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93
제293화
그리고 서가영의 결정에 이세화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너구리굴 회의의 인맥이랄까?
“아아, 그래서 줄을 잘 선거라고 하신 거군요.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어도 쓸만한 놈들은 살아남으니까.”
이민호는 쑥스러웠는지 괜히 이진영의 팔을 툭하고 쳤다.
“아무튼, 오늘은 왜 또 바바리부대가 잔뜩 몰려오셨대요? 육군 요원이 죽은 그거 때문인가요?”
“뭐 그렇지. 수법이 비슷해.”
“수법이요? 뭐가 이렇게 겹쳐?”
“겹치다니? 아 너도 알고 있구나? 목이랑 심장을 뽑는 사건이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그래서 연쇄살인사건으로 보고 바로 대책본부를 편성했어.”
“근데 공안이면 몰라도 안보수사국장님이 오실 일은 아니잖아요?”
“말도 마라. 죽은 사람들 중에 전직 의원 나으리도 있고 현직 육군 장교도 있거든. 골치 아파 죽겠다.”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의원 나으리랑 육군이요?”
“청와대 쪽에서는 롱꺼 놈들의 구룡의 눈 계획에 아주 노이로제가 걸렸어. 혹시나 살아남은 탁일항이나 배덕환의 짓이 아닐까 하고 난리도 아니다 야.”
롱꺼의 계획은 구룡의 눈뿐만이 아니었다. 인천 일대의 지방의회나 단체장 선거에도 개입하려고 한 흔적이 사후에 발견되었다.
“롱꺼 잔당의 보복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고 있군요. 그래서 대책본부가 꾸려진 거고. 하여튼 높으신 양반들이란, 대책본부 그런 건 장식이라는 걸 몰라요.”
롱꺼 잔당의 보복? 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난민들은 등록한다고 등록했지만, 캐논볼 레이스 후 1차로 방벽이 무너질 때 많은 수가 부천, 부평 등 경기도 일대로 녹아들었다.
이젠 위조신분증을 가지고 미국에서 잡히는 경우도 있었고 비등록난민들도 퍼질 대로 퍼졌다. 또한 등록난민이라도 문신 같은 게 없는 한 롱꺼 패거린지 뭔지 경찰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롱꺼가 남긴 자객이 아직 남아있다고 하면 충분히 납득할만했다.
“뭐야, 이진영이. 왜 그런 표정인데?”
“아뇨. 롱꺼 놈들은 목을 자르고 심장을 적출하는 식으로 보복하지 않습니다. 놈들은 사람을 매달아 놓고 이마에 죄상이 담긴 종이쪽지를 붙여놓죠. 원래는 등 뒤에 깃발을 꽂아야 하는 중국 전통적인 재판형식입니다.”
“포청천 같은 거로군. 나도 드라마에서 본 적 있어.”
“예. 목을 자르고 심장을 꺼내는 형태는…….”
또 아즈텍 인신공양 이야기가 나올 대목이었다.
이진영은 EV-1이 보여준 아즈텍 그림들을 떠올리면서 진저리를 쳤다.
“아무튼, 이건 롱꺼가 할 짓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좀 더 알아봐야죠.”
이민호는 괜히 김빠진 표정으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민호는 수사원으로서 이진영을 깊이 신뢰했다.
이진영은 수건을 목에 걸치고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20XX년 엘지 트윈스 우승기념 모자였다.
“근데 너 지금 어디 가냐?”
“조사요.”
“그 꼴로?”
“그 양반 굉장히 아침부터 바쁘게 살걸랑요. 저도 조깅이나 시작해보려고요.”
이진영은 택시를 불렀고 이민호는 그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니가 조깅은 무슨.”
* * *
소드타워는 아무래도 소유자들이 부자들이라 벌써 복구가 말끔하게 되었다.
주변 산책로나 조경수들도 새로 정비되어 웡꺼 놈들이 먹자판을 벌였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천 전역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소드타워만이 안개 위에서 아침햇살을 받아 정말로 판타지 소설 빛의 탑처럼 번쩍였다.
이진영은 소드타워의 조깅로에서 음료수 두 개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한 여자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자는 트레이너 로봇과 함께였고 배꼽이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는 중이었다.
“어이고오. 오랜만이네요.”
“으아아아악! 깜짝이야아!”
여자는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난 이진영을 보고 글자 그대로 놀라 자빠졌다.
쓰러지기 전에 잽싸게 트레이너 로봇이 등을 받쳐줬고 그녀는 공주님처럼 트레이너 로봇에게 안겨있었다.
“이진영…… 씨?”
“좋은 아침입니다.”
마이크로웍스 한국 지사의 설계부 부장, 도은주가 험악한 표정으로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접때는 집에 찾아가도 잠만 자더니 왜 또 날 찾아온 거예요?”
이진영은 그동안 본의 아니게 도은주를 피했다.
롱꺼의 인천강점기 시절에는 내사를 받았고, 이후에는 태스크포스 13에 참여하느라 시간이 없었고, 그 뒤로는 이런저런 사건이 터지며 도은주와는 만나지 못했다.
“죄송죄송. 음료수 한 캔으로는 뇌물로는 좀 모자라려나요?”
“나아참. 새벽부터 뭔 난리래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이었지만 도은주는 이진영의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걸 보아하니 제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에요? 또 인공지능과 관련된 자문?”
이진영은 정곡을 찔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같이 뛰러 온 거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도은주는 이진영이 목에 건 수건을 보고 킥하고 웃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조깅이라기보다는 세수하러 나온 고시생 몰골이었다.
도은주는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느낌으로 음료수부터 마셨다. 그러자 이진영은 입고 있던 스카잔 점퍼를 그녀의 어깨에 척하고 걸쳐줬다.
“오올, 매너는 있으시네.”
“날씨가 제법 춥네요. 좀 걸을까요?”
“좋아요. 스피디, 먼저 집에 가 있어.”
트레이너 로봇 스피디는 쌩하니 소드타워의 도은주 자택으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은 잘 정돈된 산책로를 나란히 걸었다. 아직은 늦가을에 가까웠고 산책로의 이파리나 풀들은 싱그러운 초록색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음료수를 홀짝였고 도은주가 먼저 말했다.
“일단 거래조건부터 내가 정할래요.”
“예, 뭐 칼자루는 부장님이 쥐었으니.”
“그 부장님이라는 말부터 일단 금지.”
이진영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은주? 은주 씨?”
이진영은 괜히 부끄러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물어볼 건…….”
“또 하나.”
“하나 더 있어요?”
“이렇게 새벽에 찾아와서 물어볼 거면 저 말고는 답해줄 사람이 거의 없거나 당신의 다른 인맥으로는 어림없다는 거죠? 그럼 정보는 되도록 비싸게 팔아야지요.”
이진영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저녁 식사요. 아, 그놈의 아저씨 냄새나는 술집들은 안 돼. 당신도 경감이라 월급이 올랐으니 레스토랑이요. 아, 또 차이니즈 레스토랑도 안 돼. 분명 사기 치고 어디 굴다리 이상한 데로 끌고 갈 거라 안 돼. 근사한 프랑스 레스토랑이요.”
이진영은 괜히 모자를 고쳐 쓰며 표정을 숨겼다.
“알았어요. 프랑스 레스토랑. 데이트.”
“오케이. 좋아요. 뭘 묻고 싶은 건에요?”
이제야 간신히 본론으로 들어왔다.
“휴먼 사이버네틱스 기술이요. 지금 얼마나 발전한 건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흐흠. 사이보그 말이군요?”
“예, 마이크로웍스는 의수의 OS도 공급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도은주는 음료수 캔을 농구선수처럼 쓰레기통에 멋지게 골인시켰다.
“잘 아시네? 맞아요. 요새 시장이 부쩍 커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의족 의수들도 OS가 들어가야 더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전신 사이보그를 만들려면 몇 시간이나 걸리죠?”
도은주는 너무나도 황당한 질문에 입을 떡 벌렸다.
“시간이요? 며칠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각종 미세조절만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거예요. 아 연구 결과가 있을걸요?”
도은주는 암밴드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자세한 사례를 띄워줬다.
“팔다리가 마비된 후 재활치료하고 똑같아요. 의수, 의족이든 신체를 연결하고 그러려면 1년은 족히 걸리죠. 거기에 미세조정 절차는 또 따로 필요하죠.”
“아, 그건 나도 알아요. 사과를 쥘 때와 젓가락질을 할 때는 각각 다른 액츄에이터와 신경작용 반응이 필요하니까.”
그 대목에서 도은주는 이진영 쪽으로 손바닥을 뻗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승아가 곧 또 의체를 바꿔야 할 텐데? 승아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 또 멋대로 넘겨짚고 데이트니, 조건이니 뭐니 내가 괜한 짓을 했네.”
“아뇨, 승아랑 관련된 건 아니에요.”
“진짜요?”
“음…….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극비사항이지만 이진영은 짧게 계속해서 벌어지는 목과 심장을 적출하는 사건들에 이야기해줬다.
“그래서 사이보그를 의심했군요. 어제 발생했다는 사건이 전신 사이보그 수술과 비슷하니까. 근데 별도의 의체가 없었다고 했죠?”
“예, 이브이 녀석이 놈에게 다른 한 패가 있는지는 포착하지 못했어요. 근처 차량에 대기시켜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체를 미리 준비해도 의료용 밴 같은 걸로는 어림없어요. 골든타임은 10분이지만 전신의체로 연결하려면 보다 본격적인 수술용 설비와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필요해요. 그런 점에서는 저도 이브이나 메모리얼 병원과 의견이 같아요. 별도의 의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쇼크사할 거예요.”
“하루나 이틀로는 어림없다는 거군요.”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1시간도 못 버텨요. 당장 컴퓨터를 생각해봐요. CPU와 파워서플라이만 뚝하고 뽑아간다고 컴퓨터가 돌아가나요? 마더보드에 해당하는 몸이 있어야 해당 부품들을 유지할 수 있지요. 또 마더보드라고 모든 CPU와 호환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마더보드.”
“아 좀 너무 과한 비유였나? 아무튼 막 끼워 넣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회사에서도 신경괴사증이 오는 것이 인간의 인체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인간의 신체는 기계와 달리 융털의 운동부터 각종 부교감신경까지 쓸데없이 처리해야 할 게 많으니까. 예 기억하고 있어요.”
도은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CPU랑 파워서플라이를 아무 데나 갖다 박아도 구동이 안 되듯 ‘호환되는 소켓’이 필요한데 이게 또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당장 같은 인간의 장기를 이식하는데도 가리는 게 많잖아요? 혈액형, 이식적합도 등등등등. 그러니 사이보그라고 해서 뇌랑 심장만 박아놓으면…….”
“잠깐.”
이진영은 신나서 떠드는 도은주의 팔목을 잡았다.
“뭐라 그랬죠, 방금?”
“혈액형이나 거부반응이요?”
“아뇨, 그 전에.”
“CPU?”
“예, 맞아요. 소켓.”
이진영은 도은주의 팔을 잡고 뭔가를 깊이 생각했다.
“이건 가정인데 말이죠. 만약 사이보그용 임시 소켓을 만들었다면 말이죠? 생체기능을 일단 유지시킬 수 있도록 만든 더미 같은 거요.”
“사이보그용 임시 소켓이요?”
도은주도 들어본 적이 있는 발상이었다.
“컴퓨터를 예로 드셨으니까 그걸로 설명드리면…… 수리점에는 진단용 더미컴퓨터가 있잖아요. 임시로 소켓을 연결할 수 있는.”
“아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오빠 말은 임시나마 뇌와 심장을 연결하는 사이보그용 ‘유니버설 프레임’이 있냐는 거군요.”
오빠라고 주어가 바뀌었지만 이진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예, 바로 그거에요. 아무리 처치가 완벽해도 고작해야 5분 10분밖에 못 사는 모가지를 가지고 갖고 가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걸 꽂아서 구동할 수 있는 프레임이 있다면 또 다르죠. 컴퓨터 수리점처럼요.”
도은주도 흥미를 느꼈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서 한동안 뭔가를 생각했다.
“연구가 되고 있는 분야이긴 해요. 유니버설 프레임이라고…….”
“유니버설 프레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