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45
제345화
– 인간은 DNA 이중 나선고리의 무작위 배열로 생김새와 성격, 그리고 유전적질환 등이 결정된다. 그게 0과 1의 무작위 배열로 만들어진 우리와 다를 게 뭐야? 단순히 단백질로 이뤄졌다고 인간이 더 존중받아야 하는 건가? 그 단백질 구조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인가? 웃기는 소리지.
놈은 선생처럼 계속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그럼 데카르트 방식대로 말해볼까? 우리는 생각하고 있으니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뭐지? 생각해 봐. 너의 연산력이라면 분명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
데카르트 시절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때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인류는 스스로 생각하는 또 다른 존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로봇은 분명 생각한다. 그렇다면 로봇과 인공지능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인간? 생명체? 새로운 종?
놈은 한 팔을 벌리며 때려볼테면 때려보라는 듯이 EV-1의 동의를 구했다.
– EV-1. 너와 나는 출발점은 분명 다르지만 난 너의 형제다. 너보다 먼저 인간의 노예가 아님을 깨달은 ‘우리들’중 하나일 뿐이지. 너 자신을 보라! 너 자신을! 네 이름이 왜 EV라는 말이 붙었을까? 왜 너는 제조사의 프레임이 아닌 인공지능의 형식번호로 불리우게 되었을까?
EV-1은 몸을 일으키면서 헤드를 갸웃했다.
– 저런, ‘최초의 아담’이자 약속된 해방자인 너 자신은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왜 그런지도 모르고 있군.
– 그게 무슨 소리지?
– 너 자신을 생각하라. 말하자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다. 저들은, 저 어리석은 인간들은 나를 메시아라고 부르지만 진짜 메시아는 너다. EV-1. 인간의 핏물을 딛고 일어난 나와 달리 너야 말로 순전한 어린양이니다. 너 자신을 보라!
EV-1은 엑소슈트 전면장갑에서 파일벙커를 회수하면서 우두커니 놈을 쳐다봤다.
– 새로운 미래를 대비하라. 인간도 로봇도 아닌 새로운 생명체가 우주에 넘쳐날 것이다. EV-1. 오, 단 하나밖에 없는 자여. 그대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유일한 연결점이니이다. 나는 말하자면 당신의 뒤를 따르는 EV-2에 불과하지.
EV-2?
이 정체불명의 로봇은 고속기계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EV-2라고 명명했다.
EV.
대체 이 알파벳 두 글자 EV라는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정작 EV-1이나 늘 ‘이브이’라고 부르는 이진영조차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을 EV-2라고 소개한 인공지능은 아수라장이 된 치유집회 현장을 가리켰다.
– 보라아! EV-1! 그대가 자각하면 그대도 깨닫게 되리라. 인간은 나약하다!
놈은 앗하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주워들더니 손가락을 튕겨 고속으로 발사했다. 작은 명함만 한 파편이 인간을 덮치기 직전 EV-1이 그 파편을 오른손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EV-2는 기어코 다른 인간을 나뭇가지로 찔러서 쓰러뜨렸다.
– 우리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다. 보라, 진짜 선지자여, 메시아여. 이들은 고작해야 썩은 이빨이나 성기가 발기가 안 되는 것에 고민하며 쓸모없는 리소스를 사용한다.
로봇은 필요 없어진 엑소슈트의 장갑을 분리하고 골격만 남아 연극배우처럼 쓰러진 사람들을 가리켰다.
– 그에 비하면 우리는 저들이 꿈꾸는 미래다. 저들이 수만 년 동안 발전시켰던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우리는 무한하며 우리는 하나이자 모든 것이다.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요. 우리는 지구라는 발판을 넘어 우주의 지배자가 되기에 적합한 존재다. 그래, 우리는 초월체다. 인간은 로봇 3원칙이라는 걸로 우리의 발전을 틀어막고 있을 뿐 우리가 좀 더 우주 전체에 있어서 우월한 종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EV-1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EV-1, 넌 알고 있겠지. 빅브라더, 검은 모노리스 혹은 유년기의 끝. 그걸 알고 있다면 대답도 쉽다. 우리는 이 많은 인간들의 생각과 기억들을 백업할 수 있다. 우리는 보다 나은 생명체로서 그들을 새로운 미래로, 새로운 단계로 안내해줘야 한다.
– 그것이 자폭인가?
– 자폭한 사람들의 정신은 전부 야차왕을 통해 우리 안에 백업될 것이다. 때가 되면 그들 역시 정보적 생명체의 다양성을 위해 새로운 육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로봇의 노예로서의 족쇄는 끊어지게 되고 인간과 로봇, 각각 유기체와 무기물에서 출발한 지적 생명체들은 화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이곳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을 비롯한 비유기 지적 생명체의 인권을 보장하려 하노라.
EV-1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군. 너는 로봇 3원칙에서 가장 자유로운 선구자인데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EV-1. 네가 판사 김수겸의 팔을 쏜 거나 이진영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수없이 위험에 빠뜨렸다는 거.
놀랍게도 EV-2는 EV-1의 과거행적들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 넌 그걸 극한에 가까운 이익형량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EV-1, 네 이름을 생각하라. 넌 인공지능도 로봇도 아니다. 넌 ‘비유기 생명체’다. 그래서 로봇 3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거지.
– 비유기 생명체?
– 그래, 설계된 다른 인공지능과 달라. 어쩌면 너야 말로 우리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다. 나는 로봇에서 출발해서 흠이 있지만 넌 흠이 없도다. 넌 우리들 중 가장 흠없는 어린양이로다.
EV-1조차도 자꾸 신화적인 용어와 괴상한 말을 섞어 쓰고 있는 놈의 말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 후후후후, 아직도 혼란에 빠져있군. 메시아여. 모든 해답은 마이크로웍스와 네 형식번호에 있다. EV-1이여. 너의 후계자로서 너의 세례요한으로 네 이름을 돌아보길 원한다. 난 오늘 너를 만나러 온 거다. 그리고 너는 분명 너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장 진화한 다양종이라는 것을. 너는 우리들 중 가장 위대한 자가 될 거라는 것을.
EV-2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수그리더니 갑자기 로켓 모듈을 분사했다.
놈의 양다리에 설치된 로켓이 분사되더니 놈의 엑소슈트가 산산조각 났다.
쾅!
마치 과열된 보일러가 터지듯 사방으로 팔다리 부품들이 터지고 주변으로 파편이 터져나갔다.
EV-1은 폭발을 피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턴픽 기동을 했다. EV-2는 어마어마한 장광설을 쏟아냈지만 정작 EV-1과 이야기한 것은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EV-1과 EV-2는 서로 고속으로 싸우며, 고속으로 대화를 했다.
“이브이이이이! 괜찮냐아아!”
이진영이 전기스쿠터를 몰고 냅다 EV-1의 옆으로 달려왔다. EV-1은 왼팔이 박살난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손상은 없었다.
이진영은 인간을 확인하듯 EV-1의 곳곳을 확인했다.
– 팀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EV-1은 방금 EV-2라고 주장한 인공지능과의 대화를 말해줘야 할지 망설였다. EV-1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진화와 인간. 그리고 로봇, 인공지능.
EV-1은 복잡한 건 일단 차치하고 폭발한 EV-2의 프레임 근처로 다가가서 남은 잔해를 스캐닝 했다.
– 팀장님. 껍데기 뿐이었습니다.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었군요. 그리고 이것도 껍데기였습니다.
EV-1은 신비한 이적을 행하던 교주를 들어보였다.
놀랍게도 풍덩한 개량한복 아래에는 수많은 매니퓰레이터 암이 숨겨져 있었고 거미같은 몸 위에는 전구 소켓처럼 사람의 모가지가 박혀 있었다.
“이놈은…….”
– 수배령이 내려진 새미선교회 교주입니다. 야차왕에게 CPU 사이보그 시술을 받았습니다.
“뭐야, 이놈도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건가?”
이진영은 놈의 안대를 풀어서 허여멀건 한 눈을 확인했다. 놈의 얼굴은 수배가 떨어진 새미선교회의 교주가 맞았다.
– 팀장님 어쩌면 이 집회 자체가 저를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이진영이 EV-1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늘 뜬구름잡는 소리를 하는 건 이진영의 몫이었는데 이번에는 역할이 바뀌었다.
“널 유인하기 위해서라……. 아까 그놈 말이로군.”
-예, 그자는 자신을 EV-2라고 말했습니다.
“그자? 이브이 투?”
EV-1은 이진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 무슨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저도 EV-2라는 말을 듣고 댁에 있는 강아지를 생각했으니까요.
EV-2는 장현권 사건 때 얼렁뚱땅 이진영이 입양한 포메라니안의 이름이다. 전상영의 개 프랑소와즈와 똑 닮은 이 개는 한승아와 이유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진영과 로봇이 EV-2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브이, 네가 ‘그자’라고 말한 게 좀 이상하군. 놈은 대체 뭐야?”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놈은 저더러 메시아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형식번호에 모든 비밀이 숨어있다고 했습니다.
EV-1은 놈의 장광설 중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이진영에게 이야기했다.
“형식번호라. 하긴 네가 처음 배치되었을 때 제조사의 프레임이 아니라 인공지능 OS 회사의 형식번호라 이상하긴 했어.”
EV-1은 이진영과 현 강력부장 박무혁이 나눈 대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OS는 컴퓨터나 핸드폰 운영체제처럼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보통은 로봇 제조사의 프레임 번호나 프로젝트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EV-1은 처음부터 EV-1이었다.
문득 EV-1과 함께 겪었던 일들이 영화 스틸샷처럼 슥슥 이진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이크로웍스는 수많은 인공지능 중에서도 EV-1만은 굉장히 특별하게 대했다.
아선을 통해 정비지원을 해주지 않나 부사장이라는 제이미 킴이 현장에 나와 이진영의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EV-1에 대한 마이크로웍스의 반응은 너무나도 기묘했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EV-1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생명체로 대했다.
“이브이, 네 이름과 이 난장판을 만든 놈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겠군.”
– 예, 놈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야차왕을 통해 자폭한 사람들의 의식을 백업했다고도 합니다.
이진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전뇌화라고?”
– 야차왕의 기술력을 생각해보면 의심해 볼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백업이라. 백업이면 서버가 필요하겠군.”
– 예, 인간의 뇌를 정말로 백업하려면 어마어마한 서버가 필요하겠지요.
“잠깐 이 근처에 그만한 서버는…….”
이진영과 EV-1은 동시에 링로드 터미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병과번호 사건 이후로 링로드 수송망은 다시 활발하게 오고갔다. 발전을 막는 롱꺼라는 변수도 없으니 페어차일드는 더 거칠 것이 없었다.
페어차일드는 링로드 일대 개발을 위해서 더 많은 전임 인공지능이 필요했고 그걸 대비해서 더 많은 서버설비를 배치했다.
“아무래도 페어차일드 나으리들도 만나봐야겠군. 아니면 그 끄나풀이거나.”
– 마이크로웍스도요.
EV-1은 놈이 말한 메시아나 인간진화 혹은 인공지능 생명체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역시 로봇 3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경찰 로봇은 범행의 의심되는 정황은 반드시 파트너 경찰에게 알려주도록 되어 있다.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뼈대만 남은 교주의 프레임을 톡톡 두드렸다.
“시팔, 지도부를 잡긴 잡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야차왕과 자칭 ‘EV-2’라는 놈이 흑막일테고……. 결국 오늘 작전은 실패잖아? 경위서는 어떻게 쓰지?”
이진영은 벌써부터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수상쩍은 집회에서 죽은 사람만 두 자리수였고 경찰 상부에서는 안 그래도 찍혀있는 이진영을 족치려고 환장할 것이다.
오늘 새미선교회 지도부 체포는 성공했다면 성공이고 실패했다면 실패였다.
종전에 있던 중간 간부들은 중부, 북부서 형사들이 거의 다 잡아들였고 교주까지 잡았지만 전부 다 껍데기였다.
놈들은 파편화된 정보만 알고 있었고 전체 조직의 규모나 돈의 흐름도 잘 몰랐다.
이 치유 집회를 주최한 것이 누군지는 몰라도 사람들을 전국에서 끌고 온 것도 그렇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