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01
제301화
요새 중부서에는 때아닌 무협지와 무협영화 붐이 일었다. 벌써 단짝이 된 유인환과 심봉근은 서로 ‘유대협’, ‘심대협’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무슨무슨신공이니 반찬으로 나온 도라지를 ‘천년설삼’이니 하면서 잘들 놀았다.
심봉근이 살계를 열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숙자씨는 턴픽을 가동하고는 팔로 나무를 잡고 빙글 돌았다.
전장에서 자주 쓰는 응용기술이었다.
마치 긴팔 원숭이가 수평으로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는 것처럼 경량형 엑소슈트가 휙휙 정신없이 움직이더니 어느새 파일벙커를 한 놈의 엑소슈트에 박아 버렸다.
전에 상대한 위타천이나 제석천은 사이보그라서 문제였지만, 심봉근은 그때도 분명 위타천의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혔었다.
위타천이 일반인이었다면 심봉근은 애저녁에 놈을 죽이고도 남았다.
파일벙커가 반대쪽 장갑으로 꿰뚫고 나오고 피와 살점이 퍽하고 푸른 이파리에 튀겼다.
심봉근의 엑소슈트는 한 놈을 쓰러뜨리자마자 다른 놈의 파일벙커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허허허, 손속이 제법 맵구려! 허나! 아직 본좌와 파일벙커를 섞기엔 아직 모자란 실력이외다!”
심봉근은 자세를 낮춰 파일벙커를 피하고 무릎 관절 부분을 파일벙커로 찍어버렸다.
중장기병들이 주로 쓰는 공격법이다.
일단 엑소슈트는 중심을 잃게 되면 더 손쉽게 공격할 수 있다.
적은 몸을 허우적거리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 움직임이 문제였다.
심봉근은 놈의 옆구리를 팔로 잡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엑소슈트 쪽으로 받아버렸다.
심봉근과 인간해방전선의 엑소슈트는 둘 다 경량급이지만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
격투 로봇이 체중 배분을 이용해 궤멸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엑소슈트도 그런 공격이 가능했다.
엑소슈트끼리 부딪치면서 배터리팩이 망가져 푸른 불꽃이 치솟고 심봉근은 다리를 찍은 놈 옆구리 사이로 파일벙커를 뻗어 건너편에 있는 놈의 옆구리를 찍어버렸다.
“으아아아악!”
파일벙커에 얻어맞고 인간해방전선의 파일럿이 비명을 질렀다.
심봉근이나 한승우 급의 엑소슈트 파일럿은 굉장히 드물다. 심봉근은 간단하게 엑소슈트 세 대를 말아잡수시고 뒤로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 대구경 레일건이 내리꽂혔다.
채피2는 경량급이라 전면 장갑을 제외하고는 엑소슈트용의 레일건에는 약했다.
“칼싸움하는데 총을 쏘는 게 어딨냐아?”
그는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나무를 방패 삼아 여러 번 방향을 전환했다.
북경에서도 살아남은 이 여우 같은 중장기병을 테러리스트들이 쉽게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심봉근은 혼자가 아니었다.
EV-1은 식스팩 미사일을 발사해서 놈들을 견제한 후 드론을 날려버렸다.
EV-1이 장비한 드론들은 탁탑천왕의 드론과 비슷하게 미세조정이 되었고 수백 대의 작은 드론들을 움직여서 EV-1은 간단하게 엑소슈트를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가랑이 사이나 옆구리 등의 취약 부분으로 손톱만 한 드론이 파고 들어가 너트를 자르고 장갑을 분해해 버린다.
엑소슈트 한 대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나무를 들이받고 멈춰 섰고 다른 드론은 레일건이 분해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EV-1의 무기는 드론뿐만이 아니었다.
“버, 번개!”
심봉근 쪽으로 날아가는 무유도 로켓 쪽으로 매니퓰레이터 암을 뻗자 전기가 파드드득 뻗어나갔다.
제석천의 압도적인 번개 능력에는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EV-1은 주변의 전도체를 이용해서 번개의 벽을 만들었다.
마치 전기 파리채에 파리가 걸려 빠직대는 것과 비슷했다.
적 엑소슈트는 제발로 번개에 달려들어 감전되었다. 엑소슈트 내부의 방전 설비가 터져나가고 전기가 쇼트되면서 엑소슈트 전체에서 불꽃놀이를 하듯 퍼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파일럿이 상부 해치를 열고 나왔고 EV-1은 그쪽으로 라미네이트 포박탄을 발사해서 체포하는 걸 잊지 않았다.
EV-1은 경찰 로봇이었다. 지금 전장을 지배하는 와중에도 한계까지 이익혁량을 해내는 동시에 피의자를 다수 체포했다.
드론으로 부품이 무력화되거나 번개에 처맞아 기동불능이 된 엑소슈트에서 속속 파일럿들이 기어나왔지만 EV-1의 라미네이트 폼 탄을 맞고 몸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심봉근은 정신없이 고속으로 기동하면서도 EV-1의 전투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엑소슈트들을 몰아붙이고 하나하나 체포하는 모습은 츠바이핸더-도펠졸트너 프레임이 대단한 거라기보다는 그 OS인 EV-1이 대단한 것이었다.
“저 녀석이라면 단독으로 그 특별병과 어쩌고랑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이브이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
EV-1의 활약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의문이었다.
어마어마한 관제시스템은 물론이고, 때론 로봇 3원칙을 교묘하게 우회하기도 하고 로봇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했다.
12대의 엑소슈트들은 심봉근과 EV-1의 활약으로 하나하나 무력화 당하더니 마지막 기체가 심봉근에게 제압당했다.
심봉근은 레일건으로 롤러대시를 부수고 몸통 박치기로 들이받아 마지막 엑소슈트를 무력화시켰다.
심봉근의 숙자씨와 EV-1이 멈춰서고 순간 관악산 중턱에는 침묵이 흘렀다.
인간해방전선 놈들은 자신들이 가진 무기로 두 엑소슈트를 거꾸러뜨릴 수 없다는 걸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도망쳐어어어!”
이들은 EV-1에 근본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특별병과번호 놈들을 처음 봤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다.
제석천의 번개나 탁탑천왕의 드론 공격이나 모두 로봇이나 엑소슈트의 무기가 아닌 어딘지 신화적인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특별병과번호들의 전장에서의 임무 중 하나도 특작임무를 통해 적에게 유언비어와 공포감을 전염시키는 것이었다.
인간해방전선과 학생회 사람들이 하나 둘 산비탈 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기랄, 꼭 경찰 사이렌은 터질 거 다 터지고, 악당은 다 잡고 영화 다 끝날 때쯤 울린다니까?”
관악산 땅굴로 대피하는 학생들과 인간해방전선을 잡기 위해 속속 특수경찰인 블랙스와트가 강하했다.
심봉근과 똑같은 경량형 엑소슈트가 저고도에서 낙하산을 분리하고 쿵쿵쿵 떨어지고 경찰 로봇들도 강하하면서 놈들의 퇴로를 막았다.
이후에는 전투랄 것도 없었다.
인간해방전선 놈들은 산발적으로 총을 쏘긴 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있는지라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했다.
엑소슈트들과 경찰로봇들이 하나둘 놈들을 무력화시키고 포박해서 그 자리에 줄줄이 꿇어 앉혔다.
서울대 학내 역시 비슷한 풍경이었다. 곳곳에서 경찰들이 학생들을 무릎 꿇게 하고 미란다 고지를 하는 모습이 산 위에서도 보였다.
블랙스와트들은 용의자들에게 가차 없었다.
그들은 케이블타이 포박기로 몸이 묶인 사람들을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라미네이트 폼에 굳어져 있는 사람들의 뺨을 때렸다.
이진영은 한숨을 내쉬며 EV-1의 등짝에서 내려왔다.
“어이! 특경 아저씨들! 때리지 마요! 시발, 우리가 다 잡아놨는데 좋은 말로 하지 뭐하러 때려! 어차피 체포되면 빡세게 굴릴 텐데!”
이진영은 아직 어린 학생들을 후려 패는 특경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특경들은 이진영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따귀를 때리거나 여학생들을 희롱하기도 했다.
본청 특경들은 그동안 인천 함락이다 서울대 점거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가득 쌓여 있었고 범죄자 체포를 핑계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잔인했다.
아마 인간해방전선의 운동가가 아니라 난민이라도 특경은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이들은 범죄자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대를 당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브이, 주변의 엑소슈트 무장을 해킹해.”
– 경위서 정도로는 안 끝날 겁니다.
“그래도 증오가 이어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처맞거나 성희롱을 당하고 체포당한 사람들은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인간해방전선과 서울대 학생회는 인터넷에 자신들이 당한 사실들을 공유하며 증오를 공유할 게 뻔했다.
EV-1은 말없이 주변 엑소슈트의 무장과 상공에 떠 있는 틸트로터의 통제권을 받았다.
주변에 있는 무기와 각종 엑소슈트들은 이제 EV-1의 ‘이동포대’였고 이진영의 트리거모듈을 따라 척척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엑소슈트에 탄 특경들이 제일 먼저 이상징후를 발견했다. 미사일이나 레일건은 그들의 동료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휴대폰이나 엑소슈트 스테이터스 모니터 등 각종 창에는 아재나 들을 법한 트로트 노래가 울려 퍼졌다.
– 자아아~ 오늘도 산 타느라 수고하셨어오오오~~~다들 저어기 내려가서 막걸리나 한잔해요오오~~
특경들은 동작을 멈췄고 때아닌 등산 트로트 노래에 어리둥절했다.
“팀장님 진짜 막걸리 사주시는 겁니까?”
“얌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이진영은 심봉근의 뒤통수를 때리고 산 밑으로 내려갔다.
산을 내려 와보니 서울대는 봉려관 강당 건물을 제외하고 전부 함락되었다.
그쪽에는 가장 극렬 러다이트 계열인 문과대 학생회와 인간해방전선 지도부가 최후의 보루인 봉려관 강당에 몰려들어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있었다.
오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두말할 것 없이 이진영, 심봉근, EV-1의 활약 덕분이었다.
EV-1은 탈출로를 찾으면서도 3D 입체지도로 경찰들이 진입할 수 있는 곳을 전송해줬다.
그러나 이들의 공은 그냥 바로 묻혀버렸다.
– 얌마! 이진영이! 또 뭔 사고를 그렇게 많이 치고 다닌 거냐! 특경 애들이 니네 집에 항의하고 난리 났어!
“아이고. 뭘 또 그렇게 성원의 말씀을?”
– 근데 넌 애초에 왜 서울대에 간 거야!
“그게 ‘어깨 위의 천사’가 뭔가를 좀 알려줬거든요. 그리고 그 집안 정보력 과연 남다르더군요. 정말로 쓸만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참수 사건의 수사 방향은 이민호 국장님이 결정하시게 될 겁니다.”
이진영은 EV-1을 통해 바로 서울대에서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동영상을 보내줬다.
– 이진영, 이건 뭐냐?
“적어도 두 건, 하나는 인간해방전선 지도자 또 하나는 마이크로웍스 개발부장을 살해한 범인입니다.”
– 오케이. 알았어. 이걸로 내가 윗선을 설득해보지. 이거라면 스모킹건은 없지만 인간해방전선 놈들의 궤변을 아가리 닫게 해줄 수도 있겠군.
이민호는 본청 국장답게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인간해방전선의 다른 지부들은 계속해서 지도자의 죽음에 관해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있었지만, 이 동영상이 퍼지면 그런 논리는 힘을 잃게 된다.
– 아무튼 이진영이 수고했다!
“수고는 앞으로 국장님이 하셔야지요. 체포 투입은 막아주세요. 아직 서에는 풋내기도 많은데 이대로 월미도 굴다리에 들어갔다간 큰일 날 거예요.”
이진영이 전화를 끊었을 때 옆에는 김대현과 11팀 이시영이 서 있었다.
“하여튼 팀장님의 악운은 알아줘야 합니다. 어떻게 가는 곳마다 사건이에요? 그리고 그때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오시는 게 정말이지…… 나쁜 놈들은 얄미울 거예요.”
“얄밉기는. 김대현이, 너어는 점점 더 우리 강력부장님 닮아가는데?”
김대현은 씁쓸하게 말했다.
“어쩌면 은혜나 저나 팀장님의 그런 악운을 버티지 못한 걸 수도 있겠죠.”
김대현은 돌려 말했지만, 이진영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진영이 겪은 사건들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한 대사건들이었다. 트라우마가 생기고 현장을 떠나는 것도 이진영은 충분히 이해했다.
“임은혜는 잘 지내냐?”
“흐흐흐, 이번에는 본청 마스코트죠 뭐. 본직은 인공지능 관리과지만 말이죠.”
이진영은 비 오는 날 인형탈 머리를 질질 끌고 오던 임은혜를 떠올리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