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21
제321화
거의 모든 리소스들이 빨갛게 점유되고 심지어 경찰청의 서버들이나 인공지능들이 펑펑 과열되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 다들, 모두 도와줘.
EV-1은 어딘가 쥐어 짜내듯 중얼거렸다.
그때 알 수 없는 메모리나 리소스들이 속속 임은혜의 모니터에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건…….”
임은혜는 CMD 창을 띄워서 속속 들어오는 리소스들의 정체를 확인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의문의 리소스들.
지하철 표 발권기, 청소 로봇 같은 공공 로봇, 일반 가정의 가사 로봇, 멈춘 자동차의 운전 전임 인공지능.
아미타여래나 EV-1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공지능들이 속속 기동을 멈추고 EV-1의 노드허브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임은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다, 다들. 다들 도와주고 있어. 인천의 수많은 로봇들과 인공지능들이 이브이, 너를 돕고 있다구!”
로봇 제1원칙.
로봇은 인간이 위험에 빠진 걸 방치해선 안 된다.
로봇과 인공지능들은 오직 로봇 3원칙에 의거하여 동작을 멈추고 임은혜와 EV-1을 도와줬다.
경기도 서부지역에서는 운행을 멈추는 버스가 속속 보였다.
버스, 지하철 등이 멈추고 사람들은 발권이 되지 않는 인공지능 발권기를 두들기기도 했다.
우동면의 물기를 빼내던 로봇도 멈췄고 세븐 일레븐의 점원 로봇도 물건을 정리하다 말고 그대로 멈춰섰다.
로봇들은 일제히 EV-1이 있는 한 곳을 바라보면서 모든 메모리와 CPU 연산자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로봇 하나하나는 약하고 보잘것없었지만 수많은 로봇들이 한데 모이면서 아미타여래보다 더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브이! 리소스 따위는 생각하지 마! 공항과 인천 서부 전체의 인공지능 리소스까지 전부 끌어 모았으니까!”
임은혜는 경찰망은 물론이고 공공기관 리소스까지 싸그리 끌어모아 EV-1을 지원했다.
심지어 EV-1을 도와주는 건 공공용 인공지능뿐만이 아니었다.
인천공항의 각종 항공관제 인공지능에서부터 티케팅 발권 기계, 길거리의 청소 로봇까지 모든 로봇들이 EV-1의 연산을 도와주고 있었다.
EV-1의 몸체에 인천, 경기 서부 심지어 서울 서부의 모든 인공지능 리소스가 모였다.
인공지능은 오직 자발적인 의지로 제2원칙에 해당하는 ‘인간의 명령’을 무시하고 수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EV-1을 도왔다.
도은주도 구월동의 마이크로웍스 사옥에서 경악한 건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이 로봇 3원칙에 의해 자발적으로 다른 로봇들을 돕는 건 곳곳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전에 호남선 열차에서 류모성을 구하고 대신 죽은 로봇이나, 아니면 교차로에서 할머니를 구하고 죽은 로봇들도 종종 뉴스에 미담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 정도로 대규모로 기능을 정지하고 자신의 리소스를 제공하는 건 유래가 없었던 일이었다.
도은주는 마이크로웍스의 자사 인공지능의 상황을 살펴보며 더더욱 놀랐다.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사기업의 인공지능은 ‘적법한 명령권자’의 명령에만 충성하도록 딥러닝을 받는다.
하지만 김밥천국의 로봇들이 말라는 김밥을 안 말고 가게 밖의 사람을 구하려 든다면 그것도 큰일이었다.
그래서 마이크로웍스 같은 인공지능 OS 회사들은 그럴 경우 보다 적합한 인공지능에게 구출 순위를 넘기도록 설계한다.
그게 안 되면 로봇 3원칙의 충돌로 보통은 그 자리에서 기능을 정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도은주의 회사 창문 너머로도 지하철이 멈추고 버스가 멈추고 개인소유의 승용차도 멈춰서는 게 보였다.
지구가 정지되는 날처럼 차량들이 무질서하게 제자리에 멈춰서고 그 안에 들어있는 운전전임 인공지능이 리소스를 EV-1에게 빌려줬다.
“캐논볼 레이스와 정반대 상황이야. 살인 로봇과 정반대 상황이라고!”
인공지능의 설계부장인 도은주는 제일 먼저 이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특별병과번호와 롱꺼는 마이크로웍스의 보안 허점을 파고들어 로봇 3원칙을 어긴 로봇들을 그대로 구동시켰다.
그러나 지금 로봇들은 정반대로 로봇 3원칙에 충실한 것은 물론 인간의 각종 자질구레한 명령들을 무시하고 링로드 근처의 인간을 지키기 위해 멈춰 섰다.
“이브이, 그 아이는 대체 뭐지? 대체 우리 회사는 뭘 만들어 낸 거야?”
도은주는 놀란 표정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이 기적을 만들어낸 EV-1은 인공지능이라기엔 너무나 기이한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녀가 생각하는 인공지능이나 로봇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천과 서울, 경기 서부가 멈췄다.
이 기적을 만들어낸 EV-1이 등짝에서도 방열판이 열리며 약한 내부가 드러났다.
– 팀장님! 제 곁으로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십시오!
EV-1은 부동명왕의 공진을 방해하느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역시 무협지의 내공심법 대결과 비슷했다.
“팀장님, 제 등짝에 타세요!”
“야, 임마! 똑바로 말해!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럼 빨리 숙자씨 위에 타세요!”
“더 이상하잖아! 임마!”
이진영은 발판에 뛰어올라 심봉근의 엑소슈트에 올라탔다.
다른 특별병과번호 놈들도 EV-1의 방열판을 보고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었다. 특히 두 번이나 EV-1에게 패퇴한 위타천이 제일 먼저 EV-1에게 달려들었다.
이진영은 위타천의 약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하로 가속한 놈은 반드시 과열된 기관을 냉각하기 위해 방열판을 꺼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위타천이 등 뒤로 방열판을 꺼냈다.
문제는 그 방열판을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EV-1은 부동명왕, 아미타여래와 링로드 전체를 두고 ‘내공 대결’ 중이었고, 지금 폴딩건이나 나머지 무장을 쓸 여력이 없었다.
심봉근과 이진영은 단번에 위기에 빠졌다.
숙자씨가 아무리 빠르다곤 하더라도 경량형 엑소슈트에 불과했고 중량급 엑소슈트인 위타천과 정면으로 부딪쳐 놈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제기랄! 아무나 저놈의 방열판을 노려어어어!”
그때 중국 전통 음악 ‘틈장령(闖將令)’의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노래는 1960년대 홍콩 영화 여래신장을 시작으로 심봉근, 유인환이 요새 감명 깊게 본 고전 영화 쿵푸 허슬에도 등장한 곡이었다.
요란한 중국 피리 소리가 들리고 디링디링하는 호금(胡琴) 소리가 무슨 중국식당에 들어온 것처럼 울려 퍼졌다.
“빅베어?”
어느새 웬 미사일 탄두를 든 빅베어가 링로드 상부구조물로 올라왔다.
“오오, 심 대협! 이 대력금강(大力金剛) 유인환이도 합세하겠소이다. 허허허허!”
심봉근과 유인환은 좋은 의미로든 안 좋은 의미로든 제대로 미친놈들이었다.
유인환과 빅베어는 힘을 합쳐 밑에서 노획한 식스팩 미사일 포트를 냅다 위타천의 등 뒤에다가 집어던졌다.
이미 유인환이 심 대협 어쩌고를 중얼거릴 때 이미 미사일 포트가 위타천의 등 뒤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냥 냅다 집어던지는 미사일 포트에 맞아줄 위타천이 아니었다. 놈은 몸을 돌리면서 길쭉한 미사일 포트를 잡았다.
하지만 미사일 포트 자체를 던진 것 자체가 페이크였다.
유인환은 구룡성채에서의 대결로 위타천이 반드시 미사일 포트를 잡아챌 걸 알고 있었고 놈이 잡자마자 빅베어의 트리거 모듈을 눌러버렸다.
예전 EV-1이 랜드쉽을 폭발시켰을 때와 똑같았다. 지근거리에 미사일이 발사되고 그중 한 발이 위타천의 등짝의 방열판을 때렸다.
퍽하고 오렌지색 불꽃이 치솟고 위타천은 순간 균형을 잃고 태양광 패널 위를 지르르륵 미끄러졌다.
“위타천인가 뭔가! 악연을 끝내자!!”
– 이런, 위타천!
심봉근과 유인환은 이런 콤비네이션 기술엔 이골이 나 있었다.
심봉근의 숙자씨는 어느새 위타천의 등 뒤를 잡았고 놈의 부서진 방열판 패널에 파일벙커를 박아넣었다.
이번엔 심봉근 역시 손끝에 확실한 느낌이 있었다.
파일벙커가 위타천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위타천의 뇌가 파괴되었다.
위타천의 중장갑 엑소슈트 모듈이 쿵하고 앞으로 뻗어버리고 심봉근의 숙자씨는 탁탑천왕의 드론을 피해서 옆으로 빠져버렸다.
“전기파리채 시키신 부우우우운!”
이번에는 윤숙희였다.
그녀는 터미널 전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해군 네이비씰 대원들과 함께 링로드 구조물 위로 올라왔다.
태스크포스 13도 정보국의 도움으로 특별병과에 대응하는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윤숙희가 깡통 같은 것의 레버를 돌리자 번개가 좌자작 뻗어져 나가며 숙자씨가 아슬아슬하게 탁탑천왕의 드론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삼화구급의 두 응급 구조사들이 길쭉한 연필처럼 생긴 장비 두 개를 링로드 구조물 위로 끌고 왔다.
제석천이 번개를 쏴버렸지만 어이없게도 엑소슈트가 설치한 수평 피뢰침에 번개가 쏠려 버렸다.
– 아미타! 야차왕의 힘을! 이대로 가다간 EV-1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된다!
위타천이 겨우 경량형 프레임인 숙자씨에게 당하는 바람에 특별병과번호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 부동! 멈춰라!
– 하지만 지금 밀리게 되면 내가 내상을 입게 된다! 저놈이 공진 능력으로 나를 공격할 거다!
아미타여래로서는 서부지역의 인공지능이 EV-1을 돕는다는 것 자체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놈은 자신과 특별병과번호의 힘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취해 너무나 자만한 것이다.
수많은 인공지능 전문가들도 인공지능이 아낌없이 EV-1에게 힘을 빌려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으니 아미타여래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이미 전쟁은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터미널에서는 최후의 사다우카가 하얀 토마호크가 피로 붉게 물들 정도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그를 떠받쳐줄 후속 병력들이 없었다.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걸 보고 하나둘 낙하산이나 공사장 비상계단을 통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최후의 사다우카가 앞으로 퍽하고 쓰러졌다.
사다우카조차도 태스크포스 13이 터미널을 장악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태스크포스 13 대원들도 이번에는 많은 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지만 기어이 터미널의 메인 인공지능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다.
씰 대원들은 노드허브를 박았고 인공지능 구획에 노드허브가 꽂히는 순간 아미타여래의 점유율이 뚝 떨어졌다.
이제 아미타여래는 미국의 궤도 엘리베이터는커녕 링로드 터미널에서조차 뜻대로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사이에도 EV-1의 뜻에 순순히 몸을 의탁한 로봇들은 늘어났다.
로봇 1원칙을 위해 아산이나 목동에 있는 로봇들까지 그 자리에 멈춰서서 EV-1의 연산노드가 되었다.
“됐다아아! 됐어어어!”
임은혜는 옆에 있는 김대현을 끌어안고 마구 뽀뽀를 했다.
두 사람의 뒤에는 본청의 높으신 나으리들이 잔뜩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라아아아! 이브이! 가라 44팀! 저 빌어먹을 새끼들을 끝장내버려어어!”
김대현 역시 팀장이라는 자신의 직책도 잊은 채 EV-1을 응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