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298
제298화
인간해방전선의 지도부는 이진영이 가져온 사진을 보고 으음 하는 침통한 소리를 냈다.
그들의 지도자와 같은 방법으로 죽은 시체들이었다.
“조작은 아닌 것 같군.”
“어때? 같은 방법으로 살해된 것 아닌가? 너희 지도자는 어떻게 죽었지?”
“같은 방법이다. 심장을 적출당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아니, 순서가 중요해. 먼저 심장을 적출당한 거냐? 아니면 목이 잘린 거냐?”
“심장 쪽을 먼저 당했다. 그리고 심장은 도서관 시계탑 위에 올려져 있었어.”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귀타귀 사건과 똑같군. 그럼 적어도 이 사건의 범인과 너희 대장을 죽인 범인이 같은 놈이라는 거야.”
이진영은 높은 에어컨 실외기에 놓인 심장 사진을 보여줬다.
“같은 수법이야. 누군가가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한 거다.”
“종교적인 의식?”
“나도 나중에 조사한 건데 심장은 하늘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아. 케찰코아틀이나 뭐 그런 거.”
“흠…… 그럼 우리 지도자가 광신도에 의해 당했다는 건가?”
“거야 증거를 봐야 알지.”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증거 있지? 영상, 사진 아무 거라도 좋아. 내가 오죽하면 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겠어?”
지도부는 한쪽 옆에 서 있는 학생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살해 당시 이렇게 발견되었나?”
지도부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영은 살해당한 지도자의 시체를 보고 흠하는 침통한 한숨부터 내쉬었다.
일단 지도자가 여자라는 것이 의외였다.
한국 인간해방전선 지부는 극렬투쟁으로 유명했고, 그걸 지휘하는 지도자는 남자일 거라는 게 경찰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앞섶이 풀어 헤쳐지고 봉긋한 가슴 사이로 심장이 적출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형사, 어떻게 생각해?”
– 귀타귀 사건과 같은 수법입니다.
“그래, 나도 네 생각과 똑같아. 도서관에 심장을 올려놨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진영은 그 이야기만 듣고 바로 안으로 들어올 마음을 먹었다.
지금은 인간해방전선이 아니라 호랑이 혓바닥에 증거가 있다고 해도 난민지구에 경찰투입을 막기 위해 증거가 필요했다.
“이봐, 근데 시체는 어디서 발견되었지?”
놈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지도자의 이동 동선 역시 당연히 극비였다.
“도서관 4층에서.”
“거기 카메라는?”
여학생 하나가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여줬다.
앞부분은 도서관 앞에서 벌어진 연설장면이었고 쓰잘 데기 없는 기계 자본주의자들을 척살하자 하는 계급투쟁론 설파 영상이었다.
이진영은 대충 동영상을 넘기고 문제의 장면으로 화면을 돌렸다.
학생들이 술에 취해 널브러지고 으슥한 밤 누군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학생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EV-1이 바로 뭔가 이상한 걸 찾아냈다.
– 팀장님. 우측 화면을 확대해보십시오. 광학 위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깃대가 흔들거립니다.
도서관 앞에는 수많은 러다이트 단체들이 깃발을 내걸었고 그 깃대 중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저건…….”
– 인간이 아닙니다.
“시발, 와호장룡이 따로 없군.”
수직으로 세워진 깃대가 대나무처럼 흔들거리더니 도서관 창문에 뭔가가 찰싹 달라붙는 게 보였다.
희미한 뭔가는 얼핏 보면 거미처럼 보였다.
광학위장 속에서 매니퓰레이터 암 같은 것이 슥슥 뽑혀 나오더니 앗하는 순간에 폭 30미터 밖에 안 되는 좁은 유리창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저거다!”
이진영은 확대된 화면을 보고 짝하고 박수를 쳤다.
“저게 너희들의 지도자인지 대장을 죽인 놈이다.”
지도부 놈들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도 범인을 잡으려고 계속 동영상을 돌려봤지만, 이 껄렁해 보이는 형사는 단번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저런 게 찍혀 있었다고?”
“하, 하지만 시간을 봐. 사망 추정 시각과 거의 비슷한 시간대야!”
지도부 놈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지금까지 경찰이나 특수부대가 무슨 수를 써서 지도자를 제거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한층 더 기괴했다. 저 거미처럼 움직이는 물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 팀장님. 마지막 병과번호일까요?
이진영은 아주 일순간 카메라에 담긴 놈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건 병과번호가 아니야. 그 빌어먹을 불상놈들이라면 주변 카메라를 먹통으로 만들어 놓고 움직였겠지. 놈은 노드 허브가 없이도 여럿 가지고 놀았으니까.”
새로운 적. 이진영은 거미처럼 잽싸게 움직이는 뭔가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한층 더 오싹했던 건 놈의 움직임이었다.
어젯밤 사람의 목을 따간 그놈과는 또 다르다. 그놈은 총에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다소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진영이 ‘붕어’냐 ‘잉어’냐 할 때 그 손맛 느낌이 바로 그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아무리 사이보그라도 0과 1로 이뤄진 인공지능이 아니었고 반드시 인간의 생체적인 반응같은 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저 거미 같은 뭔가는 전혀 인간적인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다.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샤샤샥 어둠 속을 고속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오직 효율에만 초점을 맞춘 공장 조립 로봇 같은 전임 인공지능을 떠오르게 했다.
“혹시…….”
이진영의 머릿속에서 퍼즐 하나가 맞춰졌다.
제이미 킴은 ‘어떤 인공지능’을 찾기 위해 브라운 개발부장이 월미도에서 얼쩡거렸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귀타귀에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곳 서울대의 인간해방전선 지도자 살해사건 역시 귀타귀 사건과 아주 유사했다.
“저게 귀타귀로군. 적어도 범인 하나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냈어.”
– 하지만 저것의 정체는 뭔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 형사, 자네가 잘 때 조사하긴 했는데, 자네 소속사에서 브라운이 어떤 인공지능을 찾기 위해 이동했다고 확인해줬어.”
소속사라는 말에 EV-1은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말했다.
– 그게 저거군요. 그럼 소속사 사장님의 말이 맞다면 저건 뭔가 독특한, 마이크로웍스의 개발부장이 쫓아다닐 만한 인공지능이군요.
“그래 로봇이야.”
쾅!
인간해방전선 지도부에서 누군가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두들겼다.
“그, 그럼 로봇에게 지도자 동지가 죽었다는 거냐!”
이진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면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라고? 이 거미 같은 뭔가가 그냥 너희들의 경비가 삼엄한 도서관까지 마실 왔다 갔다고 발표할 건가? 그리고 너희들은 딱 이용해 먹기 좋은 상황 아니야? 로봇이 지도자를 죽였다.”
“그, 그건 돈이 안 돼!”
얼떨결에 본심이 나왔다. 이진영은 어이가 없어서 허어하는 소리를 냈다.
이들은 로봇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공공 로봇을 잡아다가 잔인한 해체쇼를 하는 놈들이었다.
정작 그 위험하다는 살인 로봇에게 한국의 지도자가 피살당했는데도 그 사실에 굉장히 당황했다.
돈이 안 된다?
인간해방전선은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이미 도네이션을 받아먹는 식충이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크레딧이나 달러를 받아먹을 수 있는 ‘명분’이었다.
특히 한국의 인간해방전선은 반정부, 반난민 세력화되면서 세계적인 흐름에서도 약간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이들이 대번에 지도자의 죽음을 대한민국 정부의 암살이라며 성명을 발표한 것도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회에 불만이 많은 ‘라종인생’들은 모든 것을 정부나 난민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잊으려고 한다.
어찌 보면 대통령 인수위 눈치만 보며 참수 사건을 롱꺼 잔당의 짓이라고 몰아가는 경찰의 태도와 똑같았다.
“로, 로봇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이 역시 러다이트 테러리스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들은 로봇의 위험성을 늘 강조하면서 로봇들을 전부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들이었다.
“그게 유감스럽게도 캐논볼 레이스 때 살인 로봇이 많이 발생했었지. 이 거미 같은 녀석도 어쩌면 그때 만들어진 로봇일 수도 있고.”
“동지들, 이놈이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믿어서 뭘 하게요!”
인간해방전선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학생회 쪽은 좀 반응이 시원찮았다.
이제 인간해방전선의 지도자가 죽었으니 학생회 쪽으로 힘이 실리는 와중이었다.
“인간해방전선 동지들, 만약 정말로 살인 로봇이 죽였다면 이건 순교아닙니까? 대대적으로 선전해야지요? 지금 우리의 이상을 위해 일어설 좋은 때 아닙니까!”
“뭔 순교! 그건 돈이 안 된다니까! 정부에 대한 강경투쟁 노선으로 노선이 다 잡혔는데!”
“돈이라니요!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상 아닌가요!”
“뭔 개소리야! 돈이 없으면 너도 지금 쫄쫄 굶고 있을 거라고! 돈을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쳐!”
학생들의 이상론과 인민해방전선의 현실론이랄지 ‘생활감각’이 부딪쳤다.
어디서든 흔히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아직 사회에 나와보지 않은 학생들은 순수한 이상을 주장하고 생활의 풍파에 꺾인 사람들은 보다 현실적인 목표를 잡는다.
학생으로서 러다이트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더더욱 이상론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수경은 이 모든 분쟁을 전부 카메라로 담고 있었다.
그녀는 이진영을 따라와서 의외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 화면은 경찰은 물론이고 방송국에서도 덩실덩실 춤을 출만한 생생한 현장 화면이었다.
이진영은 모양새는 경찰 측의 인도적인 지원 사절로 들어온 거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점점 위험해졌다.
그때 이진영이 김수경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슬슬 내뺄 준비를 해야지요.”
“예?”
“숨 크게 들이쉬어요. 그리고 절대로 숨 쉬면 안 됩니다.”
이진영은 피스메이커를 꺼냈다.
피스메이커는 굉장히 구식 리볼버 권총이었고 심지어 리볼버 실린더가 옆으로 열리지도 않는다.
이진영은 총몸 오른쪽의 트랩도어를 열고 한 발을 장전했다.
탕!
초록색 탄두 안에는 압축된 최루가스와 연막탄이 내장되어 있었다.
열띤 토론을 벌이던 지도부는 우웩하고 기침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발광해대기 시작했다.
이진영은 뒤에 있던 학생회 놈에게 박치기를 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직 안에 있는 지도부와 학생회 놈들은 최루가스에 정신을 못 차렸고 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놈은 멍하니 이진영을 바라봤다.
이진영은 총을 쏘려다가 문을 지키는 학생이 어린 걸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피스메이커를 거꾸로 잡고 냅다 학생의 관자놀이를 후려팼다.
놈은 총을 들기도 전에 고통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슬슬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학생회 놈이 비상 사이렌을 울렸다.
“이브이! 관제 부탁해!”
– 예, 진입하겠습니다.
“착지 지점은 건물 안으로! 바로 들어와!”
– 착지 10초 전. 10, 9, 8…….
이진영은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 하늘 위를 노려봤다.
이민호는 이진영이 서울대로 향한 걸 알자마자 바로 츠바이핸더 프레임과 ‘숙자씨’를 실어서 이진영에게 보내줬다.
이진영은 정말 아무 대책 없이 서울대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를 믿고 있었고 EV-1이 강하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EV-1만 함께 있다면, 웡꺼와 아미타여래가 지배하고 있던 인천에 비하면 서울대는 그저 산책로에 지나지 않았다.
쾅!
창문을 깨부수고 EV-1이 실내로 들어왔다.
로봇은 바로 상부 해치를 열고 이진영더러 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김수경 씨! 당신 빨리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