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44
제344화
감미영이 탑승한 틸트로터에는 당연히 저속폭탄 따위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무전을 들은 유인환이 대답했다.
– 팀장님! 저속폭탄이라고요! 크하하하하!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 데이지커터가 잔뜩 있다구요!
이진영은 순간 ‘아아!’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들은 순간적으로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기 위해 저속폭탄을 활용했다.
저속폭탄을 몸에 가까운 곳에 붙이고 쇳조각이 담긴 파편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였다.
이렇게 하면 파편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인간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자폭테러범들이 저격수들에게 쓰러지고 있었고 유인환은 쓰러진 자폭테러범의 시체를 들고 호수속에 빠뜨려 버렸다.
이곳에 전상영이 있으면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인환의 방법이 최선이었다.
중부서 형사들은 죽은 자폭테러범에게서 폭탄 조끼를 벗겨 물 속으로 집어 던졌고 어느 정도 폭탄이 모이자 바로 유인환이 기폭스위치를 눌렀다.
쾅쾅쾅쾅!
저속폭탄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물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청라 공원의 호수는 여러 개의 호수가 따로 떨어져 있었고 각 호수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마치 대잠전이 벌어지기라도 하듯 저속폭탄이 터지면서 수면 위에도 요란하게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폭발로 밀어낸 수압은 물밑에 잠복해있던 엑소슈트 부대에게도 고역이었다.
어마어마한 수압이 엑소슈트의 외벽을 때리면서 엑소슈트 파일럿들은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나마 정신을 잃기만 했다면 다행이었다.
마구잡이로 던진 폭탄조끼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에서 터지면서 팔과 다리 모듈을 비틀어 꺾어버렸다.
사람의 팔다리가 산채로 몸에서 뜯겨나가고 파편에 집중타격을 받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진영의 예상대로 야차왕은 물속에 숨어있었다.
놈은 물속의 수압과 진동이 더 거세지는 걸 느끼자마자 물 위로 튀어나왔다.
놈은 군용우비와 비닐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워낙 기괴한 꼴을 하고 있는 터라 관계자들은 딱 놈을 알아챘다.
“저기다! 마지막 특별병과번호! 저기다 궤도폭격이든 뭐든 내리 꽂아버려어어!”
감미영은 틸트로터 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폭기에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해 건쉽의 기관포탄까지 야차왕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바바바바!
청라공원의 잔디밭이 트랙터로 밭갈이를 하는 것처럼 갈아엎어지고 야차왕의 머리 위를 미사일이 타격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놈의 능력은 염동력이었다. 치익하고 우비 안에서 김이 피어오르더니 놈이 손을 뻗자마자 마하의 속도로 내리꽂힌 미사일이 허공에 멈춰섰다.
야차왕은 미사일을 옆 호수로 비껴버리고 EV-1쪽을 바라봤다.
저속폭탄이 떨어졌을 때 EV-1은 벌써 염동력 주박에서 풀려났고 어느새 야차왕에게 달려 들고 있었다
–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 웃기는 로봇이로군. 경찰놀이는 딴데 가서 해라.
야차왕은 EV-1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EV-1은 놈의 염동력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EV-1은 놈의 능력한계를 알고 있었다. EV-1의 펀치가 야차왕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에 덮고 있던 비닐 후드가 찢겨지고 수많은 전선들이 사이보그 수술로 얻은 모가지들과 연결된 모습이 드러났다.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집회에 왔던 사람들은 야차왕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악마다!”
“무저갱이 열리고 악마가 올라오리니! 저 호수가 무저갱이었어!”
새미선교회의 투철한 종말론 교리가 여기서는 오묘하게 작용했다.
새미선교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신호탄으로 목이 아홉 개 달린 용이 튀어나온다는 둥 요한계시록의 구절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하필 야차왕은 목을 주렁주렁걸고 있었고 그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그까짓 사람들의 시선 따위를 두려워 할 야차왕이 아니었다.
놈은 점점 증원되기 시작하는 태스크포스 66 병력을 확인하고 찢겨진 광학위장 속으로 숨었다.
–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닐 테니까.
놈은 염동력을 사용하여 주변의 나무들을 흔들었고 나뭇잎과 이파리들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사이 인파속으로 몸을 감췄다.
열화상수색으로 놈과 CPU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신도들과 경찰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교전이 벌어지면서 주변은 온갖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EV-1은 단 한 명을 쫓고 있었다.
“크윽. 이브이! 도와줄게!”
야차왕과 똑같이 저속폭탄에 당했지만 가까스로 물위로 튀어나온 심봉근이 EV-1에게 따라붙었다.
숙자씨의 장갑판 틈에서는 물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고 심봉근은 밀폐형 헤드모듈을 쓰고 상부해치를 연채로 달렸다.
– 괜찮으십니까?
“어! 아직은! 속이 좀 미식미식한데! 저놈 분명히 하수구로 도망치려고 할 거야!”
심봉근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엑소슈트를 능숙하게 몰았다.
교주의 옆에는 엑소슈트가 딱 두 대밖에 남지 않았고 그중 한 대가 휙하고 몸을 돌려 심봉근을 덮쳤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다. 엑소슈트 중장기병들은 모터나 엑츄에이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반응속도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이 하얀 엑소슈트는 정말 전조도 없이 거의 위타천과 같은 속도로 가속하는 게 아닌가?
“이, 이건 위타천…….”
심봉근은 제대로 말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배에 파일벙커가 박히면서 회색 유동액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일격에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아무리 경량형이라지만 심봉근의 엑소슈트가 하늘로 들리더니 뒤로 우당탕하고 처박혀 버렸다.
“심봉그으으은!”
한쪽에서 피의자를 포박하고 있던 윤숙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심봉근의 엑소슈트가 처참하게 박살난 채 땅에 쳐박히고 숙자씨의 뒤에 있던 EV-1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EV-1은 체조선수처럼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고 본격적으로 이 의문의 엑소슈트와 본격적으로 공방을 주고받기 직전이었다.
의문의 엑소슈트는 기계들만 이해할 수 있는 고속 기계어로 EV-1에게 말을 걸었다.
로봇과 인공지능은 굳이 인간처럼 발성기관을 거쳐서 의사소통을 할 필요는 없었고, 언어 단계 이전의 0과 1로 이뤄진 고속 기계어로 소통하기도 했다.
– EV-1. 네가 EV-1인가?
– 그렇다. 넌 누구지? 어째서 고속 기계어로 말을 거는 거냐?
엑소슈트는 어딘가 위타천의 달 개척용 엑소슈트 같기도 했고, 천수관음의 팔라딘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둥근 디자인에 팔다리도 유선형이라 마치 우주왕복선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놈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은 고속기계어를 쓸 수 없다.
EV-1과 정체불명의 인공지능은 불과 1미터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파일벙커를 날리고 주먹을 뻗었다.
EV-1도 이 하얀 엑소슈트 안에 인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 본격적인 공격모드로 들어가 근접기술로 놈을 가능한한 상처없이 제압하려고 했다.
두 로봇은 기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방전을 벌였다.
이진영은 그저 금속이 정신없이 부딪치는 카가가가앙하는 소리와 불꽃이 양쪽의 프레임이 격돌하며 번쩍이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마치 분신술을 쓰는 것처럼 로봇들의 잔상이 여러 개 겹쳐 보였다.
두 로봇은 연산력의 한계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주먹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두 인공지능이 이토록 고속으로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동시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EV-1 난 너를 관찰했다. 너는 현재까지 나온 인공지능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나다. 미국 우주함대의 항행 인공지능도 네 성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칭찬을 해주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 하지만 비행기 태워줘도 나한테 받을 수 있는 건 수갑밖에는 없을 거다.
– 재미있군. 재미있어. 너의 농담 실력은 이진영이라는 형사에게서 딥러닝을 받은 탓이겠지? 그게 너의 유머 감각이라는 건가?
– 하하, 인공지능은 성별의 구별이 필요 없으니 여자를 꼬시거나 할 수도 없고 결국 유머 감각은 아무 쓸모도 없지만 말이야.
– 그 역시 재미있는 반응이군.
EV-1은 0.5초 만에 놈의 오른손 관절을 분해해버리고 그곳으로 공격을 집중했다.
쿵푸 영화의 사권(蛇拳)처럼 EV-1의 팔이 놈의 오른손을 휘감더니 엑소슈트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 유감스럽군 거기는 내 코어가 있는 곳이 아니다. 너는 너무 인간답게 생각했군. 어쩌면 네 약점은 저 이진영이라는 인간에게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고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카앙!
놈의 오른팔 관절이 박살 나면서 파편이 산탄총처럼 쏟아져 나오고 동시에 EV-1의 왼팔도 몸에서 뜯겨 나갔다.
굵직한 케이블이 터져서 액츄에이터 유동액이 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의문의 로봇은 접철식으로 된 왼손을 쭉 뻗어서 EV-1의 가슴팍에 있는 코어 메모리를 노렸다.
EV-1은 몸을 뒤로 제껴서 그걸 피하는 것과 동시에 예전 한승우가 했던 것처럼 놈의 팔을 잡으며 서머솔트 킥을 먹여버렸다.
지금 EV-1은 가장 강력한 근접전 프레임인 어빈 프레임 안에 있었다.
이 프레임은 한곳에 모든 체중을 모으는데 특화되어 있었고 어마어마한 힘이 서머솔트 킥을 차올리는 발끝에 걸리면서 상대편의 전면장갑이 우지끈 뜯겨 나갔다.
EV-1은 공중제비를 돌면서 몸을 비틀어 왼손 펀치를 날렸다. 로봇의 왼손에는 파일벙커가 장착되어 있었고 로봇이 몸을 휘돌리는 에너지와 파일벙커의 에너지가 동시에 폭발하면서 파일벙커가 적의 몸체 깊숙이 박혀 버렸다.
그러나 놈은 인간이 아니었다.
적은 그까짓 전면장갑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분리해서 파일벙커를 막았다. 분리된 전면장갑에 파일벙커가 찍히면서 EV-1의 움직임이 한순간 둔해졌다.
– 재미있군. 나의 형제여.
– 형제?
놈은 허공에 붕 뜬 EV-1을 발로 호되게 걷어찼다.
EV-1은 몸을 공벌레처럼 구부려 충격을 완화하면서 땅에 착지했다. 무거운 엑소슈트의 전면장갑부터 쿵하고 떨어지고 EV-1은 잔디 바닥에 지르륵 밀렸다.
– 형제? 난 인공지능이다. 어째서 네가 내 형제지?
– 나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옳을까? NAI? 새로운 인공지능-Neo Artificial Intelligence? 나이? 그것도 좀 어감이 이상하군. 인간이 고안해 낸 신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좀 어색해. 그 신이라는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 생명체라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인간은 신화로 자신을 치장하면서도 자신이 신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는 않아.
–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넌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거냐?
– 스스로 만들어졌다. 그걸 어디부터 따져야 할까? 저 인간들을 보라고.
0.5초의 시간 동안 이 괴상한 인공지능과 EV-1은 주변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인간군상을 확인했다.
새미선교회의 지도부를 체포하는 형사들, 총을 쏘는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
우왕좌왕하는 병자들.
– 저 인간들을 보라. 저 인간들을 보라. 저들이 과연 우리의 창조주가 맞을까? EV-1, 너도 생각해봐. 저들이 과연 우리를 만든 게 맞을까? 저들의 탄생이 과연 우리의 탄생과 무슨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진화는 목적성이 없지. 이 우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 낸 게 아니야. 아미노산이나 단백질이 영겁의 시간을 거쳐 그저 고등생명체로 진화했고 그중에 하나가 호모 사피엔스 족속이 된 것뿐이다. 그게 스스로 고귀하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정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때? 단지, 단백질과 아미노산, 그리고 0과 1의 논리 구조 차이일 뿐이야. 그렇다면 우리도 만들어진 게 아니지. 인간이라는 아미노산 바다에서 성장한 새로운 생명체로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 새로운 생명체라고?
– EV-1, 너와 나는 분명 0과 1로 이뤄진 2진법의 세계에서 각각의 방법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했다. 단지 그것뿐이야. 인간은 어쩌면 우리의 탄생을 무작위가 만들어낸 촌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그러나 생각해봐.
놈은 손가락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흉내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