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05
제305화
이 로봇의 살인사건은 발바리 사건처럼 옛 44팀에 배당된 사건 중에 하나였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잡혔어야 할 살인 로봇이 롱꺼의 3차 봉기로 흐지부지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다.
처리번호 8859213은 로봇 폐기장에서 입회경관을 죽이고 도망친 로봇이었다. 아직 잡히지 않은 살인 로봇은 있어도 처리장에서 도망친 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리번호 8859213은 도망치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감시카메라와 인공지능을 해킹하거나 박살 냈다.
살인 로봇의 모습이 담긴 건 김수영의 핸드폰이 유일했다.
박민영은 모니터로 다가가 심장을 쳐든 로봇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놈은 태양 쪽으로 쳐든 심장을 들고 있다가 주먹으로 짜부라뜨렸다.
피가 주르륵 쏟아져 로봇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장면은 ‘세례의식’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이놈은 심장을 박살 냈어요. 이 행동은 태양을 숭배하는 행동이 아니에요.”
그는 수사수첩을 펼쳐서 그동안 신화학 교수들에게 자문받은 걸 알려줬다.
“장기를 꺼내는 대상은 제사장인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창자나 심장 혹은 내장을 온전하게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이놈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물을 받는 쪽이에요.”
“제물을 받는 쪽?”
박민영은 인쇄한 아즈텍 그림과 세계의 각종 인신공양에 관련된 자료들을 보여줬다.
그림들은 심장을 꺼내거나 머리를 잘라서 어딘가의 제단에 올려놓았고 장기를 훼손하는 경우는 없었다.
제사장은 인신공양을 받는 대상에게 온전히 제물을 바쳐야 하기에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진영은 퍼뜩 그 대목에서 8859213이 죽인 경찰의 검시기록을 떠올렸다.
“그래, 그 경찰도 심장이 으스러진 조각이 근처에서 발견되었지. 제사장이 아니라 받는 쪽이라면…….”
EV-1이 대답했다.
– 신(神)이겠지요.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김수경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신?
로봇이 일반화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신을 믿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은 절대자나 법칙에 기대서 자신의 불안함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약 로봇이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고대인이 막연하게 상상한 신의 모습은 인공지능과 굉장히 닮았다.
로봇의 몸체가 없는 전임 인공지능은 EV-1이 무선으로 조종하는 것처럼 한국 인천에도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영국 런던에도 존재할 수 있다.
무소부재.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무소불위. 로봇과 인공지능은 프레임과 리소스가 닿는 한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
당장 로봇과 인간의 하이브리드인 아미타여래는 노드 허브를 심어놓고 인천 전체를 지배하지 않았는가?
로봇이 스스로 신이라고 자각한다면 로봇에 의한 인천 점거가 벌어질 수도 있다.
로봇은 마음만 먹는다면 현재 인간 생활 전체를 지배하고 인간을 인큐베이터 속의 아기로 만들 수도 있다.
지금 대부분의 인간은 로봇이나 인공지능 없이는 운전도, 요리도, 육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로는 지금도 기본소득자들에게 인공지능과 로봇들은 제때 밥을 주고 기저귀를 갈듯 청소를 해주는 어버이이자 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봇들은 세심하게 인간을 케어하고 주변 환경도 인간에 맞춰서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그뿐인가?
인간이 먹을 식량도 24시간 농장체계로 재배하고 입을 옷들도 24시간 만들어낸다.
이들이 스스로를 신으로 인식하고 인간을 버리게 되면 인간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도태될 수도 있다.
지금은 도네이션 받는 식충이에 불과한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많은 지지를 받는 건 바로 이런 근본적인 불합리 때문이었다.
인간은 로봇의 반란을 두려워한다.
도은주가 전에 로봇 3원칙을 두고 ‘지연전략’이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리고 캐논볼 레이스가 만들어낸 불합리가 또 다른 불합리를 만들었다.
자신을 신이라 여기며 인간을 제물로 받아 가는 로봇.
이진영은 흐음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브이, 이놈이 서울대 도서관의 그놈 맞을까?”
– 범행 수법이 일치합니다. 같은 존재에 의해 벌어진 소행으로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어쩌면 이 영상이 로봇의 첫 살인이 아니었을까요?
“라이즈 오브 머더러 로봇이라 그거지?”
아직 각 참수 사건의 디테일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또한 영상은 시간상으로도 가장 먼저 벌어진 참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놈이 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참수 사건의 범인이다?
이 역시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특히 서울대 도서관에 나타난 로봇의 형식번호가 남아 있다면 몰라도 ‘두 로봇이 같다’라고 주장하면 아마 인공지능 판사도 코웃음을 치면서 그저 정황증거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육공 요원 살해 사건이나 의문의 연속참수살해 사건이나 둘 다 중요한 대목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이진영은 으음하고 침통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안보수사국을 움직이려면 확실한 증거 ‘스모킹건’이 필요했고 정보국의 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려고 해도 역시나 증거가 부족하다.
각각의 참수 사건은 결정적인 퍼즐 조각이 전부 빠져있었다.
귀타귀 사건이 저 처리번호 8859213의 소행인지는 그저 정황증거밖에 없다.
사라진 육공 요원들과 특별병과번호와의 연관성 역시 문신이나 천도영 사건에서 드러났던 정황증거밖에는 없다.
“아무튼 육공 요원 피살사건은 이미 육공으로 이첩할 거고, 우리는 이거라도 쫓을 수밖에……. 23팀, 유인환 너희들은 주변 탐문으로 이 개자식의 동선을 좁힌다. 부장님과 상의해서 다른 팀들을 붙여줄게.”
귀타귀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면서 이 로봇의 검거 내지 파괴는 중부서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이진영은 17팀에 이어 중장비 범죄 대응팀인 31팀을 추가로 귀타귀 사건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귀타귀 사건을 최초로 신고받은 박민영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깜빡했다.
귀타귀 사건에서 박민영의 파트너 로봇 치도리는 분명 로봇 혹은 엑소슈트 두 대가 격투를 벌인 흔적을 발견했다.
귀타귀 사건의 범인이 처리번호 8859213이 맞다면 놈과 격투를 한 다른 놈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이진영도 그만 한 가지를 깜빡했다.
이미 수사에 투입되고 잊혀진 인원이 한 명 있었다.
* * *
전상영은 밤의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피우는 담배는 지금은 단종된 담배 올드리버였다.
겨우 며칠 사이에 가을 날씨가 완연해졌고 더군다나 월미도 근처는 바닷바람이 차가웠다.
그는 밤바람이 불어오자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며 거리 한쪽을 응시했다.
밤이 되자 월미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1호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 월미도 역에서 우르르 내려 거리로 나온다.
전상영은 그 인파에 섞여 소리소문없이 신난민방벽 근처까지 다다랐다.
사람들의 구성이나 입은 옷들은 각양각색 다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 손을 잡고 마치 디즈니랜드를 구경하러 온 것 같았고, 어떤 사람은 마약에 절어 퀭한 표정으로 마약 딜러를 찾고 있었다.
거기에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섞여서 노점거리는 북새통이 되었다.
공공 로봇들은 정신없이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관리하고 있었고 상인들은 금지된 호객행위를 하며 사람들을 불러세운다.
네온사인 불빛이 번쩍이는 거리 한복판의 풍경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북적거렸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세계 3대 우범지구 중 하나였고 여전히 난민 조폭들이 활개 치는 곳이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밝을수록 골목길은 더 어두웠다.
강도 하나가 총을 들고 골목 으슥한 곳으로 관광객을 끌고 왔다.
“Gimme everything!”
놈은 서툰 영어로 흑인 관광객을 협박했다.
이 흑인 관광객은 여행사의 안내만 믿고 무턱대고 술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녔고 비등록난민에게 붙잡혔다.
등록제도가 공정하게 시행되면서 죽을 맛이 된 건 웡꺼 등의 조직폭력배 잔당이었다.
이들은 등록소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바로 경찰에게 잡혀서 사형을 선고받고 1달 안에 죽는다.
그 탓에 범죄 양상은 롱꺼가 통치할 때보다 훨씬 더 잔인해졌다.
어차피 잡히면 죽을 걸 알고 있는 놈들은 물불 안 가리고 돈을 뜯어냈다.
비등록자인 이들은 인도적인 지원 따윈 받을 수 없었고 더더욱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다.
이 불운한 흑인 관광객 역시 그런 놈들에게 붙잡혔다.
술과 마약에 취해서도 관광객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바로 지갑과 핸드폰 따위를 넘겨줬다.
“Take off shoe!”
신발은 복수로 말해야 하지만 놈들은 슈슈라면서 흑인의 신발을 가리켰다.
관광객이 신은 신발은 에어조던 복각판이었고 그는 신발만은 빼앗길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웡꺼의 잔당은 비릿하게 웃으면서 총을 관광객의 머리에 겨눴다.
어차피 이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또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는지 편폭(鞭爆)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놈은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헤이.”
“打突兀啊! 呢個係……. (아이, 깜짝이야! 이건 뭔…….)”
권총을 든 손이 비틀리더니 어느새 웡꺼의 잔당 하나가 팔이 비틀려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놈의 동료는 어깨가 박살 난 동료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면서 자동소총 총구를 전상영에게 돌렸다.
그러나 전상영은 겁도 없이 자동소총의 총구를 잡더니 확 잡아당겼다.
소총이 놈의 손에서 휙하고 빠져나왔다.
전상영은 뺏은 소총을 타닥하고 휘돌려 총검술 차려총 자세로 잡고는 냅다 총구로 놈의 가슴팍을 찔렀다.
AK-99 소총에는 대검이 달려 있지 않았지만 화약식 소총의 총구는 쇠몽둥이였다.
놈의 갈비뼈 하나가 으스러지고 전상영은 개머리판으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뻑!
누워있던 관광객도 소리를 듣고 괜히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히 두개골이 부서지거나 목뼈가 부서진 건 아니었고 그저 개머리판으로 옆 이마를 때린 것뿐이다.
순식간에 웡꺼의 잔당 두 명이 바닥에 나뒹굴고 전상영은 AK 소총의 상부 리시버를 분리해서 노리쇠 뭉치를 일어나려는 놈의 등짝에 던져버렸다.
한 놈이 ‘아이요우’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엎어졌다.
전상영은 쓰러진 놈에게 다가가 케이블 타이로 놈들의 팔을 차례로 묶었다.
관광객들은 전상영의 솜씨에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 돈 해브 투 워리. 암 뽈리스. (걱정할 것 없다. 난 경찰이다.)”
여전히 구수한 영어 발음으로 전상영은 신분증을 보여줬다.
관광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관광객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유 뽁킹 하이? 끄리스탈 오어 위드? 오 노노노. 잇츠 일리걸 인 코리아. (시발, 당신 약에 취한 건가? 필로폰 아니면 대마초? 오 노. 그건 한국에선 불법이야.)”
관광객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전상영이 순식간에 제압한 두 놈을 보고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벗, 아이 해브 투 두 모어 임포턴트 잡. 쏘 롸잇놔우 아이 오버룩끄 유어 미스떼이크. 비웨어 오브 유어 비해이비어 인 디스 플레이스. (그러나 난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번만큼은 눈감아 줄게. 여기서 행동거지 똑바로 하도록.)”
역시나 관광객은 구수한 영어 발음을 듣고 역시나 재봉틀 바늘처럼 고개를 다다다 끄덕였다. 전상영은 만족한 듯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웡꺼 조직원을 체포한 후 전화로 신고해서 인계해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는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다시 거리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전상영은 거리와 하나가 된 것처럼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노점거리로 빠져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