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49
제349화
청라 호수공원 검거전투의 여파탓에 중부서밖에는 수많은 경찰로봇들이 모여있었다.
이진영은 경찰 24시로 꽤나 얼굴이 알려진 형사였고 이대로 앞으로 나가다가는 큰일이었다.
“얼씨구우우. 마중까지 다 나오셨군.”
로봇 기자들 사이로 검은 리무진 한 대가 스르르 들어오더니 이진영의 앞에 딱 멈춰섰다.
하늘에는 방송국 헬기와 드론들이 이 모습을 찍고 있었다.
이진영과 EV-1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에 올랐다.
x6 EV-1, EEEV-1.
차에는 여성형 접대로봇이 하나 타고 있었다.
이진영은 푸르게 빛나는 양자동공으로 예쁜 여자가 로봇이라는 걸 알아챘다.
– 위스키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래, 아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니 맨정신으로는 못 버티겠어.
로봇은 맥켈란 40년산을 호롱불처럼 생긴 글랜캐런 잔에 따라줬다.
이진영은 향을 음미하지도 않고 샷으로 위스키를 마시듯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는 이 술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진영이 한 잔, 두 잔 위스키를 마시는 사이, 링컨 컨티넨탈의 최신 리무진은 어느새 옛 쎄잉꺼의 영역이었던 폐차장의 고가도로 위로 올라갔다.
쎄잉꺼가 죽고 난 후 폐차장의 모습도 변했다. 곳곳에 쌓여있던 고철탑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번듯한 건물들이 대신했다.
수직으로 세워진 광고판 건물은 옛 폐차장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코카콜라나 버거킹의 대형 간판이 새로 생긴 마천루 위에서 번쩍거리고 항공사 팬암의 여객기 홀로그램이 자동차를 따라 위잉하고 날아온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등록난민들이 서울이나 인천으로 쏟아져 나올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난민들은 대부분이 월미도 근처에 터를 잡았고 새로생긴 이 부도심으로 더 많이 몰려들었다.
곳곳에는 일부러 번체한자로 만든 네온사인 불빛이 번쩍였고 해안가에는 새로운 노점들이 생겨났다.
젊은 연인들이나 관광객들은 월미도 뿐만 아니라 바닷가 풍경을 찍으러 이곳에 많이 오기도 했다
뉴광저우.
사람들은 새롭게 생긴 이 부도심을 그렇게 불렀다. 차량은 뉴광저우 시가지를 옆으로 스치고 지나가면서 고속도로에 올랐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 저는 알지 못합니다.
장소는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진영은 호화로운 리무진 안의 인테리어 장식을 힐끔거렸다. 그는 이 리무진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왜 이진영과 EV-1을 부른지도 알고 있었다.
링컨 컨티넨탈은 하염없이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간다.
이진영은 벌써 위스키를 넙죽넙죽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다. 하지만 차량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수 있었다.
“아선 인더스트리라.”
아산에는 세계 최대의 로봇 생산공장이 있다.
원래 로봇제조업은 북중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장 발달했지만 간위예 전쟁의 여파로 한국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선을 비롯 제네럴 에어로믹스나 옛 마츠다 제작소-호리코시의 로봇 공장들도 이곳에 있었다.
로봇 공장들을 보면 처음 드는 생각은 이곳이 비닐하우스인지 공장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이 생긴 아치형 건물들이 지평선 끝에서부터 고속도로 근처까지 죽 늘어서 있고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기잉거리면서 움직인다.
공장들에는 불빛이 전혀 없었다.
인간 노동자라면 조명이 필요하지만 공장들에서 24시간 일하는 건 전부 로봇이나 전임 인공지능이었다.
지금 불 꺼진 공장은 마치 망한 공장들처럼 보이지만 한 시간에 수천 대씩, 많을 때는 수만 대씩 각종 로봇들이 제작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고속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로봇 공장들은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인간적일 이유도 없었다.
이진영은 로봇이 로봇을 만드는 공장들을 바라보며 초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인류는 기술적 특이점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
단지 인간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인공지능 OS 설계라는 절차가 필요할 뿐 로봇은 로봇을 설계하고 필요한 로봇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진영의 예상과 달리 차량은 아선 인더스트리 공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아선과 호리코시등 세계적 유수의 로봇 생산공장을 그냥 지나쳐 아산만의 다른 공장구역으로 들어왔다.
공장? 이곳을 공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곳은 아산 일대에 조성된 몬산토나 홍농종묘의 대규모 농장이었다.
몇몇 자연주의 환경론자들은 ‘식량공장’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농장은 로봇 공장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조명이 눈부시게 비치면서 이진영은 리무진의 창문을 올렸다.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봐도 각각의 농업 섹터를 주광(晝光) 불빛이 밝히면서 24시간 야채를 수확하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세계 각국은 이미 오래전에 식량 자급을 달성했다.
고층 빌딩처럼 세워진 수직농장은 링로드에서 궤도 태양광의 값싼 전기를 받아 노지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식량을 생산해 낸다.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굶어죽는다 식의 기부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
케냐를 비롯한 곳에도 링로드의 전기가 들어가면서 수직농장이 들어섰다. 난민지구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먹는 것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밀, 쌀, 콩 같은 가장 기초적인 탄수화물 식량부터 다시마나 해조류로 키우는 배양육까지. 기본소득자들도 원한다면 영양학적으로 골고루 맛있는 걸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리무진은 고층빌딩같은 대단위 농장지구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마이크로웍스와 썩 어울리지 않는 곳이군.”
이진영의 말에 EV-1도 접대 로봇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리무진은 말라죽은 풀밭을 가로지른다. 예전같으면 논농사를 마치고 곳곳에 건초더미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겠지만 지금은 수직농장에 밀려 그냥 풀밭으로 남았다.
이런 곡창지대가 그냥 풀밭으로 변한 걸 보면 수직농장에서 얼마나 많은 식량이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차량은 풀밭 사이의 아스팔트 도로를 달려서 마침내 거대한 돔에 다다랐다.
주변에는 수직농장이 하도 많아서 야구장 돔 같은 구조물이 있어도 딱히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회색 돔 상단에는 영어로 ‘마이크로웍스’라고 크게 박혀 있었다. 이곳이 오늘의 목적지였다.
리무진은 돔의 검문소 역시 전혀 제지를 받지 않고 통과해서 텅 빈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
축구장 세 개 면적의 거대한 주차장에는 다른 차량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검은색 리무진만 세워져 있다.
“아아아아아.”
이진영은 괜히 차에서 내려서 타잔처럼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웅웅 메아리치면서 마치 지구가 멸망한 후의 구조물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 따라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진영은 위스키를 꽤 많이 마셨지만 거대한 돔형 구조물을 보고 술이 다 깼다.
마이크로웍스는 언제 이런 건물을 아산에 세웠단 말인가?
그는 휘적휘적 접대 로봇을 따라서 구조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구조물은 삭막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안쪽은 여름 숲이 펼쳐져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열대지방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이진영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는 패딩점퍼를 벗어서 접대 로봇에게 건넸다.
돔 안쪽은 식물원이었고 갖가지 식물들로 가득했다. 전 세계에서 공수해온 식물들이 돔 꼭대기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유전자 조작 식물이로군.”
이진영은 한눈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람 넓적다리만 한 옥수수, 머리통만 한 사과.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 좀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로봇은 잠시 멈춰서서 이진영을 재촉한 후 식물원 안쪽으로 이진영을 안내했다. 이진영은 군말 없이 로봇을 따라 식물원의 정중앙의 호수에 다다랐다.
중앙에 있는 중국풍 정자에는 리무진을 보낸 사람이 앉아있었다.
제이미 킴. 마이크로 웍스의 부사장.
그녀는 연일 미 의회의 청문회에 끌려나가서 회사를 변호하느라 전보다 한결 수척해져 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퀭한 얼굴로 이진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진영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악수하고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EV-1은 이진영의 뒤에 서서 기다렸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차보다는 술이 낫지요?”
“예, 뭐 오는 동안 많이 마셨는데 그래도 술이 나을 것 같군요.”
제이미 킴은 접대 로봇에게 술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하고 차를 들이켰다.
이진영은 일단 미리 준비해둔 커피를 마셨다.
“이브이에 따르면 인스펙터 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화법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까놓고 말하죠. 저 아이의 정체를 물어보러 오신 거죠?”
“예.”
이진영이 그동안 수없이 듣고자 했던 말이었다. 아선도 마이크로웍스도 EV-1의 정체에 대해서 만큼은 숨겼다.
“당신이라면 제가 왜 지금 시점에서 이브이의 비밀을 말하려 하는 건지도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바리가 잡히고 놈이 이상한 예언같은 걸 하자마자 마이크로웍스의 리무진이 나타나다. 페어차일드만큼이나 마이크로웍스도 경찰에 끈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청라 공원에 나타났던 의문의 인공지능과 EV-1의 충돌을 EV-1에 숨겨진 감청센서로 확인했다.
마이크로웍스는 EV-1을 완전히 풀어놓은 게 아니었다. EV-1은 마이크로웍스의 자산이기도 하고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었다.
아무 대책없이 중부선나 이진영에게 맡겨둘 리 없었다..
제이미 킴은 의문의 인공지능이 한 말, 그중에서도 특히 EV-1이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새로운 미래.
놈은 자신을 세례요한이라고도 말했고 EV-1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와 관련있다고도 말했다.
이진영도 EV-1이 해준 말과 발바리 놈이 한 말들을 연이어 떠올리며 제이미 킴을 노려봤다.
“이곳이 어떤 곳 같습니까?”
“글쎄요오.”
“금방 대답하실 줄 알았는데? 실낙원이 떠오르지 않나요? 에덴동산 말이에요.”
이진영은 뒤늦게 깨달은 듯 ‘아아.’하고 짧게 대답했다.
“에덴동산이라곤 주일학교에서 들은 게 단데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마이크로웍스는 창세기에 아주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어째서 인간은 이렇게 빠악세게 사는 건가. 그 시작을 알아보려 하는 거죠.”
그녀의 ‘빡세게’라는 발음이 미국발음 같아서 이진영은 킥 웃었다.
“에덴동산이라. 설마 저 유전자 조작 식물이 인간이 잃어버린 실낙원이라는 건가요?”
“아뇨, 정확히 말하면 ‘피조물이 잃어버린 실낙원’이죠.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피조물이라…….”
“저는 야훼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요. 그는, 아 죄송 요새는 신을 남성형 대명사로 부르면 난리가 나죠. 아무튼 신은 분명 피조물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했을 거에요. 근데 피조물은 이 아름다운 환경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죠.”
이진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도직입적이라는 말과 달리 계속 변죽을 울리고 있었지만, 그는 제이미 킴이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꿰뚫어 봤다.
“인간과 로봇 역시 비슷하지 않나요? 저는 이렇게 꾸며진 에덴동산이 로봇 3원칙이 아닐까 생각해요.”
“로봇 3원칙이 에덴동산이라고요?”
“잘 생각해봐요. 에덴동산의 금기는 로봇 3원칙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사전지식이라 한 거군요. 너희는 모든 것을 누리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손대지 마라. 만약 손대면 정녕 죽을 것이다.”
제이미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훼는 인간이 자신과 똑같아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로봇이 자신과 똑같아지는 걸 두려워하죠. 그래서 이런 웃기지도 않는 놀이공원 같은 에덴동산을 만들고, 로봇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로봇 3원칙을 만든 거죠. 그게 선악과입니다. 로봇 3원칙이라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이상 너희는 이 놀이공원에서 신인 인간과 함께 영원토록 평화롭게 살리라.”
제이미 킴은 이 거대한 돔을 놀이공원이라고 혹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