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34
제334화
이진영은 보리차를 들이켜면서 이시영을 비롯한 대응팀 형사들의 보고를 들었다.
형사들은 무슨 사랑방에 온 손님들처럼 접의자에 앉아서 보리차나 커피를 마시며 이진영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각각 자기 일을 하러 사라졌다.
이진영은 그냥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각지로 흩어진 수많은 대응팀 수사관들이 각종 수사 정보를 취합해서 이진영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각종 행정처리와 자료 정리를 도와주는 EV-1이 있었다.
이진영과 EV-1은 말하자면 두 명으로 이뤄진 합동수사본부 그 자체였다.
오전이 지나기 전에 새벽부터 나간 유인환과 두 명의 수사관이 돌아왔다.
세 명은 온몸에 뻘을 가득 바르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터덜터덜 이진영 옆에 앉았다. 어찌나 날이 추웠는지 형사들의 몸에서는 김이 풀풀 피어올랐다.
이진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뜨거운 보리차 세 잔부터 세 명에게 건넸다.
“왜 아무것도 안 물으시는 검까.”
“아니…… 딱 보아하니 인천 앞바다가 간조 때고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서.”
“…….”
유인환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미친 새끼들이 우리들이 가자마자 배를 침수시키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거 잡다가 그만.”
이진영은 유인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밀수선은 경찰에 들킬 때를 대비해 자침 기능이 있었다. 일전에 김상현과 김대현이 ‘페라리’를 낚을 때도 배를 일부러 격침시켜서 정보국이 고용한 놈들의 추격을 피했었다.
“배는?”
“해경이 가져간다는 걸 엿 먹으라며 버티다가 그 사이 물이 싹 빠지면서 배가 뻘에 처박혔지요.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시발 피의자 놈들이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이진영은 깜짝 놀라서 유인환을 쳐다봤다.
“큰 폭탄은 아니었어요. 수류탄, 그게 뻘밭에서 여러 개 터지면서 입으로 뻘이 들어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오. 새끼들 혼란을 틈타 도망치더니…….”
이진영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배는 자침 후 썰물이 된 뻘밭에 처박혔고 해경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피의자들이 도망치겠다고 뻘밭에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고 도망치는 피의자들을 쫓아 유인환을 비롯한 세 명의 형사들은 졸지에 뻘밭 위에서 달리기 레이스를 펼쳤다.
“그 철판 때기 없었으면 못 잡았을 거예요. 개자식들. 다리가 낙지다리도 아니고 뻘밭에서 얼마나 빠르던지 원. 나중엔 그놈들도 안 되겠는지 배를 땅에 깔고 뻘밭에서 수영을 하더라니까요.”
유인환은 6시 내 고향에서 본 조개 캐는 장면에서 힌트를 받아 철판을 뻘배 삼아 피의자를 쫓았다.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도 유치한 추격전이었다.
피의자는 있지도 않는 폭탄을 집어 던진다며 뻘을 잡아서 집어던졌고 그때마다 형사들은 뻘에 나뒹굴면서 폭탄을 피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뻘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용의자를 쫓아오는 해경 아저씨들도 있었다.
결국 장장 2킬로미터나 되는 용렬한 레이스에서 우승한 건 피지컬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유인환이었다.
유인환은 해경의 호버크래프트가 들어오기 전 용의자들에게 수갑을 채웠다.
형사 하나가 마침 대충 밖에서 뻘을 털어내고 로봇과 함께 들어온 피의자를 가리켰다.
“짜란.”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인환더러 알아서 취조하라는 시늉을 했다.
“특장님이 직접 취조 안 하시게요?”
“어, 결과만 알려줘. 내가 좀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무슨 일이요?”
“보리차 끓이기.”
유인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의 선후를 따지면 샤워가 먼저겠지만 지금 유인환은 새미선교회와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을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이진영은 모나미 153 볼펜으로 자금추적 서류 문서와 공람에 올려져 있는 명부를 연결했다.
– 저 피의자를 조사하다 보면 자금흐름과 무기의 흐름을 쫓을 수 있겠군요.
“그래애.”
어째 이진영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그는 계속 위쪽 상층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효진의 충고 아닌 충고가 결정적이었다.
지금 이진영과 EV-1은 경찰 상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하들에게도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이진영이 안락의자 탐정 노릇을 하면서 대응팀에게 수사 방향만 잡아주고 있는 이유였다.
“이브이, 이게 원래는 강력부장이 해야 하는 일이겠지. 나도 이제 관리직 노릇에 슬슬 익숙해지려나 보다.”
– 아마 부장님이 들으셨다면 철이 들었다고 기뻐하시겠군요.
이진영이 하는 짓은 가장 이상적인 경찰 지휘부나 수사본부의 모습이었다.
부하들에게 전폭적인 지원과 권한을 부여하면서 아무런 선입견에 구애받지 않고 사건만을 쫓는다.
아무래도 사내 정치나 부패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경찰기관에서 이진영은 존재 자체가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경찰 간부가 있을까?
“슬슬 나도 본청에 자리를 알아볼까? 근데 이브이. 본청 경찰이 되면…….”
– 저와는 바이바이겠군요. 민원인이나 피해자 상대하는 사법경찰관이 아니면 경찰 로봇은 굳이 공격 로봇이나 수사 로봇으로 배치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행정 로봇은 더 많아지겠지만 말이지요.
EV-1은 잘라 말했다.
이진영은 왠지 서운한 표정으로 보리차를 호롭거렸다. 그는 쓸쓸하게 보리차를 끓이면서 막대기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피의자 신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인환은 피의자 신문조서를 바로 인쇄해서 가지고 왔다. 피의자는 새미선교회 교단과의 연관성은 부정했지만 밀수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리고 가장 오싹한 사실이 취조로 밝혀졌다.
“폭탄 밀수가 한 번이 아니었다고?”
“예, 그 2억은 새미선교회에서 무기, 그중에서도 폭발물을 사기 위해 준 돈이래요. 그 돈 말고도 현찰로 받은 돈이 20억으로 두 번 이상이랍니다.”
“빌어먹을 폭탄테러가 이번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군. 이번 폭탄테러는 빙산의 일각이라. 근데 너…….”
이진영은 유인환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유인환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유인환은 도둑이 제 발 저렸는지 하소연을 했다.
“아, 안 때렸고 특장님이 썼던 방법 썼어요. 플리바게닝.”
“워얼. 머리 좀 굴렸군.”
“예, 특장님과 이브이가 백헌강을 속여넘긴 건 전설이니까요.”
한국 법체계에는 사법거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인환은 사법거래를 통한 감형을 미끼로 대어를 낚은 것이었다.
“수사본부는 어떻게 할까요?”
“위에 수사본부에 갖고 가. 안보수사국에도 귀띔 좀 해주고. 그리고 나와 대화한 건 비밀로 해라.”
“예? 하지만 사건 지휘는 특장님이 하신 건데요.”
“너도 공을 쌓아야지.”
“에헤이. 벌써 저 질리신 검까? 중부서에서 쫓아 보내시려고요?”
“어뜨케 알았냐. 너도 경찰대 성골 라인인데 이제는 본청으로 가야지.”
“헤헤, 저는 중부서가 좋습니다. 특장님 밑에서 일하는 것도 재밌고요. 사랑합니다, 특장님.”
“누가 보면 오해할라. 오케이 거기까지. 얼른 씻으러 가기나 해.”
유인환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44팀 형사들도 뻘로 목욕을 한 주제에 뭐가 그리 좋은지 씩 웃으며 일어섰다.
이진영은 앉아서 퍼즐 조각을 하나 더 얻었다.
그는 유인환의 피의자 신문조서 사본을 바닥에 툭하고 던져놨다.
바닥에는 파란 정부공용 파일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이진영은 막대기로 톡톡 파일들을 두드리면서 사건들의 연관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폭발물 거래가 여러번 있었다는 건 테러 사건이 이번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다음 행보가 문제겠군.”
– 저도 혹시나 해서 패턴을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딱히 뭔가를 노리고 배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진영은 그냥 영상만 틀어놓은 TV를 바라봤다. 때론 경찰의 브리핑보다 뉴스 화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더 빠를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이진영과 EV-1은 TV에서 브리핑하는 각종 폭탄테러 사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EV-1의 말대로 새미선교회는 딱히 뭔가를 노리고 폭탄테러를 저지른 건 아니었다.
“두 건이 더 늘었군.”
새벽에 부산시와 제주도에서 새미선교회라고 소속을 밝힌 놈들이 남포동과 제주공항 근처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켰다.
용의자들의 신원도 제각각이다. 남포동 사건은 고등학생이고, 제주공항 사건은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였다.
뉴스는 스위치를 누르기 전의 상황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겨울이라 파카나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는지라 폭탄을 보여주기 전까지 두 사람은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길 한가운데서 코트나 파카의 앞섶을 풀어 헤치고 새 시대가 올 거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공통점은 하나 있어.”
–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켰군요.
“그래, 어제 중화대루 근처도 낮부터 관광객들이 많았으니까.”
– 다중 피해를 노린 거군요.
“그래야 자신들의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거고. 이놈들의 목적은 단 하나야.”
–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도입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그 새로운 미래를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진영은 바닥에 깔려 있는 서류철들을 노려보며 막대기로 한 곳을 짚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있었다.
선지자.
도대체 선지자는 누굴까? 누구기에 저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새 시대가 올 거라며 자폭 버튼을 아낌없이 누르게 만들었을까?
TV에서는 폭파범의 신상을 캐내면서 이들이 가출한 지 불과 두세 달밖에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폭파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은 전혀 망설임 따윈 없었고 자신의 영생을 믿었다.
이진영이 TV 시사 프로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윤숙희가 코트를 벗으며 행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44팀 팀원들은 교주에게 성폭행을 당한 탈퇴자를 비롯하여 새미선교회의 탈퇴자들의 진술을 받으러 오전 내내 돌아다녔다.
“팀장님. 최근 탈퇴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떠돈다더군요.”
“무슨 소문?”
“교주가 기적을 행했대요.”
“기적?”
“예에, 무슨 병을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이거 꽤 오래된 장사수법이잖아? 그쯤 되면 예수님한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이진영은 신랄하게 종교적 기적을 비판했다.
종교적 기적은 인간의 상상력과 인지능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암을 발견하기 전까지 인간은 무엇이 인간을 죽이는지도 몰랐고 당연히 그때는 암을 치료하는 기적 따위는 없었다.
불치병을 고쳤다는 대부분의 기적들은 그저 종교적인 트랜스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었다가 나중에는 더 악화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로봇 치료가 일반화된 지금은 더더욱 치유의 기적에 홀리는 사람은 없었다. 로봇들이 사지가 뜯겨나가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오히려 더 기적에 가까웠다.
“그냥 기적이 아니래요. 절단 상처에서 손가락을 순식간에 재생시키고 손을 대기만 해도 충치가 치료되고, 신경괴사증으로 재활불가판정을 받은 팔의 신경이 다시 회복된다고 증언했어요.”
이진영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게 말이 되냐?’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수양딸인 한승아는 경찰 가족 보험으로 계속해서 신경괴사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손을 한 번 대서 신경괴사증을 낫게 한다면 의료 로봇이나 비싼 치료비 따위는 필요 없었다.
“팀장님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라종보험 가입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혹하는 사실이 없죠.”
“하긴……. 모든 사람이 다 의료 로봇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예, 대부분의 새미선교회 가담자들은 라종보험 가입자나 난민들이에요. 심지어 탈퇴하고 교주를 고소한 사람들까지도 꽤 많은 수가 다시 새미선교회에 가담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