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89
제289화
이진영은 술을 홀짝이면서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제법이었다. 그는 맛간장을 조금 뿌려 오징어튀김을 먹었다.
주인장은 이진영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걸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포장마차 지붕을 후두둑 때리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근무만 아니라면 술이 미친 듯이 땡기는 분위기였다.
고소한 튀김 냄새와 간장 냄새 그리고 달큰한 일본 술 냄새.
이진영은 술 한 병을 다 비우지 않았다.
이어셋으로 수많은 형사들의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하필이면 붉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 모든 표적을 동시에 추적하고 있는 건 바로 EV-1이었다.
EV-1은 구룡성채 결전에서 이순신함의 함대방공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성능을 보여줬다.
수많은 미사일과 각종 화력병기들을 통제하며 웡꺼와 특별병과번호를 압도하는 모습은 EV-1을 알고 있던 이진영에게도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EV-1에게 고작 월미도 전역을 통털어 2백여 명도 안 되는 붉은 옷의 여인들을 쫓으라고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EV-1은 광학위장을 가동시키고 건물 위에서 모든 표적들을 실시간으로 브리핑해주고 있었다.
“이브이, 이상한 점은?”
– 있습니다. 까마귀1에서 포착했습니다.
술잔을 들던 이진영의 동작이 멈췄다. 그는 이어셋에 손을 올리고 EV-1에게 물었다.
까마귀 1은 오늘 작전을 위해 본청에서 지원해준 정찰용 틸트로터였다.
“어디지?”
– 팀장님이 있는 쪽에서 가깝습니다. 김수경 리포터를 한 명이 급히 쫓고 있습니다. 흉기확인했습니다. 회칼, 직전 범행에서 사용된 것과 비슷합니다.
“뭐야? 왜 그 여자를 쫓는 거지?”
– 갈아입은 옷이 붉은 샤아의 티셔츠군요. 기동전사 건담의 팬 같습니다.
이진영은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 수사원에게 알린다. B-3지구 방송국 리포터가…….”
갑자기 이어셋에서 삐잉하고 하울링이 울리고 이진영은 이어셋을 뺐다.
EV-1은 옥상 위에서 골목으로 뛰어내려 바로 이진영의 옆에 다가왔다.
– 누군가 재머를 작동했습니다. 군용 광역 재머입니다. 지금 11팀 그리고 23팀 일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군용 재머라고? 발바리 짓일까?”
– 글쎄요. 이런 패턴은 처음인데요? 재머를 누가 가동시켰든 김수경 리포터가 위험합니다.
김수경 리포터는 6시 내고향에도 자주 나오는 특산물 리포터이기도 했다.
잠복하는 형사들이 자꾸 화를 내고 떨어지라고 하자 그녀는 우범지대인 구인천항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산물 리뷰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PD와 방송국 놈들이 문제였다.
잠복근무 촬영은 그림이 잘 나오지 않았고, 마침 온 김에 경찰 24시뿐만 아니라 다른 특산물 프로그램의 인트로와 한 꼭지를 촬영하려고 한 것이다.
붉은 사야 전용 티셔츠를 입은 김수경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물고기가 퍼덕대면서 붉은 티셔츠에 물이 튀기고 김수경은 호들갑을 떨면서 활짝 웃었다.
방송 리포터도 대부분은 연예 기획사에 소속된 로봇이 많았다.
인간은 연기나 방송 영역에서도 철저히 로봇에게 밀렸다.
잘 조형된 로봇은 딥러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반응했다.
그 난다긴다하는 배우 로봇들 사이에서 살아남았으니 김수경의 실력은 알아줄 만했고 미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살짝 덧니가 튀어나온 치열과 살짝 좌우대칭이 다른 얼굴이 매력 포인트다.
특히 김수경은 가슴이 컸고 붉은 티셔츠가 젖으면서 묘한 색기마저 흘러넘쳤다.
발바리가 여자를 고르는 눈은 진품명품 저리 가랄 정도다.
놈에게 당한 피해자들은 전부 미인이었고 제각각 생동감 넘치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보통 강간범은 피해자의 미모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제압 가능한 사람들을 노리지만, 놈은 확고한 미적 취향으로 피해자를 고른다.
게다가 이놈은 윤숙희가 말했듯이 이제 단순한 강간범이 아니라 강간 살인범이다.
놈은 사람의 목을 잘라 수집하는 엽기 살인마로 변했고 지금 몇몇 피해자들은 머리도 찾지 못해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있다.
인천이 잠시 롱꺼 패거리들에게 점령당했을 때 뭔가가 놈을 변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만약 서가영 암살사건 전에 대대적인 병력투입으로 놈이 잡혔다면 놈이 살인마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수경은 분명 놈의 컬렉션에 들어갈 만한 멋진 수집품이었다. 누군가가 인파에 섞여 슬슬 김수경의 뒤를 따라간다.
이진영은 수상한 놈의 뒤를 바짝 따라가다가 김이 빠졌다.
EV-1이 위협 표적으로 찍었던 사람은 요 앞 일식집의 요리사였고 신문지로 싼 칼을 안쪽에 있는 요리사에게 들어 보였다.
“잘 갈렸어요! 그 칼갈이 정말 솜씨 좋더라고요!”
견습요리사는 신나서 신문지에서 칼을 꺼냈고 요리사는 손님 계신데 칼을 그렇게 잡는 거 아니라고 호통을 쳤다.
그 사이 김수경 리포터는 딴 곳으로 가 있었다.
그녀는 중화요리 포장마차에서 웍에 불꽃이 튀기는 걸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진영은 빗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비에 머리가 흠뻑 젖었고 그는 포장마차 한쪽에서 비를 피하며 머리를 털었다.
“제기랄, 무전기만 잡아야 할 팔잔데 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원. 이브이 다른 표적이나 잠입수사관은? 유선으로 알아봐.”
EV-1은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외부에 회선을 연결하고 유선망으로 상황을 확인했다. 아미타여래의 인천점거 이후 새로 생긴 수사규정이었다.
유선 연락망은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해킹과 재밍에 대비할 수 있다.
EV-1은 다시 주변의 감시카메라나 유선연결된 전임 인공지능을 검색하며 다시 상황을 관제했다.
– 아직 별 문제는 없습니다. 윤숙희 팀장님이 팀원들을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다 틀렸군. 공중전화 주변에서 이어셋을 끼고 다니는 놈이 왔다 갔다 하면 바보라도 알아채겠지. 재밍이라. 발바리 새끼가 이런 고급장비를 쓸 리가…….”
이진영은 젖은 담배를 물었다가 입에서 뗐다.
이런 고급장비는 고작해야 연쇄살인마 놈이 쓸만한 장비가 아니다.
“이브이, 동사장 영업장 근처의 통신장애기록 검색해 줄 수 있어?”
EV-1은 군소리하지 않고 어제 의문의 납치사건이 벌어졌을 시각의 통신장애 보고를 검색했다.
– 팀장님. 통신장애 보고가 들어온 곳으로 삼각측량을 해봤습니다. 정확히 동명상 사장의 업소를 중심으로 재밍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의…….”
– 확인해봤습니다. 이 근처입니다. 교묘하게 감시카메라와 감시자산을 피한 걸 보면 단순히 웡꺼 잔당의 재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브이, 윤숙희에게 현장통제권 넘긴다고 해. 그리고 근처에 있는 수사관들 소식 듣는 대로 재밍 음영지역으로 들어오라고 말해!”
이진영과 EV-1은 바쁘게 움직였다.
엽기적인 강간살해범을 잡으러 왔다가 뜻밖의 물건이 낚였다.
“자 오늘으은, 이곳 활기가 넘치는 구 인천항의 모습을 취재하러 왔는데요오오. 아, 잠깐 커트커트.”
– 김수경, 또 뭔 일이야?
마침 김수경의 눈에 이진영이 달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촬영 로봇에게 수신호를 해서 이진영을 찍으라는 시늉을 했다.
가까운 곳 빌딩 옥상에서는 EV-1이 광학위장을 작동한 채 빗속을 이동하는 게 보였다.
“예, 말씀드리는 순간! 중…….”
김수경은 이진영의 소속을 말하려다가 급히 말을 멈췄다. 경찰청과 협상으로 현장 형사들의 이름과 직함은 말하지 않기로 얘기가 되어 있었다.
“상황중계는 나중에 현장에서 녹음한 것처럼 입히고! 따라와! 좋은 그림이 나올 거야!”
김수경과 카메라 로봇도 빗속으로 이진영을 따라 달렸다. 이진영과 EV-1은 어느새 합류하여 옥상에서 옥상으로 붕하고 날아올랐다.
– 총성입니다. 육군 제식권총 G-57입니다.
총성은 요란한 편폭소리에 묻혔다.
마침 중국집 하나가 개업행사를 하는 건지 요란하게 편폭(鞭爆)이 연달아 터지며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탕탕탕. 이진영은 요란한 편폭소리 속에서도 정확히 총성을 구분해냈다.
– 전류확인 레일건입니다.
“이런 제기랄! 대체 무슨 일이 터지고 있는 거야! 육군 측에서 웡꺼 검거 작전하는 게 있는지 알아봐!”
지금 EV-1과 이진영은 재밍이 걸린 음영지역으로 들어왔지만, 제한적이나마 통신은 가능했다.
아무리 최신형 재머라고는 해도 아미타여래처럼 한 지역을 완전히 먹통으로 만들고 제왕처럼 군림하는 건 불가능했다.
– 육군도 감청기지에서 총성 확인. 움직입니다.
육군도 아니다? 그럼 통신음영지역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누굴까?
– 목표 광학포착. 글라스 모듈에 공유하겠습니다.
이진영은 잽싸게 선글라스 같은 글라스모듈을 착용했다.
EV-1은 노란색 테두리로 교전을 벌이는 놈들을 체크해줬고 희한하게도 한쪽은 테두리가 파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 광학탐지 왜곡 장비입니다. 하지만 항공드론과 까마귀1로 제가 보정 가능합니다.
이진영은 트리거 모듈을 뽑아 꽉 틀어쥐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면 저들은 죽는다.
그러나 아직 방아쇠를 당기기엔 일렀다.
저 두 명의 신원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
이진영이 잠깐 망설이는 순간 싱겁게 교전은 끝났다.
노란 테두리가 명확한 쪽의 목에서 퍽하고 살점과 피가 치솟아 오르며 앞으로 철푸덕 쓰러졌다.
이진영은 EV-1이 재보정해준 노란색 테두리를 노려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퉁퉁퉁퉁.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퉁퉁퉁하는 부시마스터 주포 소리를 새로운 비트의 음악이 시작되는 걸로 착각했다.
놈들은 퉁퉁퉁 소리에 몸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EV-1이 노린 총알은 정확히 들이꽂혔다.
퍽!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이진영은 분명 족발을 뜯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포탄에 맞은 놈은 멈추지 않았다.
놈은 이진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아니다.
방독면이나 헤드모듈? 그런 게 아니다.
아무리 방독면을 쓴 사람이라고 해도 어깨나 팔의 움직임을 보면 그 방독면 안의 사람이 느껴진다.
하지만 저놈은 값싼 로봇이 고개를 돌리듯 고개만 이쪽으로 돌렸다.
가장 결정적인 건 총에 맞았는데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진영이 가장 처음 떠올린 단어는 로봇이었다.
정 대령과 쎄잉꺼의 합작으로 수많은 살인 로봇이 양산되었고 지금 각지에서 사고를 치고 있었다.
정부는 살인 로봇들을 족족 잡아서 처리한다고 처리했지만. 놈들의 오염된 로직이 전염병처럼 다른 로봇들을 감염시키고 있었다.
결국 마이크로웍스는 일정 공정 이전의 로봇들은 모두 OS를 리셋시키고 리콜을 받고 있었고 정부도 살인 로봇들을 보이는 족족 수거해서 폐기처리해버렸다.
그렇다면 저건 로봇?
그러나 이진영의 감이 로봇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장갑차 주포 포탄을 맞고도 끄떡없는 인간을 이진영은 몇 번이고 마주친 적 있었다.
이진영은 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형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이브이! 특별병과번호일지도 몰라! 놈이 제석천이라면 비 오는 날은 가장 위험해!”
제석천.
놈의 번개 능력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구조로 그 어마어마한 전류를 한 방에 쏟아내는 건지는 몰라도 그 번개에 걸렸다간 아무리 EV-1이라도 끝장이었다.
방전설비? 접지? 그딴 건 그 어마어마한 전압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특히 인간은 고압선에 닿은 사람처럼 아마 새카맣게 구워질 것이다.
그리고 사방이 비로 축축하게 젖은 이런 날씨는 제석천이 활약하기 제일 좋은 날씨였다.
지금까지 다행히 제석천과 이진영은 비가 오는 날에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