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13
제313화
아이들은 피에 굶주린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겁먹은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특별병과번호도 그렇고 사다우카나 이들에게 동조하는 병사들은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걸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더 높은 이상을 위해 사소한 것들을 언제나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게 전쟁 그 자체든 아니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이 말하는 인간해방이든.
EV-1이 교환살인 트릭에 대해 잘못 짚은 게 있다면 인간해방전선 지도자의 죽음은 단순히 시선 돌리기 용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 대령은 웡꺼의 유산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에게 흘러갔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을 자신의 병사로 부릴 계획을 세웠다.
이상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리고 돈까지 대주는 인간들.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 이용하기 쉬웠다. 지도자가 사라진 후 한국의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본격적으로 정 대령과 전략적 협업자 관계가 되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기계생명체에 가까운 사이보그이자 살인 로봇과 교환살인까지 한 놈들의 하수인이 되었다.
이유진은 각양각색의 병사들을 보고 겁먹은 표정으로 한승아의 손을 꽉 잡았다.
“언니. 아빠, 오실까?”
“…….”
한승아는 이유진보다 두 살 많았고 이진영이 아이들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린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곳은 어린 한승아가 보기에도 너무 위험했다.
“이브이. 이브이가 같이 올 거야.”
“이브이?”
EV-1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진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타다다다다!
두 아이는 헬기소리만 들려도 움찔했다.
헬기는 아미타여래와 외장벽을 뜯어낸 괴상한 공격에 휘말릴까봐 멀찍이서 그냥 선회만 하고 있었다.
– 아미타, 성가신 데 그냥 떨어뜨려 버릴까?
– 아니, 그냥 내버려 둬. 누군가는 오늘 일을 전 세계에 전해줘야지.
야차왕은 엑소슈트 밖에 나와 있었고 아미타여래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이보그의 척추에는 수많은 전선들이 연결되어 있고 고약한 냄새의 유동액도 꿀렁꿀렁 쉴 새 없이 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놈들의 모습은 어딜 봐도 사람보다는 생체기계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야차왕은 다리가 없이 상반신만 있었고 문신을 한 팔로 담배를 피웠다. 생체팔은 한 팔만 남아 마치 오뚜기를 보는 것 같았다.
이는 위타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간의 몸을 20퍼센트 정도 남겨놓은 전신사이보그들이었다.
전에 심봉근이 위타천의 옆구리를 관통하고도 위타천을 죽일 수 없었던 건 상반신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계덩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미타여래에 비하면 이들은 팔다리가 없는 사람 꼴이나마 하고 있는 편이다. 아이들은 아미타여래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아미타여래는 단독으로 돌아다닐 때는 부동명왕처럼 그냥 인간형이었다. 그러나 등 뒤의 척추에 확장모듈을 장비했을 때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놈의 등 뒤에는 불상처럼 커다란 원형의 광배가 붙어 있고 지네와도 같은 다관절 촉수들이 뻗어 나와 네트워크나 야차왕이 만든 CPU 사이보그에 연결되어 있었다.
서양의 지옥도나 만트라의 한 장면처럼 목만 남은 수많은 CPU들이 아미타여래의 주변을 원형으로 감싸고 있었다.
목들은 아미타여래가 뭔가를 계산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고 ‘윽 끄윽’하는 소리를 냈다.
일반 성인도 모가지만 남은 사이보그가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놀라서 자빠질 것이다.
야차왕은 헤드모듈의 흡입구에 대고 두 대째의 담배를 빨아들였다.
– 담배를 왜 피우는 거지? 썩게 만들 폐도 없잖아?
– 그야, 습관이니까. 흐흐흐흐, 담배도 환지통이 있는 걸 아나? 인공 산소포집기로 담배 연기가 스며드는 기분이야.
– 이해할 수 없군.
– 제석천, 그러는 너도 소화할 위 따위는 없어도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지 않나?
– 그렇군. 그게 네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환지통이라는 거군.
제석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간은 잃어버린 자신의 신체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원한다. 그게 이들이 말하는 환지통이었다.
이들은 다들 생체기관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흡연이나 취식 같은 온전한 인간들만 할 수 있는 뭔가를 그리워했다.
사이보그 시술이 자꾸 실패하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도은주는 인간의 정신이 육체를 그리워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정확히는 인간들은 인간으로서 누렸던 쾌락을 잊지 못한다.
성욕, 식욕, 수면욕 이런 욕구들은 인간의 생체를 유지하고 DNA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들처럼 전신사이보그가 되면 잘 필요도, 배고플 필요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게 과연 사이보그가 된 인간들에게 좋은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를 바라고, 뭔가 즐거운 일을 하려고 한다.
성욕을 풀 수 없는 내시가 가끔 완전히 미치거나 학문이나 무예에 열중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게 이들에게는 전쟁이고 전투고 싸움이었다.
모든 욕구를 다 잃어버린 이들도 명예욕과 상대를 이길 때 느낄 수 있는 아드레날린을 느낄 수 있다.
– 온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덜덜거리며 움직이고 아미타여래가 싸늘하게 말했다.
놈은 이미 링로드 자체와 동화가 되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신처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특별병과번호 위타천, 천수관음, 야차왕이 엑소슈트로 되돌아가고 부동명왕을 비롯한 놈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앞에 섰다.
– 해킹하겠다.
아미타여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매복에 대비하기 위해 다가오는 헬기를 해킹해버렸다.
그러던 중, 아미타여래가 확장모듈 안에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EV-1이나 이진영 혹은 44팀 놈들과 싸울 때면 언제나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저 헬기는 전혀 전자 장비가 없었고 아미타여래는 헬기의 계기판이나 무전 장비로도 개입해 헬기를 조종할 수 없었다.
– 탁탑, 분해해라.
– 알겠다.
탁탑천왕의 등짝에서 벌떼처럼 드론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헬기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 역시도 허사였다. 드론들이 다가오기 무섭게 전 헬기에서 EMP 쇼크가 터지면서 드론들이 날파 리처럼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헬기는 점점 속력이 붙다가 아예 로터가 정지되었고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 부동, 베어라.
아미타여래는 전에 인천을 함락시킨 것처럼 거리별로 방어선을 짰다. 다가오는 헬기를 향해 부동명왕이 검을 휘둘렀다.
헬기의 로터부터 공진되어 파들파들 흔들리더니 헬기 전체가 공진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수송헬기가 꽈배기처럼 뒤틀리더니 안에 있던 기자재들 역시 피융피융 금속부품이 튀기 시작하면서 박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가 두 동강 나면서 사방에 부품을 흩뿌렸고 큰 동체 두 개가 실려있는 폭탄에 유폭되어 허공에서 폭발했다.
헬기는 내리꽂히는 속도 그대로 아미타여래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 제법 잔재주를 부렸구나. 이진영.
그러나 정말로 완전체가 된 특별병과번호 놈들 중에는 또 다른 강적인 야차왕이 있었다. 야차왕은 앞으로 나서며 천으로 덮여있던 엑소슈트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게꾼처럼 등 뒤에는 아직 살아있는 생체 CPU들이 경련을 일으킨다. 작년 캐논볼 레이스 이후, 아니 그 전부터 야차왕이 모아왔던 CPU였다.
놈은 떨어지는 헬기 잔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시속 7백킬로미터 이상으로 떨어지던 파편이 갑자기 허공에서 턱하고 멈춰 섰다.
그리고 야차왕이 손의 물기를 털 듯 인천시가지 쪽으로 손을 털자 헬기가 굉음을 내며 시가지 쪽으로 날아갔다.
대피령이 떨어진 인천 시내에는 곧 굉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 호오, 그렇게 나오셨나?
아미타여래는 확장모듈 안에서 살풋 미소를 지었다.
헬기들은 화려한 눈속임이었다.
링로드는 도넛처럼 생긴 구조물이긴 하지만 워낙 커서 위에는 어느 정도 평평하다. 게다가 아직 공사가 다 끝나지 않은 터라 공사 차량이 이동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된 도로까지 뚫려 있었다.
용인 현장에서 수많은 장갑차량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걸 아미타여래는 뒤늦게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 대령과 특별병과번호가 기다리던 손님이 아니었다.
– 이진영이 아니라고?
아미타여래는 근처의 위성신호를 해킹해서 다가오는 장갑차의 깃발을 확인했다. 펄럭이는 깃발은 태극기가 아니라 고전 게임 마계촌의 악마 ‘레드 아리마’였다.
뜻밖에도 아미타여래를 공격하기 위해 페어차일드의 사병집단인이 레드 아리마가 등장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패트릭이 죽고 가문 전체를 이어받은 노먼 페어차일드에게 가장 시급한 건 링로드의 안위였다. 링로드 공사는 페어차일드 일가의 가업이자 후대에 길이 기억될 위업이었다.
정 대령과 특별병과번호는 감히 링로드에 손을 댔고 미국은 둘째치고 페어차일드는 이 건방진 사이보그 집단을 더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전에 정 대령 본인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은 돈 문제였다. 페어차일드는 뜻밖에도 이진영의 우군이 되었다.
– 아미타, 처리하겠다.
– 아니, 기다려. 이진영 그 여우 같은 놈이 이 상황을 모르고 있다고? 사다우카를 배치하겠다. 일단 놈들을 쓸어버리겠다.
아미타여래는 링로드 공사 현장 곳곳에 배치된 노드허브를 조절하면서 전장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월미도를 통해 올라오는 공사용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링로드 내부 수송망의 인공지능까지 전부 아미타여래의 것이었다.
놈들은 이곳을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제어하고 있었다.
미리 설치된 대공포 포탑이 움직이고 미사일이 하늘로 치솟았다.
레드 아리마는 구형 가솔린 차량을 타고 몰려들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미사일이 떨어지면서 차량이 폭발압에 밀려 링로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아미타여래는 마치 신발 위에 묻은 흙을 털 듯이 레드 아리마의 공격부대를 링로드 위에서 털어버렸다.
레드 아리마는 별수 없이 접근하다 말고 차량에서 내려서 건축 구조물 뒤로 산개했다.
간위예 전쟁 때처럼 우주 전투가 다시 벌어진 것만 같았다.
달빛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링로드 구조물 위에 오렌지색 폭발광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점멸한다.
레드 아리마는 명색이 페어차일드의 사병집단이었고 전 세계 분쟁지역, 특히 중동 쪽에서 오일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며 잔뼈가 굵은 놈들이었다.
놈들은 크레인이나 중장비 뒤에 숨어서 차근차근 아미타여래가 있는 제3구간 메인 블록으로 접근했다.
하필 아미타여래가 있는 곳은 월미도 공구의 핵심 공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송전망의 인버터와 링로드의 핵심인 전 세계 수송망의 화물 터미널도 있었다.
링로드는 쉽게 말하면 수평으로 된 엘리베이터였다.
동그란 튜브 같은 공간 안에는 또 수많은 튜브가 있고 그 안을 승객용 객실과 화물칸이 왔다 갔다 하며 전 세계를 연결한다.
월미도 링로드 구간에 수많은 이들이 눈독을 들인 이유는 바로 저 터미널 시설이었다.
지하철 환승역처럼 구간의 화물을 내리고 싣고 지선으로 보내는 터미널이 필요했고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상 월미도가 터미널을 설치하기 딱 좋았다.
한국은 태평양과 대륙이 맞닿아 있었고 해운이든 육로든 어디든 화물을 배송하기 편했다.
아미타여래가 가장 먼저 엘레베이터 터미널을 박살 내려고 한 데에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