봇을 체포할 때처럼 원룸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새 건물의 산뜻한 냄새가 이곳이 월미도 난민지구가 맞는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름이이.”
이진영은 먼저 빌라의 우편함부터 살폈다.
난민들도 새로 등록되면서 돈을 버는 사람이면 세금을 내야 했다.
물론 이 여자는 불법 윤락업 종사자라 세금을 낼 리가 없었지만, 원래 수사의 첫 단계는 우편함부터였다.
우편함은 광동어 교민 소식지와 화장품 팸플릿이 꽂혀 있을 뿐 깨끗했다.
옛날 희망빌라의 그 더러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그때 봤던 우편함에는 누렇게 바랜 퇴거 안내문이나 전기료 체납 통지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진영은 여자에게 온 팸플릿들을 살피면서 2층 끝방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안쪽에서 안 들릴까 싶어 문을 두드리려고 보니 문이 열려 있다.
“…….”
이진영은 EV-1에게 권총을 받아서 겨눴고 박민영도 잽싸게 권총을 뽑았다.
이진영은 가지고 있던 모나미 153 볼펜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쪽을 살폈다.
문을 조금만 열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이 냄새는 신축 빌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결국 네 말이 맞았다. 이브이. 그냥 둘러보려고만 했는데…… 자꾸 사건으로 연결되다니.”
원룸 안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는 머리가 원룸 문쪽으로 향해 있었고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 창문 밖 저격입니다. 일격에 머리를 맞았고 입사각으로 볼 때 건너편 옥상 건물 위. 솜씨가 뛰어납니다.
여자는 까만 네글리제 속옷 차림이었고 이마에 정확히 총을 맞아 뒤통수로 뼛조각과 살점이 방바닥에 부채골 모양으로 튀겼다.
“두말할 것 없이 프로의 솜씨군. 근데 이브이, 형사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대사 아무리 클리셰라곤 하지만 너무 많이 나오지 않아?”
– 그렇죠. 아직 현장경험이 부족한 파트너는 ‘프로의 솜씨라고요?’하고 놀라면서 말이죠.
박민영은 여전히 비위가 약했다.
그는 우웩하며 헛구역질을 하고 이진영에게 말했다.
“티, 팀장님. 우욱, 이 여자가 귀타귀 사건의 목격자라면 그 사건과 관련 있을까요?”
“아니, 이건 엑소슈트 모듈이 아니야. XDR 같은 대구경이면 머리에 이런 구멍이 뚫릴 리 없어. 그리고오, 애기아빠 네가 쫓는 사건이랑 관련은 없을 것 같다.”
“왜죠?”
“시간이 문제지. 귀타귀 사건의 범인이 목격자인 이 여자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겠지. 딱 봐도 이건 입막음이야. 이 여자는 어제 납치된 사람을 본 유일한 목격자니까.”
이진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수습이나 나머지 일들은 중부서의 정복경관이 알아서 할 것이다.
“박민영. 난민대표부에 연락해 둬. 난민등록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공평한 수사였으니까.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군.”
새롭게 구성된 난민대표부는 엄정한 사건 수사를 교환조건으로 내걸었고 난민이 당해도 예전처럼 쉽게 사건을 종결할 수 없다.
만약 이 사건을 그래도 묻었다간 이걸 빌미로 또다시 잠잠했던 난민사회가 들끓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 사건 역시 살인사건으로 중부서에 바로 배당되었고 강력부장이 대응팀에게 사건을 배당할 것이다.
* * *
이진영과 박민영은 다시 중부서로 되돌아왔다.
프랑소와즈가 이진영의 주머니에서 딸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왔다. 이진영은 공을 집어 던지고 접의자에 앉았다.
부하 형사 하나가 컵라면을 들고 지나가다 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진영 팀장님, 들었어요. 난민 한 명 죽었다면서요?”
“어, 부장님이 곧 배당할 거야.”
“오, 제발 우리 팀만은 차출하지 말아 주세요.”
이진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프랑소와즈가 물어온 방울 공을 다시 벽에 던졌다.
그는 특별대응팀장이었고 동시에 작은 강력부장으로 필요에 따라 각 팀 전체 혹은 팀원을 차출할 수도 있었다.
팀장급들은 왠지 강력부장보다 이진영에게 더 설설 기었다.
이진영은 프랑소와즈와 놀아주면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윤숙희가 소식을 듣고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팀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특수부대 실종사건 탐문하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니? 하여튼 팀장님은 폭풍을 부르는 형사라니까.”
“어, 윤 여인. 뭔 짱구 극장판 애니 제목 같은 소리는 그만 해주겠나? 아무트은. 보아하니 골치 아픈 사건이니 44팀 소관이 될 것 같아.”
벌써 난민대표부에서 사람이 한 명 나와서 대뜸 한국어로 따지고 있었다.
강력부장은 진땀을 빼면서 대표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대표부 사람은 ‘또 난민이 죽어도 무시할 거냐!’면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라고 난리였다.
예전 같으면 난민이 방벽을 넘어 중부서까지 올 수도 없었다.
이진영은 대표부 사람이 호통을 치는 걸 보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새삼 느꼈다.
“팀장님, 그럼 팀장님은 그 의문의 체포조가 여자를 죽였다고 보시는 건가요?”
“오, 고마워. 근데 뜨거운 커피는 좀…….”
이진영은 박민영이 가져다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서는 업소용 대형 선풍기가 프로펠러 비행기처럼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열기가 빠지지 않아 머리가 띵해졌다.
“팀장님, 누가 죽인 걸까요?”
“의문의 체포조. 여자를 죽일 동기는 현재로서는 그놈들밖엔 없잖아?”
“입막음이라는 거군요.”
어느새 이진영의 주변에는 44팀, 23팀, 11팀 등의 주요 인물들이 몰려들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윤숙희가 말했다.
“입막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제 유인영 소령이 말한 사건과 관련 있는 거 아닐까요? 만약 그 사건이 여자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단순실종이나 군무이탈 아니라 납치라는 거잖아요?”
“그래, 아직 근거가 빈약하긴 하지만……. 여자를 죽이고 어제 누군가를 납치한 놈이 유인영 소령이 말한 새신랑도 납치했다면 말이지.”
유인환이 말했다.
“납치요?”
“어, 동명상의 업체의 또 다른 언니야가 또 다른 특수부대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납치되는 걸 봤어.”
“근데 왜 특수부대원을 납치하는 거죠? 설마 육군이 소콤인가 통합 작전사령부 출범을 방해하기 위해 그러는 걸까요? 점수가 높은 사람을 납치해간다는 거 보니까요.”
“육군이? 왜 육군이 그런 무리수를 둬? 증거를 잘 인멸하면 몰라도 한 명이라도 놈들의 손에서 빠져나왔다간.”
“바로 개망신이죠. 육군이라면 같은 집안인 국방부를 압박하거나 아니면 벌써 청와대에 줄을 댔을걸요?”
심봉근이 녹초가 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고 바로 윤숙희가 반박했다.
“하지만 미스터 심. 청와대 주인이 바뀌었잖아? 국방부도 더 이상 육방부가 아니라는 거지. 아마 그 집안도 청와대 눈치 보고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