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35
제335화
이 역시도 사이비 종교 문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느 순간 사이비 종교의 수법이 인간의 인지부조화로도 더 이상 설득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지정한 날짜에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다.
그때가 오면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의 허황된 이야기에 속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제정신을 차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이비종교를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이비 종교 교주가 새로운 계시를 내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뭔가 증거들이 하나둘 나오면 인간은 다시 사이비종교에 휘둘리게 된다.
소위 ‘시험을 받는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현상이다.
마귀의 꼬임에 빠져 시험을 받아서 신앙을 져버리게 되었지만, 새로운 계시를 받아 다시 종교에 모든 것을 바친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게 된다.
새미선교회의 경우에는 새로운 ‘치유의 기적’이 바로 그 계시였다.
“치유의 기적이라. 이브이, 난치병 환자 명단과 어제 수사본부에서 삽질하면서 얻은 명단을 비교해봐.”
– 다시 새미선교회에 가담했다면 흔적이 남겠군요.
윤숙희도 수첩에 메모를 휘갈기고 핑거스냅을 딱하고 쳤다.
“팀장님 그건 제가 확인해 볼게요. 광저우 메모리얼 병원이나 분명 흔적이 남아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의 행적을 쫓으면…….”
“새미선교회의 본거지가 어디있는지 나오겠지.”
“빙고.”
“윤 여인, 그건 내 대사…….”
윤숙희는 미소를 띠면서 씩씩하게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는 자기 팀을 꾸린지 1년도 안 돼서 이미 훌륭한 수사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이진영은 윤숙희나 유인환의 듬직한 모습을 보면서 점점 자신이 슬슬 현장에서 물러날 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년이면 이제 마흔 살이 되는 젊은 나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한 위기들을 수없이 넘겼다. 그는 자신이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 윤 팀장님의 정보는 꽤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메모리얼 병원에서 무기한 라종 대기 상태로 사실상 치료거부를 당한 사람들이 꽤 많이 새미선교회에 가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치료거부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단지입니다.
이진영은 EV-1이 출력한 전단지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치유의 은사 집회.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자 치유의 기적을 맛보리라.
얼핏 보면 주최 측이나 교회의 이름조차 쓰여있지 않은 정체불명의 전단지였다.
“메모리얼 병원에서 라종 대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린다라……. 누군지는 몰라도 영업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나라도 솔깃하겠어.”
–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이니까요. 그리고 그 전단지에서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이진영은 뒤늦게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단지는 최근 뿌려진 것이고 시간은 하필 오늘 저녁 7시로 되어 있었다.
이진영은 커다란 벽걸이 시계를 노려봤다.
아직 오후 12시.
잠복 작전을 짜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전단지를 출력한 후 파일에 끼워놓았다.
대응팀 현장 수사관 덕분에 이제 슬슬 필요한 정보들이 모이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서 형사들이 늘 한계에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관할권이었다.
의문의 치유 집회가 열리는 곳은 중부서 관할지역이 아니라 메모리얼 병원이 관할인 북부서의 관할이었다.
전국에서 강력전담부가 설치된 곳은 딱 두 곳 중부서와 북부서였지만 두 지역 경찰서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인접한 경찰서가 그렇듯 골치 아픈 사건은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떠넘기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롱꺼 세력이 쟁쟁할 때는 떠내려온 변사체를 트럭에 싣고 중부서 관할 바다에 버리려다 걸린 사례도 있었다.
또 각 강력전담부는 마치 조직폭력배들처럼 자신의 영역에서 다른 형사들이 깝죽거리는 걸 싫어한다.
수사 협조를 받으려면 기브 앤 테이크 식으로 뭔가를 넘겨주고 그래야 했다.
그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광역 특경이 있었지만, 현재 특경은 밑에 있는 블랙스와트팀 세력이 더 셌고 전투경찰부대 성격이 더 강했다.
경찰상부에서는 전 정권에서부터 이런 광역 사건 수사를 대비하기 위해 광역 특별사법경찰관 조직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본청 내부의 정치질 덕분에 이내 헛수고가 되었고 본청 조직개편 어쩌고 본부에서는 매일 탁상공론만 이어졌다.
“영장 받기도 힘들겠군.”
– 제가 손을 써볼까요?
“아니, 이브이. 괜히 튈 필요는 없어.”
내사 9팀은 우습게도 근처 책상에 쌍안경 세트를 갖다 놓고 이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중부서 명물 ‘원탁 회의’가 형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아놓고 담소하듯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라 도청이 쉽지 않았다.
이진영으로서는 딱히 도감청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한 건 아니었지만 내사팀 쪽에서는 욕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진영은 구형 타이맥스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아, 슬슬 나도 점심이나 먹고 와야겠군.”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였다. 이진영은 가식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패트와 매트에게 바닥에 있느 서류철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서류철들이 전부 특별대응팀의 금고 안으로 들어가고 내사팀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사팀뿐만이 아니었다. 수사상황이 영 진척이 없자 저 위 상황실에서도 유리 너머로 이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본청 수사관들도 이진영이 이미 새미선교회 폭탄테러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이진영이 서류철을 정리하고 나오자 수사관이 두 명이나 따라붙었다.
– 팀장님, 아까는 마크가 붙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목구멍에서 손이라도 뻗고 싶은 심정인가 보군. 연애든 뭐든 자존심만 조금만 꺾으면 해피한 일생을 누릴 수 있는데 말이야.”
– 오우, 팀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도은주 부장님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말에 사레가 들렸는지 이진영은 괜히 켁켁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넌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문제야.”
– 후후후, ‘가장 위험한 것은 친위대와 심복이라.’였죠?
이진영은 EV-1을 서 내에 대기시키지 않았다. EV-1은 그것만으로도 이진영의 행선지가 그냥 식당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미행으로 따라붙은 요원들도 이진영이 이세화나 신희정과 접촉하지 않을까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이진영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을 뿐, 그냥 노점거리에서 간단하게 볶음밥을 먹었다.
이 노점거리 중국집은 당연히 전파방해가 걸려있었고 이진영은 가게 유선 케이블을 통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저놈 대체 뭘 꾸미는 거지? 정보국에 연락한 걸까?”
“정보국도 슬슬 고개를 들이밀 타이밍이긴 하지. 이진영이 있는 곳에는 큰 사건이 발생하니까.”
내사 9팀 팀원들은 또우쟝을 후룹거리면서 이진영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진영이 서비스로 나온 계란국을 마시고 있을 때 곰 같은 덩치의 이시영 형사가 들어왔다.
이진영은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냐며 타박을 주면서 주인장에게 볶음밥과 짬뽕을 주문했다.
이시영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짬뽕을 먹으며 이진영에게 뭐라뭐라 말했고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젠장, 저 새끼들 뭐라고 하는 거야? 좀 더 가까이 다가갈까?”
“아니, 들킬 거야.”
“‘들킬 거야’라니? 저기엔 저 빌어먹을 로봇이 있어. 이미 우리가 미행하는 것쯤은 이미 알아챘을걸?”
본청 수사관들도 EV-1의 탐지력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다. 지금 저 볼품없이 녹슨 로봇은 한순간에 대한민국 서부 전체의 인공지능을 마비시켰다.
아미타여래도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EV-1은 순간적으로 아미타여래의 능력을 뛰어넘었다. 때문에 한국 경찰이나 정보국은 물론 CIA까지 지금 EV-1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미타여래가 링로드 터미널을 공격할 수 있다면 EV-1도 마음만 먹으면 링로드는 물론이고 궤도 엘리베이터까지 마비시킬 수 있었다.
미국으로서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또다시 궤도 스테이션이 폭발 등 테러로 먹통이 되는 것이었다.
중동계 테러리스트들의 폭탄테러로 궤도 스테이션이 멈췄을 때 미국은 천문학적인 경제손실을 입었다.
안 그래도 CIA의 정보원들도 EV-1과 이진영이 바깥으로 나오자 바짝 긴장하며 위성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이진영과 로봇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폭탄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CIA는 어이없게도 새미선교회 폭탄테러와 이진영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진영이 또우쟝에 요우티아오를 다 먹었을 때쯤 앳된 소년 하나가 옆에 앉았다.
“大哥,好久唔見囉? (형님, 오랜만이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근데 왜 내가 니 형님이야?”
죽은 전항매의 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이진영은 전항매가 죽은 후에도 그의 동생들을 챙겼다. 그중 한 명은 서가영 암살사건의 범인이었고 웡꺼의 인천 점거 시기에 죽었다.
그 아이가 죽고 나서 정보기관이나 경찰들은 전항매의 유족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진영은 아이에게 백달러짜리 지폐를 하나 턱하고 건넸다.
난민 아이들은 노점에서 일할 수도 없었고 결국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진영도 왠지 꺼림칙해서 전항매의 동생을 정보원으로 삼고 싶지 않았지만, 이 꼬마가 워낙 당돌하게 구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경찰 끄나풀이 돼도 예전처럼 바늘 사냥이 벌어지거나 난민들에게 끄나풀이라며 백안시되는 것도 아니었다.
“동생들은 잘 지내냐?”
이제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씩씩하게 또우쟝 국물을 마셨다.
“그럼 또 보자.”
이진영은 지금 자신에게 감시가 붙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아이까지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아이가 이진영의 팔을 잡고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我廳到最近舊龍哥派拐左細蚊仔同埋女子. (최근 구 롱꺼 놈들이 애들하고 여자들을 납치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이는 검지와 중지로 사람이 걸어가는 시늉을 하다가 다른 손 주먹으로 두 손가락을 콱 틀어쥐었다.
혹시나 이진영이 말을 잘못 알아들었을까 봐 제스쳐로 설명까지 했다.
“아이들하고 여자라고? 누가 그런 짓을?”
“卓一恒.”
“탁일항이라고?”
탁일항이라는 이름은 이진영도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탁일항은 롱꺼 조직의 2인자로서 롱꺼를 배신하고 쎄잉꺼에게 붙었다가 구룡성채에서 반죽음이 되었다.
“佢係搗亂乜也哦. (그놈이 뭘 꾸미고 있는 건데?)”
아이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의 겁먹은 표정을 보면 아이 역시 납치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배덕환과 탁일항은 각각 웡꺼와 롱꺼의 후계자였지만 구룡성채의 싸움 이후 두 조직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웡꺼의 밀수망은 러다이트 테러리스트가 틀어쥐었고 롱꺼의 난민조직통제는 난민들이 등록을 속속 마치면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나마 웡꺼의 정예부대였던 웡롱은 구룡성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력이 남아 있지만 탁일항의 조직은 롱꺼가 살아있을 때도 그다지 세력이 크지 않았다.
도대체 탁일항은 구 롱꺼 조직을 통해 뭘 꾸미고 있는 것일까?
이진영은 백 달러 지폐를 한 장 더 주고는 아이에게 약속을 받아내려는 듯 삿대질을 했다.
“쓸데없이 바깥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진영은 아이 몫까지 점심값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브이, 혹시 본청이나 중부서 감청 기록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 구 롱꺼계 조직의 움직임 말씀이군요. 지금 여기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진영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EV-1은 마음만 먹는다면 주변의 인공지능과 거의 모든 로봇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
만약 이진영이 이 로봇에게 수사를 이유로 전 국민의 로봇과 인공지능을 해킹하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실체진실과 법적안정성이라…….”
이진영은 특채출신이라 법 공부를 거의 안 했지만 아무래도 형사다 보니 형법은 잘 알고 있었다.
형법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이랄지 사상이 대립하고 있다.
실체진실은 바로 도대체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는 데 중점을 두고, 법적안정성은 실체진실을 밝혀내려다 보면 법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제동을 걸게 된다.
이 두 가지 사상이 충돌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공소시효제도다.
실체적 진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밝혀내려고 하면 법적안정성을 해치게 되고 결국 전체적인 법치주의를 해치게 된다.
적극적으로 모든 진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밝혀내면 좋겠지만 이 또한 적법수사절차의 원칙에 제동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