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23
제323화
– 이거이거, 힘든 일은 저에게 떠넘기시는 군요.
이진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총격을 받고 펀치나 번개를 맞으면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아직 농담할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공진 대응 장비를 잃어버린 EV-1이 무슨 수로 야차왕이 가진 머리통들을 흔들 수 있단 말인가?
– 이브이이이이! 스피커 시설이 있어! 터미널! 우리가 도울 테니! 공진주파수는 네가 설정해줘!
보다못한 임은혜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링로드의 설계도를 보다가 쓸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링로드는 행사용이나 방송용 스피커 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잘만하면 스피커모듈로 공진을 일으킬 수 있었다.
– 건방진 것들! 아미타! 스피커 시설을 업데이트해라!
오셀로의 판이 거의 뒤집힌 지금 아미타여래는 이제 야차왕의 수족에 지나지 않았다.
놈은 야차왕의 명령을 따라 스피커 시설들을 업데이트해줬다. 하지만 처리능력에 있어서는 EV-1이 한 수 위였다.
아미타여래가 스피커 시설과 공진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이 EV-1은 뒤로 물러서서 스피커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야차왕이 이동하자 마치 항성계 하나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놈이 보호하는 탁탑천왕과 아미타여래도 어쩔 수 없이 야차왕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EV-1은 이미 스피커 모듈에 다다랐고 아까처럼 링로드 전체를 쩌렁쩌렁 울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야차왕이 아니었다.
놈은 능력으로 띄워놓은 미사일 두 발을 휙휙 표창 날리듯 날려버렸다.
쾅!
거대한 스피커 지지대가 박살 나고 EV-1은 그만 스피커에 깔려 버렸다.
이번에는 파일벙커가 붙어 있는 오른팔이 스피커에 으스러지면서 EV-1은 더 이상 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때 괴력의 유인원, 아니 유인환이 등장했다. 그는 빅베어와 함께 스피커를 들어 올렸다.
“이브이! 빨리이이이이!”
빅베어의 팔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퍽하고 액츄에이터가 터졌다.
핏줄이 전선 케이블처럼 도드라진 유인환은 안간힘을 쓰면서 스피커를 떠받쳤다.
하지만 EV-1은 제대로 깔려버렸고 배 쪽 프레임이 스피커와 뒤엉켜 버렸다.
EV-1은 어쩔 수 없이 프레임을 포기했다.
등 뒤의 척추에 있는 모듈이 분리되면서 숨겨져 있던 어빈 프레임이 몸을 일으켰다.
쾅!
유인환이 스피커를 놓는 것과 동시에 일반 휴머노이드 크기의 어빈 프레임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 유 팀장님! 케이블을!
“오우케이이이!”
쾅쾅!
또다시 야차왕이 미사일을 날렸지만 빅베어가 앞으로 돌진하며 미사일에 몸을 날렸다.
“빅베어어어어!”
유인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 괴력의 사나이는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잡아서 되는 대로 집어 던져버렸다.
하필이면 또 부동명왕의 칼날이 스피커 근처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칼은 스위치가 눌러져 있었고 깡하고 야차왕이 띄워놓은 물건에 꽂혀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그 약한 진동만으로도 야차왕의 ‘항성계’ 한 축이 후두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끈이 떨어진 것마냥 사람 시체며 미사일이며 온갖 물건들이 떨어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폭발에 미사일이 떨어지며 기폭했고 그 밑에 떨어져 있던 로봇팔이 퉁하고 튕겨 나가면서 탁탑천왕의 머리에 꽂혔다.
그야말로 럭키펀치였다.
놈의 두뇌 캐니스터가 박살 나고 탁탑천왕은 드론이나 로봇을 조종해서 자신의 몸을 떠받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놈은 앞으로 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리고 놈의 죽음을 상징하듯 등에 탑처럼 쌓여 있던 팰리컨 무장박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놈의 ‘탑’이 무너졌다.
– 이, 이런 탁탑!
야차왕은 굉장히 당황했다.
자신의 능력 안이라면 동료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이없게도 폭발로 인한 럭키펀치로 탁탑천왕이 죽었다.
위타천, 부동명왕, 탁탑천왕.
간위예 전쟁에서 손발을 맞추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동료들이 하나둘 죽어간다.
중국의 봉신공정이나 살인 로봇들도 감히 죽이지 못한 특별병과번호가 오늘은 줄초상이 나고 있었다.
야차왕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놈이 화를 내자 놈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가지들도 일제히 눈썹을 찡그리고 뭐라뭐라 중얼대듯 입을 뻐끔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EV-1의 어빈 프레임에 스피커의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서부의 전체 인공지능이 가세한 연산 능력은 대단했다. EV-1은 스피커 시스템만으로 야차왕을 무력화시킬 계획을 세웠다.
x8 대공명(大共鳴)
우우우우웅.
아까 야차왕과 공진 능력 대결을 펼칠 때처럼 링로드 전체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용인이나 산동반도에 있는 사람들도 이 공명현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구슬픈 노랫소리처럼 진동이 EV-1의 지휘를 따라 울려 퍼지면서 이변이 발생했다.
펑!
공진 주파수를 이기지 못하고 두뇌가 담긴 캐니스터 하나가 터졌다.
그 캐니스터에 담긴 머리통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목에 힘이 축하고 빠졌다.
다른 머리통도 캐니스터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야차왕이 염동력으로 띄워놓은 물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이진영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허리춤의 머리통들은 각각 매달린 위치에 대응한다! 머리통이 박살 난 곳은 놈이 지배하지 못해!”
이진영은 간위예 전쟁에서도 이런 사소한 단서만으로 살아남았다.
엑소슈트 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야만 보이는 게 있었다.
빅베어가 쓰러지고 분노한 유인환은 공대공 미사일을 들고 놈의 능력이 닿지 않는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먹어라아아아아아앗!”
적어도 오늘 해낸 일을 보면 유인환은 유인원이란 별명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공대공 미사일이라지만 이건 공군 무장 로봇들이 네 대나 가세해서 들어 올리는 물건이었다.
유인환은 투포환 선수처럼 무거운 미사일을 잘도 던져버렸다.
미사일은 미사일이고 무게도 어마어마한 터라 그가 의도한 바와 달리 고작 10미터도 못 날아가고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미사일의 근접신관이 뒤늦게 작동하면서 미사일이 자폭했다.
공대공 미사일은 항공기에 조그만 타격이라도 주면 그만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근처에 접근하기만 해도 터진다.
미사일의 인공지능은 하필 야차왕이 띄워놓은 헬기 외벽을 항공기로 인식했다.
쾅!
야차왕의 옆에서 미사일이 터지며 파편들이 놈의 인간 수집품들을 덮쳤다.
놈은 염동력으로 본인이 치명상을 당하는 건 피했지만 파편 몇 발이 팔과 수집한 머리통에 꽂혔다.
야차왕이 아니라 아미타여래가 이들의 대장 역할을 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야차왕의 능력이 압도적이긴 했지만, 약점이 너무 많았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 머리통 캐니스터도 그렇고 공진 능력도 그랬다.
게다가 놈은 특별병과번호 놈들 중 가장 감정적이엇다.
놈은 공포를 느끼자마자 염동력의 방어한계를 더 좁히고 소라게처럼 좁은 공간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 야차! 뭐 하는 거냐!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
– 제석천! 퇴각해야 한다!
– 뭐라고 겁쟁이 같은! 뒤로 물러설…… 뒤! 뒤! 뒤! 뒤!
야차왕은 갑자기 깜짝 놀라서 뒤를 연발했다.
심봉근이 위타천과 악연이 있다면 제석천과 악연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태스크포스 13이 제각각의 분야에서 활약하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 ‘전상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 싫어, 그거 무서워.”
한 번 뒤를 잡을 수 있다면 여러 번 뒤를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뒤늦게 전상영을 발견한 제석천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 아이, 깜짝이…….
전상영은 제석천의 등 뒤에 폭탄을 던져버렸고 기폭스위치를 눌러버렸다.
그가 옆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것과 동시에 제석천의 프레임이 폭발에 휩쓸렸다.
저번 구룡성채 위에서는 용케 폭발을 견뎌냈지만, 그 악운이 이번에도 이어지지는 않았다.
플렉스 폭탄은 놈의 프레임 약한 곳을 파고들어 불꽃으로 그의 전신을 감쌌다. 오렌지색 밝은 불꽃이 치솟나 했더니 놈의 방전 장비가 유폭되면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번개를 다루는 제석천이라는 코드네임에 썩 어울리는 최후였다.
놈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번개에 휘감겨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빛났다.
꽈르르르릉!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면서 하늘로 푸른 전류가 방전되고 제석천이 있던 곳에는 하늘로 팔을 들어 올린 사람 모양의 형체가 새까맣게 탄 채 서 있었다.
제석천의 끔찍한 최후는 야차왕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제석천의 번개에 사람 머리통이 감전되어 즉사하고 놈은 더더욱 염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버렸다.
– 나, 나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퇴각하겠다.
– 뭐라고? 야차? 무슨 짓이냐!
– 다, 다 죽었어. 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새로운 시대의 밑거름은 너희나 되라고!
놈은 박살난 캐니스터를 전부 분리하고 자신만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특별병과번호는 아미타여래, 천수관음 그리고 야차왕뿐이었다.
야차왕이 빠지면 아미타여래와 천수관음만으로는 EV-1과 이진영에게 이길 가망이 없었다.
EV-1의 뒤에는 서부 전체의 인공지능이 있었고 아미타여래도 내상을 입기 일보직전이었다.
– 비겁한 자식! 물러나면 널 죽이겠다!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고 내분이 발생했다.
천수관음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올레인지 저격으로 야차왕을 노렸다.
타다다다다!
곳곳에서 화염 불빛이 뿜어지고 이진영은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저격수가 어디 숨어있는지 눈치챘다.
놈은 광학 위장을 작동시킨 채 링로드 구조물 안쪽에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태양광 패널이 박살 나지 않았다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심봉근! 저기다!”
이진영은 숙자씨의 상부패널을 탕탕 두드려 천수관음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아아! 꽉 잡으세요우우우!”
천수관음도 이진영이 자신을 발견한 걸 눈치챘다.
놈의 엑소슈트 팔라딘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심봉근 쪽으로 올레인지 저격을 했다.
DR-01 저격모듈의 탄자는 경량급인 숙자씨를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였다.
그러나 심봉근 역시 특별병과번호 정도는 안 돼도 제 1기병사단 정찰팀의 일원으로 북경에서 살아 돌아온 놈이었다.
심봉근은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붕하고 뛰어 올라 탄자들을 피하고 다시 착지하면서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 건방진 놈! 아미타여래의 관제를 받는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나!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이브이가 있거드으으은!”
심봉근의 고함을 듣자마자 천수관음은 소름이 좍 돋았다.
사실 그는 완전 사이보그라 소름이 좍 돋을 수가 없지만 잃어버린 감각은 시시때때로 뇌에서 소름이 돋는다는 걸 멋대로 느끼게 했다.
천수관음이 사이드카메라를 확인하자마자 팔라딘에서 진동이 쿠웅하고 느껴졌다. 제리는 죽었지만 제리의 스트레이트 펀치는 EV-1의 몸에 살아남았다.
EV-1은 어빈 프레임으로 용감하게 팔라딘의 옆구리에 펀치를 먹였다.
프레임 옆이 우그러지면서 천수관음은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이 미친놈들은 뭐란 말인가?
자신들의 초인적인 능력 앞에서도 겁을 먹거나 도망치지 않고 아득바득 한 명씩 쓰러뜨리더니 끝끝내 와해시켰다.
천수관음은 야차왕이 도망치는 것에 분노했지만 딱히 야차왕더러 뭐라 할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