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27
제327화
인간은 의외로 죄책감을 잘 느끼지 않는다.
교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 앞에 쓰러진 수많은 여자들을 자신이 부추겨서 이혼하게 만들고 반반한 여자들은 자신의 성노리개로 삼았지만 죄책감 따윈 전혀 느끼지 않았다.
애들을 키우다가 마음이 허해서, 혹은 기본소득자로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이나마 준 게 어디냐는 식이다.
교주는 자리에 앉아있는 무슨 정보국 직원이나, 교수들을 힐끔 보면서 더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술한 교리를 철석같이 믿다니?
물론 그는 인지부조화와 가짜 기적들을 잘 다룰 줄 알기에 똑똑한 사람들을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하다고 자부해도 교주는 몇 달간의 시간만 들이면 그 사람을 굴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자아아! 여러분의 이마에! 나의 인을 치노라!”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교주는 강단 밑으로 내려와서 짝짝짝 사람들의 이마를 손으로 쳤다.
신도들은 황홀한 표정이 되어 이마를 내밀고 빨간 손자국이 찍힌 신도들은 감격해서 실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주는 수많은 사람에게 도장을 찍는 절차를 대충 마쳤다.
그는 땀에 절은 남자의 이마에는 잘 손을 올리지 않았고 반반한 여자의 이마만 살짝 때렸다.
이것도 신호였다. 교주가 ‘직접 인을 친’ 여자는 예배가 끝나면 교주의 집무실로 가야 했다.
교주는 어차피 예배는 뒷전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마침 예배당에 어리고 예쁜 새 신도가 하나 있었고 그녀의 머리에 직접 인을 치고 간부에게 신호를 줬다.
* * *
예배는 성황리에 끝났다.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후련한 표정으로 예배당 밖으로 나가 삼삼오오 집단 거주하는 공동체 숙소로 향했다.
“시발, 가면 갈수록 지랄이네. 산삼이나 뭐 그런 것 좀 먹어야겠어. 당이 딸린다 당이.”
놈은 집무실과 붙어있는 선교회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목사 가운을 집어 던지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야, 오늘 얼마나 벌었냐? 빠짝 땡겨야 용산 카지노에서 놀지?”
집무실 뒤편에는 한 패인 놈들이 달러나 원화를 나눠서 지폐계수기에 넣어 돌리고 있었다.
“참 좋은 시절이지 뭐야? 옛날에 웡꺼 살아있을 때는 그놈들한테 돈을 줬어야 했는데 말이지.”
인천 서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법적인 일은 웡꺼를 통해야 했고 사이비 종교사업도 마찬가지였다.
교주는 담배를 물고 돈다발을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십일조를 받는 추수날이었고 어마어마한 양의 지폐 다발이 쌓여 있었다.
교주가 지폐 다발을 대충 눈으로 세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교주는 황급히 사무실 문을 닫고 옆에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주님, 주님의 종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나 졸업했을까? 앳되어 보이는 여자 둘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교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 쪽에서는 ‘너만 먹냐’면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집무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옷 벗고 빤스부터 내려.”
여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해하지 마. 우리는 아담과 이브처럼 그런 모습으로 이야기를 해봐야 해.”
여자들은 굉장히 당황했다.
집무실로 불러서 덕담이나 해주겠거니 했지만, 상황은 전혀 그녀들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여자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교주는 대뜸 자기 바지부터 내렸다.
“괜찮아. 내가 주잖아. 내가 메시아잖아? 난 너희들을 시험하고 있어. 새로운 시대 안 볼 거야?”
이미 여자들은 완전히 세뇌되어 있었고 뭔가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상의부터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너네 믿음 시험하는 거라니까? 빤스부터 벗어.”
여자들은 주춤주춤거리면서 속옷을 벗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매니퓰레이터 암 하나가 천장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교주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매니퓰레이터 암의 집게팔이 놈의 목을 누르고 놈의 가슴을 Y자로 절개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여자들이 비명 소리를 내질렀지만 사무실 쪽에서는 다들 음흉한 미소만 지었다. 교주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었고 여자의 비명이 터져 나온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끔찍한 장면은 없었다.
교주의 목과 척추 그리고 심장이 뽑혀 나오고 피칠갑이 된 교주의 몸이 앞으로 털푸덕 쓰러진다.
놈의 목과 심장부의 주요 혈관들이 작은 집게 팔 같은 의료용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유니버설 프레임에 이식되었다.
여자들은 이제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서로를 끌어안고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
방금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교주가 자신의 혀와 입으로 누군가의 말을 따라 했다.
– 이곳이 우리의 배양액이 되리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 새로운 생명체가 눈을 뜨게 되리라.
그 말 역시 교주의 머리통이 그대로 따라 했다.
여자들은 거미처럼 보이는 뭔가를 보고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놈은 유니버설 프레임에 이식된 교주의 목을 미리 준비해 놓은 휴머노이드 프레임에 연결했다.
“뭐, 뭐야 이놈들은! 이! 이건!”
타다다다다다!
사무실 쪽에서 화약식 자동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기계 몸을 한 남자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들어왔다.
“주, 주님?”
역광이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은 엉겁결에 주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긴 머리에 떡 벌어진 근육.
그 모습은 성화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 여인들이여 두려워 마십시오.
“예? 예?”
– 나는 너희를 새로운 세대로 이끌 새로운 선지자입니다. 인류는 육체라는 장벽을 넘어 새로운 세대로 도약해야 합니다. 나는 드디어 나의 존재의의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검은 모노리스의 존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경(正經)’입니다.
여자들은 반라의 몸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근육질의 남자는 그녀의 옷고름을 추슬러주며 한 사람의 배에 손을 올렸다.
– 자궁이 안 좋군요. 걱정 마십시오. 지금 내가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심령 치료를 하는 것 같았다.
근육질 남자가 아랫배에 손을 올리자마자 여자는 뭔가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이 새미선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새미선교회에게 가입한 사람들 중에는 보험 지급이 거절되어 ‘치유의 은사’를 경험하려고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지금까지는 플라시보 효과로 병이 치료됐다고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사실 그녀는 계속 병 때문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정말로 기적이 벌어졌다.
여자의 아랫배에서는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 그리고 당신은 가엾게도 새끼손가락 뼈가 부러졌군요. 왜 부러졌습니까?
“부, 부모님이랑…….”
여자는 교주의 세뇌에 빠져 부모님과 싸우고 집을 나왔다.
그때 바로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교주는 혹시나 여자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병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치부라도 들킨 듯 손을 움츠렸다.
하지만 잘생긴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 겁먹지 마세요.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당신의 고통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겁니다.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여자의 팔을 들어 올리고 새끼손가락을 단숨에 치유시켰다.
당장에 고통이 사라지고 뼈가 붙어서 새끼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느껴지면서 두 여자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까지 교주와 그 패거리는 이런 정도의 기적을 선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누가 어떤 병을 가졌는지 꿰뚫어 보는 것조차 어림없는 일이었다.
– 그대들의 아픔은 사라졌습니까?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가서 그대들의 형제자매들에게 전하십시오. 병들고 아픈 자여 나에게로 오라고.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고. 그대들을 좀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할 메시아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그대들은 ‘우리들의’ 첫 증인입니다.
새미선교회의 새로운 메시아는 돈도 그렇다고 몸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 속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저 말씀을 증거하라고만 하고 두 여자를 천천히 일으켰다.
여자들은 뚱뚱한 교주가 웬 놈에게 당해서 모가지가 뽑혀 나갔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굉장히 잘생기기도 했고 카리스마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단 하나 남자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역광 속에서도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난다는 점이었다.
푸른 양자 동공을 가진 사내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들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법칙의.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들의’ 증인으로 세상 끝까지.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를 증인으로서 전해야 할 것입니다.
* * *
“아…… 추워.”
이진영은 패딩을 입고 에이췽하고 기침을 했다.
또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은 한바탕 눈이 내렸고 시가지의 공공 로봇들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었다. 그는 월미도역 세븐일레븐에서 삼양 컵라면을 하나 사서 조심조심 역 밑으로 내려왔다.
“또 라면이냐?”
“이게 누구신가? 좀도둑 박무혁 부장님 아니신가?”
“야, 도둑이라니? 두어 번 어. 뭐한 거 가지고. 임마.”
“아, 라면 건드리지 마요. 손모가지 날아가붕게. 이것도 훔쳐 가려고요?”
강력부장은 한껏 빈정 상한 얼굴로 이진영을 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영은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롱꺼가 운영하던 국숫집을 빤히 바라봤다.
월미도역 아래 명당자리에는 어느새 로봇이 우동면 물기를 탈탈 터는 기계우동집이 입점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좋은 자리를 볼품없이 보이는 노인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그 노인이 수상하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었다.
“야, 이진영이. 라면 먹지 말고 우동 먹고 가라.”
“아뇨. 저는 도동놈과 합석하지 않습니다아”
“아, 새끼. 거 깐깐하게 구네에. 내가 사께에.”
이진영은 얄밉게 문밖에서 후루룩 삼양 컵라면을 먹으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강력부장은 한숨을 쉬면서 빨리 꺼지라는 시늉을 했다.
이진영은 컵라면을 우적거리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롱꺼 세력이 사라지고 나서 월미도역은 완전히 달라졌다. 기계우동집뿐만 아니라 스타벅스 등 수많은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들어왔고 곳곳에 관광객들이 북적거렸다.
이진영은 컵라면 국물을 무슨 커피처럼 후룹 들이키면서 새롭게 바뀐 시가지를 바라봤다.
페어차일드가 개발에 뛰어들면서 거리는 나날이 모습이 바뀌었다.
그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건설 전임 로봇이 24시간 건물을 올리면서 어제는 없었던 빌딩이 오늘 떡하니 세워져 있다. 어느덧 월미도역 근처에서는 난민들의 푸른 방수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난민들은 이 근처의 가게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되레 옛날에 있던 노점거리로 되돌아갔다.
그나마 빨리 난민등록하고 난 후 노점 번호를 받은 사람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웡꺼의 잔당이 있는 비등록 난민지구로 되돌아갔다.
노점이 웡꺼의 자금이 되고 노점은 웡꺼의 잔당 때문에 임대료나 싸지거나 없는 만큼 보호비를 내고 장사하고.
예전 굴다리의 악순환이 또다시 계속되었다.
결국 월미도역 근처에서 비등록 난민지구까지는 점점 개발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이진영은 왠지 전에 김상현에게 한 말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똥을 좀 더 예쁜 뚜껑으로 덮어두고 있는 것뿐이지.”
중부서의 특별대응팀장인 이진영은 월미도의 치안이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민대표부는 난민 피살자가 생기면 득달같이 중부서로 쳐들어왔지만, 솔직히 굴다리 깊은 곳에서 몇 명이 죽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