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88
제288화
어찌 되었든 지금의 이진영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진영의 전처는 이유진을 은근슬쩍 맡겼다가 계속해서 이진영이 맡아두고 있었다. 이진영도 처음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만날 술을 사 와서 봉천동의 야경을 보며 잠드는 생활보다 아침부터 두 아이들과 북적거리며 아침을 먹고 일상을 보내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빠왔다아.”
빌라 문을 열자 한승아와 이유진이 다다다 달려 나와 이진영에게 안겼다.
“아저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좀 빨리 끝났어.”
다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리면 아이들이 실망할까 봐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세 사람은 가사 로봇이자 보육 로봇인 로비와 두식이가 요리해준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로 저녁을 먹었다. 꽤 풍성한 저녁이었다.
이진영은 아이들이 TV를 보며 스르르 잠이 들 때쯤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로비, 잘 부탁한다.”
–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일교차가 꽤 커서 낮에는 그렇게 더웠지만, 밤에는 제법 가을 날씨 느낌이었다.
이진영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카잔 점퍼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
탄환라인을 타면 인천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되돌아가는 열차는 만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월미도에서 겪을 여러 가지 쾌락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진영은 막상 사람들이 북적이는 하행선에 타고 나니 더 외로움을 느꼈다.
“경찰 그만둬야 하나?”
딸내미들을 두고 다시 직장으로 향하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경찰을 그만뒀다간 한승아의 치료비도 그렇고 다시 제 엄마 곁으로 돌아갈 이유진의 양육비도 문제였다.
기본소득으로 두 아이를 건사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으음~~”
이진영은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중부서에 도착했다.
‘브라보 아빠의 인생’이라는 클라이맥스를 부를 때쯤 갑자기 카메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진영 특별대응팀장님이십니다! 반가워요! 경찰 24시 김, 수, 영 리포터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감사해요.”
“아빠의 인새엥.”
“예? 그게 무슨….”
“브라보. 브라보오.”
이진영은 뜬금없이 브라보만 연발하고 그냥 휘적휘적 중부서로 들어가 버렸다.
리포터 김수경은 급히 촬영 로봇 쪽으로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녹화 끊으라는 시늉을 했다.
경찰 24시 취재진들은 중부서 정문뿐 아니라 강력전담부 행어 안에도 좍 깔려 있었다.
“이 근육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근육입니다.”
유인환은 런닝셔츠 차림으로 ‘으으으’하면서 팔과 가슴 근육을 뽐냈다. 이진영은 한심하다는 듯 유인환을 바라보다 접이자가 줄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잠복 근무가. 있습니다. 오, 오늘의 잠복은, 자세한 사항은. 걱비사항, 아니 극비사항으로 말씀 드, 드릴 수 없습니다.”
천하의 윤숙희도 카메라 앞에서 말을 마구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진영은 픽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PD 양반은 윤숙희더러 자연스럽게 하라고 주문했지만 어째 녹화를 하면 할수록 윤숙희는 로봇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니 볼만하네요. 팀장님 음료수요.”
“오우 박민영이 땡큐. 근데 너는 인터뷰 안 하냐?”
“이미 했어요. 인천의 안전은 우리가 책임진다. 아자아자.”
이진영은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그는 박민영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고 인터뷰를 하는 심봉근을 쳐다봤다.
심봉근은 느끼하게 머리를 넘기면서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하고 있었다.
저 괴인은 안 그래도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면 전국에서 여자들의 전화가 올 거라 자신만만했다.
이진영은 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부인님께선 뭐라셔?”
“인터뷰요? 경찰 24시 이야기하니 영상 편지에 자기 사랑한다는 말은 꼭 빼먹지 말래요.”
“아니, 그거 말고. 중부서에 온 거.”
박민영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직도 난리에다 바가지 한마당이죠, 뭐. 저 이거 가지고 다니는 거 아세요?”
박민영은 지갑을 펼쳐서 아내와 아들 사진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라는 교회 전도지 카드를 보여줬다.
이진영은 쓴웃음을 짓고 음료수만 홀짝였다.
“걱정 마라. 점수 다 채우면 내가 전출서 바로 써줄게. 어쩌다 여기로 발령받아서는 원.”
이진영은 음료수를 마시다가 퍼뜩 뭔가를 깨달았다.
“아, 너 설마 전출점수 때문에 귀타귀 사건을 쫓는 거냐? 그거 해결하면 점수가 굉장히 높을 테니…….”
박민영도 음료수를 홀짝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처음에는요. 근데 뭔가 좀 이상한 사건이라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하기는. 괴상한 사건이긴 하지. 피해자의 신분도 그렇고. 그게 아마 너의 ‘첫사랑’일 거다.”
박민영은 ‘첫사랑’이 무슨 뜻인지 안다.
형사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씩은 있었고 그걸 중부서에서는 첫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참, 거 끔찍한 첫사랑이네요. 제 진짜 첫사랑은 와이픈데요.”
“흐흐흐, 대외용? 아니면 진짜?”
“둘 다요. 근데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업무. 부하직원의 멘탈케어도 상사의 임무거든.”
이진영은 음료수 캔을 청소 로봇 근처에 톡하고 집어던졌다.
“그리고 개인적인 호기심. 우리 서 만해도 기혼자는 손에 꼽을걸?”
기본소득자들은 결혼을 잘 하지 않았고 형사들은 동거라면 몰라도 밤낮이 없고 집에도 잘 들어가지도 못하는 생활 사이클 때문에 이혼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시골 경찰이 마냥 편한 건 아니다.
모든 경찰이 다 가종보험 지급에 수당을 많이 주지 않는다.
박민영도 시험을 통과한 시골 경찰이긴 하지만 위험수당이 적어서 ‘나종 대우’ 보험에 월급도 적었다. 그가 형사를 지원한 것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왜 결혼했냐고 물으시진 않는 건가요?”
“인간은 인생에서 한두 번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있기 마련이지. 난 그게 부사관 짱박는 거랑 결혼이었어.”
박민영은 씩 웃었다.
“아무리 지겹다고는 해도 가끔 결혼생활이라는 게 그립지 않으세요?”
“내가 왜? 원아웃으로 충분해.”
박민영은 나이트 게임이 중계되는 TV를 바라봤다.
“설마 세 번 결혼하시게요?”
“박민영군, 야구는 27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경기네. 하지만 내 경기는 원아웃으로 끝났어.”
박민영은 왠지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팀장님 슬슬 이동해야겠네요.”
“그래, 나도 작은 강력부장으로 슬슬 교통정리를 해야겠다. 젠장할, 나도 내가 교통정리를 해야 할 날이 올 줄은 몰랐어.”
이진영은 몬스터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자자. 다들 이제 작업 시작해야 하니 고만 촬영하시고 잠복하러 출발합시다! 당직을 서는 양반들은 당직서고 야참 라면 맛있게들 드시고! 아, 탕비실에 꽁쳐 놓은 튀김우동 그거 내 거니까 먹는 놈은 내 반드시 찾아내서 불의 응징을 하리라!”
이진영의 개입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한 방에 정리되었다.
오늘 잠복은 44팀 23팀, 11팀 합동 잠복이었고 30여 명의 수사원들이 북적거리며 이동할 준비를 했다.
“저…… 이진영 팀장님. 저희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아까 이진영의 녹화 따는 걸 실패한 김수경 리포터였다.
“저기요 저희 지금 잠복 가는 거거든요? 헬기에 방송 카메라까지 달고 가면 범인이 참 좋아라 하겠습니다.”
“그, 그럼 카메라 로봇 한 대만으로요.”
이진영은 그녀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다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커트 입고 따라오실라고요?”
“가, 갈아입으면 되죠.”
“아뇨, 수사원들의 얼굴도 보안이라.”
“고건 모자이크하면 되죠. 아, 그리고 서장님이랑 강력부장님도 적극 협조해준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오 그분들한테 연락을 드려야…….”
김수경은 핸드폰을 꺼냈고 이진영은 바로 말렸다.
“아, 알았어. 알았어요. 대신 촬영 로봇 한 대만. 딱 한 대만 따라가는 걸로 할게요.”
“오케이, 한 대만.”
김수경 리포터는 권력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그녀도 경찰 24시 촬영을 하며 나름 경찰밥(?)도 얻어 먹어보고 현장에서 꽤 구른 모양이다.
이진영은 할 수 없이 김수경의 동행을 허용했다.
30여 명의 수사관들이 일제히 중부서에서 빠져나왔다.
그나마 경찰 24시에서 헬기로 이 모습을 찍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이브이, 오늘 날씨가 좀 안 좋다.”
– 예, 비 예보가 있습니다.
“아, 꼭 잠복만 하면 비가 오더라. 뭔 시발 이별 공식도 아니고.”
– 우비 챙길까요?
“아아아니. 됐어. 나는 지휘부, 커맨더, 체어맨 그리고 무전기를 잡은 남자 아니겠냐. 구르는 양반들은 뒤에 앉아계신 우리 경관 나으리들.”
이진영은 무전기를 점검하며 씩 웃었고 현장에서 구를 수사관들이 뒤에서 야유했다.
오늘 잠복 작전은 성범죄 전문 수사관 윤숙희가 입안했다.
연쇄 성폭행범 발바리는 좁은 골목길에서 붉은 옷을 입은 인간 여자만 노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찰 중앙 인공지능은 44팀의 현장탐문수사와 그동안의 범죄 현장을 분석해서 한 곳에 함정을 팠다.
차량은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인 구인천항으로 향했다.
중화대루 근처는 건물이 싹 헐리고 주차장까지 들어섰지만 구 인천항에 가까운 곳은 아직까지 개발이 더뎠다.
고기를 잡던 난민들의 항의도 거셌고 웡꺼의 잔당이 숨어있는 곳이라 더더욱 그랬다.
웡꺼의 잔당 일부는 구 인천항에서 밀수선을 타고 북한이나 북중국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구 인천항으로 다가갈수록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해군은 여전히 난민들의 조업을 막을 수야 없었고 난민들은 온갖 물고기들 잡고 뒤처리까지 바다에서 했다.
그나마 오늘 작전이 벌어질 구시가지는 사정이 항구보다는 나았다. 이곳은 옛 소래포구의 상권을 빨아들여 값싼 회를 먹으러 온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길거리 곳곳마다 바닷물이 넘치는 수족관들로 가득했고 수족관 안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유인환처럼 회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이곳에서는 먹지 않았다.
횟값이 괜히 싼 게 아니다.
물고기의 품질도 품질이고 처리 과정 또한 로봇들이 처리하는 대형 수산업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전국에서 이곳으로 손님이 몰리는 이유는 월미도와 똑같았다.
로봇이 정교하게 생선살을 써는 것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요리사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게들마다 손님들이 미어터졌다.
곳곳에서 어서오세요-쳉쬔(請進), 쳉(請) 하는 호객꾼들의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이진영은 이어셋을 하고 일본식 튀김 텐푸라 노점에 자리 잡았다.
발바리는 활동반경을 넓혀 이 항구에서 9번이나 범행을 저질렀다. 아무래도 신흥동이나 구월동에서 포위망이 좁혀지다 보니 치안 상황이 안 좋은 곳으로 점점 밀린 것이다.
“客官, 你有冇特別願意呢他啊? (손님 양반, 특별히 원하는 네타가 있소?)”
이진영도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아, 네타(呢他)?”
일본어로 횟감이나 재료를 뜻하는 네타(ネタ)를 음차한 단어였다.
“冇特別嘅. 先前可唔可以飮哋酒啊? (딱히 없어요. 먼저 술부터 마실 수 있을까요?)”
주인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작은 일본식 술병과 기본안주 우엉, 고구마, 오징어 튀김 세트를 올려놨다.
광동어를 쓰는 난민이 한국에서 일본요리 노점을 열다니 생각해보면 꽤 이상한 장면이었지만 월미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