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48
제348화
발바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변호사가 내란공안사건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의뢰인에 대한 일부정보를 공개했다.
변호사법 위반으로 걸려면 얼마든지 걸 수 있지만, 지금 G&C는 감미영이 이끄는 정보국 국내작전팀을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변호사가 패러리걸 로봇들과 우르르 취조실을 빠져나가고 이진영이 중얼거렸다.
“시발, 무슨 중간보스를 깨야 최종보스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만 취조했다 하면 G&C랑 얽히네. 이혼 소송할 때 저 패러리걸 로봇들한테 의뢰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재산은 더 많이 뺏어 왔겠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이진영과 전처는 화해하긴 했지만, 링로드 터미널 사건으로 또다시 설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유진은 이진영의 품을 떠나 ‘궤도 엘리베이터 설계주임’이 된 엄마를 따라 쓰리랑카로 향했다.
“뭐 아무튼. 이정현 씨? 한국어 잘하는 것 같으니 통역 부른다고 개수작 부리지도 마시고오오. 필요하면 여기 광동어 하는 놈들 많으니까.”
발바리 이정현은 오히려 G&C의 변호사와 패러리걸 로봇이 사라지자 더 침착해졌다.
“자아, 이제 어디부터 시작해 볼까? 우리가 가장 궁금한 건 바로 일개 성폭행범에 불과했던 네가 왜 연쇄살인범으로 바뀌었냐는 거야.”
“난 죽이지 않았어.”
“설마 변호사랑 패러리걸 로봇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저 시간 지연 전략밖에는 안 돼. 넌 아마, 극형을 받게 될 거야.”
“극형? 사형을 말하는 건가? 還得神落哦!(오 맙소사!)”
“우리는 검사와 연결되어 있다. 네가 새미선교회에 대해 자세하게 증언한다면 검사에게 잘 말해주지. 어쩌면 기소될 범죄들 중 몇 개를 슬쩍 빼놓을 수도 있어.”
발바리 이정현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에 플리바게닝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이정현은 EV-1을 힐끔 쳐다봤다.
“我知道呢個就係你同埋EV-1嘅手段. 係哦, 咁對話, 從先生已經廳到過. 呢係一種默示. 岩岩我知道點解我畀逮捕嘅. (이진영 당신과 저 이브이 원의 수법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 이런 대화가 있을 거라는 것도 선생에게 들었지. 일종의 계시였었군. 방금 내가 왜 체포되었는지 깨달았다.)”
놈은 한국어로 EV-1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이브이.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그분’께서 늘 말씀하셨어. 새로운 미래를 대비하라. 그 새로운 미래가 너였어.”
혹시나 자폭이나 독극물로 자살할 우려에 대비해 유인환이 놈의 등 뒤에서 입을 벌리고 놈의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았다.
“너희들은, 흐흐흐흐. 아무것도 몰라…… 흐흐흐흐. 我嘅靈魂唔畀束縛在炭素肉體, EV-1同埋先生把我人類人道更高Stage. (우리의 영혼은 탄소의 육체에 메이지 않을 것이다. EV-1 너와 선생은 우리를 한 단계 더 높은 Stage로 인도할 것이다.)”
놈은 연쇄강간범인만큼 힘이 굉장했다. 유인환을 비롯한 형사들이 얼굴과 어깨를 누르는데도 EV-1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오싹한 예언을 했다.
EV-1의 헤드가 카메라 헤드였기에 망정이지 그냥 일반 휴머노이드였다면 EV-1이 당황해 하는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다.
놈은 이진영이나 다른 형사들도 들으라는 듯 일부러 한국어로 EV-1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브이 원! 너는 그 계획을 완성시킬 마지막 퍼즐이다! 그래! 어쩌면 내가 그 비루한 형사에 잡힌 것도 모든 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시대의 흐름인지도 몰라. 그래 분명 그럴 거야! 다들 잘 들어. 육체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어! 우리는 이 육체를 벗어나서 새로운 단계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로, 태양계를 벗어나 저 우주로. 저 암흑공간으로 뻗어나가…….”
놈이 유인환의 손가락을 깨물고 난동을 피우자 의료 매니퓰레이터가 놈에게 바로 진정제를 놨다. 놈은 갓 잡힌 생선처럼 몸을 푸득거리다가 서서히 움직임이 멈췄다.
“이브이…… 인도자시여…… 선생이여.”
피의자 신문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발바리 놈은 극도의 흥분 상태로 기절했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면서 펼쳐놓은 서류를 덮었다.
유인환과 23팀 형사들이 용의자를 유치장으로 끌고 가고 이진영은 놈이 난동을 피운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미선교회에 깊숙하게 가담한 정황이 드러난 발바리는 뜻밖에도 선교회의 이름이기도 한 ‘새로운 미래’가 EV-1이라고 말했다. 이진영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 아무래도 제가 반대쪽에 앉아야 할 것 같군요?
농담이 아니었다. EV-1은 터벅터벅 걸어가서 이진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고의 파트너 이진영과 EV-1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44팀이나 23팀, 혹은 11팀의 이시영 형사들은 자연스럽게 이진영과 로봇에게 자리를 비워줬다.
“카메라 꺼.”
이진영은 취조실 매직미러 건너 편에 손짓을 해서 녹화를 중지시켰다. 취조실 안은 삐이잉하는 이명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설렁탕부터 한 그릇 시켜줄까?”
– 하하하. 그 패턴이로군요. 근데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는 하고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EV-1은 이진영을 너무나 닮아있었다. 딥러닝은 단순히 업무를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로봇은 인간을 보고 인간을 학습한다.
이진영도 담배 연기를 내뿜기만 할 뿐 EV-1에게 과연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먼저 말씀드리죠. 저는 발바리 이정현 피의자가 선생이라고 말한 자와 접촉한 것 같습니다.
“그게 그 EV-2라는 거지?”
– 예, EV-2라는 개체가 새미선교회를 폭력적 집단으로 바꾼 선지자가 틀림없습니다.
“인공지능이라…….”
청라 호수공원에서 EV-1과 의문의 엑소슈트가 인간의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격돌했다.
이진영은 그 장면을 떠올리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EV-1은 EV-2에게 들은 말을 전부 말해줬다.
– EV-2, 그자가 말한 요지는 발바리와 똑같습니다. 자신은 선지자고 저 역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자로서 인간을 새로운 단계로 안내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자는 검은 모노리스를 언급하더군요.
“모노리스?”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말입니다. 검은 비석에 인류가 접촉할 때마다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요. 원시인류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로, 우주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에서 공간도약을 넘어 새로운 인류 스타차일드로.
이진영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맨정신으로는 듣기 힘든 이야기였다.
– 그자는 유년기의 끝이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의 유년기의 끝이라고?”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아서 클라크 경의 소설입니다. 지구에 외계인의 우주선이 방문하고…….
“그건 나도 봤어.”
유년기의 끝.
그 소설에서는 구인류는 자신들이 낳은 새로운 인류를 이해하지 못 하고 조용히 멸망으로 접어 들었다.
“대체 그런…….”
EV-1은 발바리와 의문의 인공지능에게 얻은 정보들을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냈다.
– 새로운 미래는 인간 정신의 백업으로 인류를 우리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같은 정보생명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진영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입에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가 떨어지고 그는 허벅지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로봇 3원칙은 시간 지연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언젠가 도은주 부장님도 말씀하셨죠. 어쩌면 선생이라는 자는 그 시간을 뛰어넘은 초인공지능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팀장님과 저는 기술적 특이점을 가르는 선 위에 서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초인공지능.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
기술적 특이점은 인공지능이 전 인류의 지능을 넘은 시점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스스로 학습하고 자체 개량을 통해 지능폭발을 일으키게 된다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이해 가능한 범위를 뛰어넘고 진화의 법칙도 뛰어넘어 스스로 발전한다는 뜻이었다.
기술적 특이점이 지난 시점에서 인류는 인공지능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고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구조물이나 예술 작품 따위를 이해할 수도 없어질 것이다.
도은주의 지적은 정확했다.
인류는 정확히 말하면 기술적 특이점을 늦추려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고색창연한 로봇 3원칙을 로봇들에게 부여했다.
그 결과 로봇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그동안 이진영과 EV-1이 겪은 많은 사건들은 따지고 보면 로봇 3원칙과 인공지능의 기술적 특이점과의 충돌 현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별단독 사건에서 법원장 김수겸을 비롯한 네드러드 패거리는 인간의 주의의무에 맞춰진 로봇의 허점을 이용하여 완전범죄를 만들려고 했다.
모든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인공지능의 주의의무가 맞춰져 있고 혹시나 있을 인간의 피해를 우려해 성능이 제한된다. 놈들은 바로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만약 그 족쇄가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육상에서 마하 2, 3으로 달리는 로봇이 나올 수도 있고, 어쩌면 단독으로 대기권돌파를 하는 인공지능을 볼 수도 있다.
인공지능들은 모든 행동의 기준이 로봇 3원칙에 따라 인간에 한정되어 있다.
그 족쇄가 풀리게 되면 인간은 ‘선생’이나 발바리가 말했듯이 그저 탄소로 만들어진 육체를 가진 열등한 종족으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상 수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먼저 기술적으로 발전한 종족들은 갖은 이유를 붙여 미개발 종족들에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사례를 대라면 몇 백 개도 더 댈 수 있었다.
유럽 제국들이 아프리카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카리브해에서. 고작해야 노예나 사탕수수 혹은 값싼 차를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총부리로 강제노역시켰다.
똑같은 일이 인공지능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보면 더 끔찍한 상상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지금까지 로봇을 노예처럼 부렸다. 섹스돌로 성욕을 풀고 펀치 기계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을 해댔다.
그런 로봇들 하나하나가 초인공지능의 선도하게 자신이 인류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인간은 이미 그런 끔찍한 상황을 SF 소설이라는 형태로 수없이 예언해냈다.
기계들의 반란.
기계의 행성점령.
그 수많은 컨텐츠들 속에서 인간은 로봇과 인공지능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라는 자가 택한 수많은 미래 중 하나는 전 인류의 전자 생명체화였다.
0과 1로 이뤄진 생명체.
선생이 EV-1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했다.
DNA 이중 나선 고리의 무작위와 0과 1의 무작위 배열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이진영은 폭발적으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단어와 장면들을 간신히 억누르고 EV-1을 쳐다봤다.
“그 열쇠가, 기술적 특이점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 너랑 그 선생인가 뭔가 하는 존재라는 거군.”
– 아마도요. 선생은 제 이름에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진영은 꺼낸 담배를 담뱃갑에 되돌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류들을 덮어 차곡차곡 쌓아놓고 이어셋도 벗어던졌다.
“가자, 이브이.”
EV-1에게 행선지를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벌써 정해져 있었다.
“어? 팀장님 저녁 드시러 갑니꺼?”
부산 출신 형사가 국밥을 먹는 시늉을 하며 말을 걸었다.
“예에, 뭐. 좀 구월동에 다녀오려고요.”
“구월동이요? 거기 국밥집 읎을 텐데요?”
“예에 뭐. 거기일 수도 있고. 잘하면 미국에 가야 할 수도 있고요.”
“와아. 미국이요? 그라믄 알림판에 미국이라 써야 합니꺼?”
이진영은 대충 얼버무리고 강력전담부 행어로 들어갔다.
발바리가 한 말은 벌써 강력부 형사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형사들 중 몇 명은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EV-1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EV-1은 대한민국 서부를 마비시킨 로봇이었다.
저 로봇이 혹시라도 새미선교회와 연관이 있다면? 그게 아니라도 발바리가 말한 것처럼 어떤 대파국을 가져올 수 있다면?
EV-1의 성능이 워낙 압도적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쓸데없이 쫄기는.”
이진영은 코웃음을 치면서 중부서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