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28
제328화
서가영 정부도 처음에는 난민에게는 호의적이었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지금은 대응이 미적지근했다.
결국 롱꺼 세력이 사라지고 뭔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보였지만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듯 진보와 퇴보를 거듭했고, 그 사이 월미도에서는 사람이 죽어갔다.
이진영은 빈 컵라면 통을 시 청소 로봇에게 버렸다.
롱꺼와의 격전이나, 링로드 전투 이후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옛 난민지구 깊숙이까지 시 청소 로봇이 들어간다는 것뿐이었다.
이진영은 강력전담부의 접의자가 널브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제 에어컨 설치는 다 끝났지만, 이번에는 난방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강력전담부 행어는 중장비가 많이 들어오는지라 휑하니 넓었고 참고인 조사 등 간단한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몸을 덜덜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취, 취조실로 들어가면 안 돼요? 여, 여기 너, 너무 춥네.”
“으드드드. 거, 거기는 더 추워요. 여, 여기는 그래도 난로는 있지. 이, 일단 나, 난로 드릴게요.”
윤숙희는 패딩을 몸에 칭칭 감고 에스키모 꼴을 하고 작은 전기난로를 참고인에게 건넸다.
거지꼴도 이런 거지꼴이 없었다.
여자 둘이 달달 떠는 모습을 보고 이진영은 혀를 끌끌 찼다.
“윤숙희, 어차피 조서 정리는 패트가 정리할 테니 난롯가에서 해.”
“그, 그래도 돼요?”
이진영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접의자가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기사들의 원탁을 가리켰다.
구룡성채 전투 이후에는 에어컨 설치 문제로 그 뒤로는 난방 문제로 이진영은 이 접의자에서 늘상 시간을 보냈다.
이진영은 특별대응팀장 활동비를 써서 이곳에 펠릿난로 하나를 설치했다.
아무래도 강력전담부에서 이곳이 제일 따뜻하다 보니 그냥 잡무를 하는 형사들도 죄 이곳에서 얼쩡거리면서 사무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형사들 중에는 일만 하는 형사가 있는 게 아니다.
“유인원, 이 시끼야. 너도 일 없으면 집에 들어가서 자든가.”
“췅성. 특장님 나오셨슴까?”
“오냐아. 여기서 잤다간 너 입 돌아간다 임마.”
이진영은 유인환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려다가 난로 옆에서 마시멜로우를 굽고 있는 전상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겨울 1인용 텐트를 치고 벌써부터 경찰서에서 살고 있었다.
“…….”
이진영은 더 이상 이 괴인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저번 링로드 상부 전투에서 전상영은 또 결정적인 순간 등장해서 제석천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이진영은 어떻게 거기까지 기어 올라왔는지 물으려고 했다가 관뒀다.
“내가 앓느니 죽지.”
난로 위에는 보리차가 끓고 있었고 옆 테이블에는 패트와 매트가 정리해놓은 찻잔이 거꾸로 쌓여 있다.
이진영은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윤숙희와 참고인에게 건넸다.
“오, 팀장님. 감사합니다.”
이진영도 보리차 한 잔을 따라 유인환의 옆에 앉았다.
딱히 아직 특별대응팀에 배당된 사건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스크포스 13이 특별병과번호를 전멸시킨 이후 경찰청에서 그 어떤 직접적인 사건지휘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진영은 문득 월미도역에서 강력부장을 만난 걸 떠올리며 차를 호롭하고 들이켰다.
“그 양반, 혹시 따로 나랑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건가?”
이진영과 그의 파트너 로봇 EV-1은 다시 별다른 사건 없이 기나긴 한량경감의 일상을 보냈다.
물론 중간중간 각종 인질극이나 러다이트 테러 사건 때는 지원을 갔지만 그게 다였다.
아직 내사과에서 딱 찝어서 너 내사 중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쉬쉬하며 경원하는 분위기를 이진영은 읽을 수 있었다.
강력부장 역시 그동안 수고했다는 애매한 말로 그에게 별다른 사건을 떠넘기지 않았다.
이진영은 신희정의 말을 떠올리며 뜨거운 보리차로 속을 달랬다.
“아직 토끼가 잡히지 않았는데 사냥개가 녹이 슬게 하면 안 되지요오.”
이진영의 넋두리에 어울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인환은 다시 쿨쿨 잠이 들었고 전상영은 개랑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한가롭게 개가 방울을 딸랑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진영은 본의 아니게 윤숙희와 참고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놈의 인상착의로 몽타주를 만들었어요.”
“이 사람은 아니에요. 좀 더 눈이 험악했던 것 같아요. 눈썹도 더 진했고.”
윤숙희는 매트를 불러서 몽타주를 그리게 했다.
매트는 4B연필과 스케치북을 가지고 능숙하게 몽타주를 수정했다.
로봇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인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림학원에서 가르치듯 인간은 전체적인 형태를 잡고 디테일을 쫓아간다면, 로봇은 단번에 디테일을 그리면서 잉크젯 프린터를 인쇄하듯 모든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그린다.
종이 위에서부터 정교하게 데셍된 그림이 출력되는 것 같다.
몽타주를 수정하는 매트의 동작 역시 마찬가지다. 로봇은 참고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바로 지우개와 연필을 옮기며 단번에 디테일하게 수정했다.
마치 순간 인쇄기로 종이에 그림을 도장으로 찍는 것과 같았다.
매트, 정확히 말하면 몽타주 작성 인공지능은 스케치북에서 인상을 수정하는 것과 동시에 3D 스캔으로 근처에 있는 모니터에 입체 화상을 띄웠다.
이진영은 문득 예술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매트가 그리는 정교한 연필 초상화가 수많은 인간 초상화가들을 은퇴시켰다.
저 몽타주 그림은 단순히 수사 참고용 그림이 아니라 대가의 스케치랍시고 미술관에 걸어도 속아 넘어갈 정도의 퀄리티였다.
단순히 기술만 아니라 인공지능과 로봇은 감성에 있어서도 인간 예술가를 뛰어넘었다는 말도 있었다.
인공지능 소설가는 딥러닝으로 지금까지 나온 모든 소설을 참고해서 전혀 새로우면서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몇 편이나 ‘찍어낸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문화를 즐기기 위해 20세기로 역류해서 그때의 문화를 즐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청개구리 심리에 가까운 것이지, 지금 인공지능이 만든 각종 문화들이 인간이 만든 것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말로 잘 조형되고 잘 딥러닝된 로봇의 연기와 사람의 연기를 인간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이진영은 그냥 업무용 몽타주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스케치북과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랬어요. 이거랑 비슷했어요.”
모니터의 남자는 너무나 평범하게 생겼다. 흔히 볼 수 있는 북방계 동양인의 얇은 눈, 오똑하지도 그렇다고 못 생기지도 않은 코.
눈을 흐릿하게 뜨고 보면 눈매가 부리부리한 이진영과도 비슷하게 보일만 한 거기서 거기인 얼굴이었다.
이진영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저기, 윤 팀장님? 이놈은 뭐야?”
윤숙희는 참고인에게 뭔가를 설명하려다 이진영 쪽을 돌아봤다.
“발바리 그 새끼요. 동종 사건을 조사하다가 이쪽 참고인분을 새로 찾아냈어요.”
발바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인환이 벌떡 일어났다.
“선배임. 근데 발바리 사건도 다 본청 공안이 후루룩 먹지 않았어요? 그 참수 어쩌고 수사본부 본청으로 되돌아가면서 다 갖고 갔잖아요?”
“왠지 께름칙해서 그냥 나 혼자 조사하고 있었어. 이진영 팀장님, 이거 아직 내사번호 안 딴 건데…….”
이진영은 참고인 쪽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커트해줄게. 수사 지휘 들어갈 것 있으면 좀도둑 부장님이랑 내가 쇼부칠테니까.”
유인환이나 윤숙희나 좀도둑 부장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에 이진영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들도 박무혁 강력부장이 이진영의 물건들을 훔치는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했었다.
“아무튼, 피해자분. 우리 팀 사람들은 다들 궁금한 건 환장하는 양반들이라 사비를 들여서라도 놈을 쫓을 겁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도 그 미친 새끼는 잡을 거고요.”
참고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초기에 발바리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람이었고 경찰 병력은 점점 더 엽기적으로 변해가는 발바리를 쫓느라 그녀에게 소홀했었다.
윤숙희는 참고인을 배웅하러 나가고 이진영은 뜨거운 보리차를 유인환에게 건넸다.
“괜찮냐 임마? 사건 배당된 것만 8개라며?”
“그래도 발바리라잖아요? 딱 귀에 꽂히드만요.”
“넌 그냥 집에나 들어가라. 여자친구도 생긴 놈이. 여친이 뭐라 안 그러디?”
유인환은 경찰 24시에 방영된 걸 계기로 여자친구가 생겼다. 살다 보면 경찰대를 졸업한 엘리트에 가끔 야만용사처럼 생긴 근육질 남자가 취향인 여자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진영은 보리차를 후릅거리면서 매트에게 발바리 사건 조서를 받았다.
이미 발바리 사건도 수법의 유사성으로 관할은 전부 참수사건 수사본부에 넘어가 있었다.
서가영 대통령은 그 사건을 주기적으로 직접 경찰청장에게 보고 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 사건을 해결해야 ‘이민호 안보수사국장’이 경찰청장을 달 수 있을 거라 말했다.
덕분에 공안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본청과 서울시경의 모든 형사들은 개처럼 구르면서 인천과 서울 밤거리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유인환이 여기서 쪽잠을 자는 것도 밤새도록 본청 형사들을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참수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차왕이 링로드 터미널에서 도망치면서 육공은 야차왕을 쫓고 있었고, 아직 놈을 도운 미사일 역시 어디서 날아왔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육공이나 경찰청 공안들이 쳐들어와서 한껏 뻗댈 테지만 이상하게도 중부서는 조용했다.
육공은 끝까지 정 대령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경찰청이 중부서에 몰려오지 않는 게 희한하긴 했다.
“발바리라. 그 자식 잡으려고 잠복을 몇 번이나 했었지?”
윤숙희는 서류를 뒤적이다 패트에게 물었다.
“패트, 몇 번이더라?”
– 총 7번입니다.
다른 경찰서 ‘수사팀’들까지 합세한 작전에서도 발바리는 유유히 자신의 체액을 뿌리고 사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의 수법은 점점 더 교묘해졌다.
피해자 중에는 보안이 삼엄한 소드타워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야차왕을 비롯한 특별병과번호 놈들은 목을 수집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놈들은 철저히 심박수를 비롯해 생체 바이탈 신호 중 우수한 자원들로 피해자를 골랐다.
일부러 소콤에 들어갈 특수부대원을 골랐던 것도 이들의 체력과 각종 적합성이 유니버설 프레임에 적응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새로 발생하는 참수사건들과 강간사건 피해자들은 제각각 다른 계층의 인물이었고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서가영이 일련의 참수사건인 귀타귀 사건과 발바리 사건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놈들은 인천, 서울 서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각계각층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다 죽어가는 난민 노인과 부잣집 딸내미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차이가 나는 피해자들의 신분 때문에 더더욱 경찰들은 이놈들의 목적이 뭔지 바라는 게 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다만 경찰청 본청은 경찰 24시 김수경의 제보 영상을 받고도 처리번호 8859213이 살해에 연관되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수법이 비슷할 뿐 경찰로서도 로봇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건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진영은 보리차를 따르면서 그의 파트너를 조용히 기다렸다.
EV-1은 늘 이진영이 출근해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형사들에게도 상냥한 로봇이긴 하지만 EV-1의 소유주는 마이크로웍스였고 중부서 사람들은 EV-1을 이진영만의 파트너 로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이제는 귀에 익어버린 액츄에이터 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이브이, 발바리 사건 살아남은 피해자가 한 명 있었지?”
– 하하, 인사드리기도 전부터 일을 시키시는 겁니까?
“온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뭐. 그래서 그 피해자 누구였지?”
– 중화요리점 라이라이의 여주인 말씀이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