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90
제290화
제석천이라는 말을 듣고 놈이 반응했고 EV-1은 전술방패를 펼치고 천수관음의 올레인지 저격에 대응했다.
저놈이 특별병과번호 여섯 명 중 한 명이라면 근처에 다른 놈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구룡성채 위에서 놈들이 보여준 합동공격은 그야말로 전장에서 떠돌던 전설 그 자체.
그때는 솔직히 유인환, 김대현, 윤숙희, 전상영의 예상 못 한 분전 덕분에 이긴 거지 EV-1과 이진영의 힘만으로 이긴 건 아니었다.
지금 이진영의 주변에는 EV-1 밖에 없었고 EV-1은 가지고 있는 모든 장비를 가동시켰다.
그러나 저 의문의 표적은 특별병과번호인지도 확실치 않았고 EV-1과 싸울 의도가 전혀 없었다.
놈은 죽인 사람의 머리통을 뭔가의 장치로 잘라내더니 바로 보병용 엑소슈트의 롤러대시를 가동했다
펑펑펑!
사방으로 마그네슘 가루가 들어있는 연막탄이 터지면서 비에 섞여 콩알탄이 터지듯 마구잡이로 터졌다.
이 연막탄은 간위예전쟁에서 레이더, 열화상 및 인공지능 탐지를 막기 위해 써먹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비가 내려서 더더욱 효과가 좋았다.
– 상관없습니다. 예측 사격하겠습니다.
둥둥둥둥. EV-1은 상공의 드론과 까마귀 1에서 오는 지도를 참고해서 놈을 포착했고 이진영은 트리거를 눌렀다.
부시마스터의 주포 소리가 빨라지자 비를 맞으며 술 취한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누구는 빗속에서 악전고투를 하는 판에 정말이지 팔자 좋은 사람들이었다. 절묘하게 록밴드의 공연이 시작되며 포 소리가 그 소리에 묻혔다.
바람에 펄럭이는 방수포, 사설구급회사의 간판, 낡은 콘크리트 벽이 부시마스터 포에 구멍이 뚫리거나 박살 났고 EV-1은 갑자기 포를 멈췄다.
– 군중 속으로 피했습니다.
“이런 제기랄! 근처에 있는 수사관들은!”
EV-1은 까마귀1의 항공지원으로 주변을 훑었다.
동시에 수많은 표적들이 좌라락 뜨면서 잠재적인 위협 표적으로 선택되었다.
아직 재머가 가동 중인데도 EV-1은 얼마든지 주변의 모든 정보자산과 공격무기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
잠복팀이 타고 온 장갑차의 포탑도 놈을 찾기 위해 돌았지만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주용 헤드모듈에 판초우의 차림이라 보통 때라면 꽤나 도드라질 특징이었지만 지금 그런 차림의 사람은
너무 많았다. 무슨 축제 기간도 아닌데 사람들은 다스베이더 헬멧이나 건담 RX-78 모양의 헬멧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이진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코앞에서 살인을 목격하고도 놓쳐버렸다.
“이브이! 돌돌이부터 불러! 현장감식한다!”
– 팀장님. 재밍, 그놈이 가동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방금 재밍이 해제되었습니다.
이진영은 빗속에서 잠시 놈이 사라진 대로 쪽을 노려봤다.
실로 대담한 범죄였다. 주변에 탐문수사를 위해 형사들이 좍 깔려있는 데도 놈은 사람을 죽이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 특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유인환! 사주경계! 이브이가 인상착의는 보내줄 거야! 그놈을 잡아! 사람을 죽였다!”
EV-1은 각 수사관에게 방금 교전에서 얻은 정보들을 공유하자, 곳곳에서 이진영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중부서 형사들은 이미 한 번 아미타여래에게 호되게 당했고, 특히나 완전편제된 44팀, 23팀의 형사들은 베테랑이 많아서 상부와의 연락이 끊겨도 알아서 잘 행동했다.
“까마귀1에 전달해. 현장엔 내가 가겠다.”
이진영은 EV-1과 함께 일단 사람이 죽은 현장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이진영이 아니었다.
“으윽…….”
박민영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시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파트너 로봇인 치도리에게 현장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했다.
“박민영, 괜찮아?”
“으윽. 예, 근데 그보다 팀장님. 이것 보십시오. 이거…… 귀타귀랑 같은 수법 아닌가요?”
시체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심각했다.
시체는 부검할 때처럼 쇄골을 중심으로 삼각형으로 가슴 부분이 절개되어 있었다.
“심장이 없어요. 그리고 목도.”
박민영은 잽싸게 귀타귀 사건 파일을 태블릿 컴퓨터에 불러들여서 시체랑 확인했다.
시체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모가지가 없었다.
이진영도 눈을 가늘게 뜨고ㅈ‘시체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돌돌이가 도착해서 이진영을 밀치고 사체를 훼손하지 말라며 성질을 부렸다다.
– 귀타귀 사건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목을 자른 건 예리한 메스 것이고 심장부터 뇌로 이어지는 혈관과 신경계 일부가 적출되었습니다.
“적출이라고? 그럼 이 짓을 한 놈이 의료관계자 혹은 의료 로봇일 수도 있다는 거군.”
-예, 소위 귀타귀 사건과 비슷하면서도 수법과 시체의 흔적에는 약간 디테일이 다릅니다.
“피해자의 신원은?”
EV-1은 잠시 데이터를 검색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 기묘하군요.
EV-1이 이런 반응을 할 때면 이진영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 로봇이 이렇게 말할 때면 언제나 골치 아픈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뭐가 또?”
– 신분증을 토대로 확인해 보니 피해자는 육군공안부 요원입니다. 블랙요원으로 추정됩니다.
이진영도 고개를 갸웃했다.
“옘병할, 또 육공이랑 한따까리하겠군. 그 친구들이랑은 태스크포스 13건으로 좀 친해졌나 싶었더니…….”
오늘의 총 작전지휘자는 이진영이었다.
특히 이진영은 육공요원이 위험한 걸 보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왜 육공요원이 여기 있는 거지?”
– 롱꺼 잔당의 체포가 가장 유력한 이유겠지요.
웡롱의 지휘관 배덕환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육군과 정보국에서는 모든 역량을 기울여 놈들을 쫓고 있었다.
특히 배덕환, 탁일항 등 후계자들뿐만 아니라 잠꺼 같은 군소조직의 보스들도 아직 잡히지 않았다.
잠꺼 같은 인물들은 구룡성채의 정상결전에서 판세가 어디로 기울지 간을 보고 있다가 고스란히 자신들의 조직을 건사해서 난민지구로 도망쳤다.
웡꺼의 밀수망을 이어받은 것도 사실 배덕환이라기보다는 잠꺼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직 난민 조폭과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육군 수사관이 이곳에 들어와 있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의문의 살인자가 하필 육군 수사관을 딱 집어서 공격하고 살해했다는 점이었다.
– 예리한 무기로 습격하고 목을 가져갔다는 점에서는 발바리의 최근 행적과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남자잖아?”
– 잠복경관으로 오인한 것 아닐까요?
시체에는 끊어진 이어셋 줄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요원은 나름 위장한다고 위장했지만, 이어셋이 드러나면서 딱 걸린 모양이었다.
“귀타귀, 발바리…… 지금 시점에서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군. 아무튼 잠복은 계속 진행하는…….”
그때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이진영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명 소리의 주인공은 김수경이었다.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가슴을 틀어쥐었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비명을 연달아 질렀다.
그녀는 이진영을 따라오다가 으슥한 골목에서 길을 잃었고 누군가에게 겁탈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김수경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EV-1이 롤러대시를 가동하고 사람들로 꽉 들어찬 대로로 내달렸다.
“이브이! 발바리 그놈일 거야!”
김수경은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골목으로 끌려 들어갔지만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가만 있어 봐. 내가 천국을 보여줄게. 어디서 이렇게 예쁜 여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담?”
김수경은 경찰 24시 리포터로 활약한 이래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다.
“아무나. 도와…….”
파드드드.
강간범은 전기충격기로 김수경을 지져버렸고 김수경의 육감적인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붉은 티셔츠를 벗기려던 순간이었다.
잠복에 최적화된 인간이 갑자기 강간범의 앞에 나타났다.
“넌 뭐야?”
왜소한 중년 사내를 본 강간범은 권총을 꺼내어 그쪽으로 겨눴다.
갑자기 나타난 흑기사는 바로 전상영이었다.
그는 키가 큰 강간범의 멱살을 잡고 깔끔한 업어치기로 더러운 바닥에 메다꽂았다.
강간범 입장에서는 총을 겨눴나 싶더니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머리에서 불꽃이 튀기는 기분이었다.
전상영은 패대기친 놈의 목을 무릎으로 누르고 잽싸게 수갑을 채웠다.
“그, 로이어. 뭐더라. 그…… 아무튼 미란다 고지야.”
어차피 피의자는 업어치기 한 판에 기절했고 미란다 고지를 들을 수도 없었다.
전상영은 기절한 김수경에게 다가갔다가 촬영 로봇 보고 일으켜 세우라는 시늉을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를 구해줘도 쓸데없는 신체접촉이 있으면 죄가 되곤 했다.
카메라 로봇은 김수경을 일으켜 세우면서도 오늘의 영웅(?)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았다.
강간범을 체포하고 잠복팀은 중부서로 철수했다.
기절에서 깨어난 김수경은 호들갑을 떨며 전상영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골목길에서는 누군가 혀를 차면서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짭새들이 있었어.”
놈은 회칼을 조심스럽게 허리춤으로 숨기면서 이진영 등 강력전담부 사람들을 노려봤다.
“시팔. 빨리 ‘그분’을 위한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데 일이 늦어지겠군.”
놈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경찰 24시를 방영하는 방송국은 소속 리포터가 경찰에 의해 구조되었음을 속보로 보도했고 모자이크 처리된 전상영의 모습이 모니터에 떴다.
중부서 형사들은 일제히 ‘워어어얼’하는 소리와 함께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진영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중부서의 모니터를 노려봤다.
엉뚱한 놈을 잡으며 발바리 검거도 실패했고 중간에 사건도 터졌으니 이래저래 잠복은 실패였다.
“나 참. 빗속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잡았는데 그놈 발바리가 아니라고?”
“예, DNA가 다릅니다. 관광객만을 노린 다른 강간범이랑 일치해요. 이번에도 전상영 선배가 업어치기 한 판으로 다 끝낸 건 줄 알았는데 말이죠.”
윤숙희가 툴툴 대면서 파일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녀와 44팀은 성범죄 스페셜리스트 플래툰이라 발바리 사건 외에도 다른 성폭행 사건 몇 개를 더 맡았다. 그 사건들 중 관광객을 상대로 한 다른 성폭행범이 잡힌 것이다.
“현장 방송까지 탄 마당에 그래도 다른 범인이나마 잡았으니 체면치레는 했군.”
“예. 불행 중 다행이었어요.”
“아무튼 수고했어.”
“후후, 수고는 이제부터 특장님이 하셔야지요. 화이티잉. 인천의 안전은 특장님이 지킨다. 아자아자.”
윤숙희는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이진영을 놀렸다. 어째 중부서의 유행어가 될 것 같은 멘트였다.
이진영은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발바리 검거 작전이 실패했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잠복 작전이 실패하는 거야 일상다반사고 서장이나 강력부장한테 한 소리 들으면 끝이다.
문제는.
“우리 육공이야! 왜 앞을 막는 거야!”
이진영은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육공 수사관이 왔으니 또 한 바탕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진영은 접의자에 걸쳐놓은 마른 티셔츠를 꿰입고 ‘특별대응팀장 이진영’이라 쓰인 명패를 옆구리에 끼웠다.
명패를 갖고 다니지 않으면 정복을 입지 않은 터라 방문객들이 잘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한 방에 이진영을 알아본 유인영 쪽이 비정상이었다.
“제가아 작전지휘자 이진영입니다. 우리 육공 요원들께서는 이리로 오시죠.”
육공 어쩌고 한 놈이 화를 내려고 했지만, 갑자기 뒤에 있던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뒤통수를 때렸다.
“이진영 팀장님은 경찰 부장급이고, 군대로 치면 중령급이다. 예의 차려라. 아, 이 팀장님. 오랜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