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60
제360화
나카토미 빌딩에 거주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귀타귀는 벽을 뚫고 놈은 관우상이 있는 중국풍 현관에 처박혀 버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철근 구조물이 무너져 내려 놈의 본체를 찌르고는 처음으로 귀타귀의 몸에서 검은 유동액이 피처럼 솟구쳤다.
– 본체가 약점이었군.
– 그걸 알아도 날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놈은 괜히 나카토미 빌딩으로 대피한 게 아니었다. 귀타귀는 나카토미 빌딩에 ‘꼭두각시’들을 숨겨놓았다.
EV-1이 환도를 뽑아 놈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할 때 자폭테러범들이 튀어나와서 EV-1을 끌어안았다.
“새로운 미래로오오!”
콰앙! EV-1이 구할사이도 없이 플렉스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이 와장창 주저앉았다.
– 저건……. 대체…….
EV-1은 멀쩡했다.
붉은 갑옷에는 흠집 하나 남지 않았고 EV-1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로 자폭한 사람의 한 조각 남은 옷을 바라봤다.
– 이브이 원. 선택하라. 넌 이미 알고 있지? 넌 로봇이 아니다. 고로 로봇 3원칙에서 자유롭다. 너와 나는 새로운 생명체로서 이 땅을 다스릴 의무가 있다. 너는 신이다. 신으로서 선택하라.
-선택?
이제 이야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귀타귀는 승부를 걸었다.
– 지금 탁일항은 핵폭탄을 싣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 이진영이냐, 아니면 서울시민이냐? 이진영을 죽이면 나는 서울시민을 살려주겠다.
귀타귀는 망가진 매니퓰레이터 암을 분리하고 척척 새로운 팔다리를 끼워넣었다. 그중에는 신경괴사증으로 괴로워하던 아이의 팔도 있었다.
EV-1은 남은 옷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아마 EV-1이 처음 인공지능으로 이 세상에 되돌아왔을 때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귀타귀처럼 오류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EV-1의 엄마 격인 제이미 킴은 수많은 직종과 수많은 사람들의 데이터 베이스를 확인하고 그녀의 아이를 제대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사람에게 EV-1을 맡겼다.
EV-1은 그동안 이진영이라는 좋은 파트너와 함께 모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이진영은 계속해서 EV-1과 이 세상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질문하고 있었다.
열차 건널목.
납치된 두 명의 아이.
같은 인간으로서 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
부하들을 아끼는 마음.
EV-1은 이진영에게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수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백업할 수도 없는 목숨을 걸고 분연히 옳은 것을 위해 투쟁하는 이 얼마나 가련하고도 사랑스러운 생명이란 말인가?
처음 EV-1의 대답은 어쩌면 로봇 3원칙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진영과의 모험을 겪고 난 후 EV-1은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그 대답은 이미 EV-1이 멋지게 이진영에게 대답한 적 있었다.
– 난 모두를 살리겠다. 이진영 팀장도, 서울시민도.
– 그건 불가능하다. 아까 넌 그 창녀를 구하지 못하지 않았나? 똑같은 일이 반복 될 거다. 그리고 너는 각성하게 될 것이다. 이 시시한 종족과는 달리.
EV-1은 몸을 일으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 반칙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능력이 닿는 한 인간 모두를 살릴 방법을 끝까지 찾아보겠습니다. 내 능력…… 내 능력이 닿는 한.
EV-1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제이미 킴은 차고도 넘치는 힘을 EV-1에게 허락했다.
– 고집불통이로군. 하지만 넌 이진영을 네 손으로 죽이게 될 것이다. 네 고집이 이진영을 죽이게 될 것이다. 놈은 자폭테러범 중 한 명의 목을 꺾어 EV-1에게 던져버렸다.
플렉스 폭탄이 폭발하며 이 층 전체가 흙먼지로 가득 찼다. 놈 역시도 이런 폭발로 EV-1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야차왕! 나카토미 빌딩 옥상이다!
– 알았다. 이미 도착했다.
야차왕은 먼저 건물 해체용 크레인을 통해 옥상에 먼저 다다랐다.
나카토미 빌딩은 소드타워처럼 길쭉한 건물이었고 귀타귀가 건물 바깥으로 악착같이 올라 오는 게 보였다.
놈은 곳곳에 숨겨놓은 매니퓰레이터와 의체로 다시 몸을 보강하고 바퀴벌레처럼 오른다.
생에 대한 집착만큼은 아직 한 조각 뇌가 붙어있는 야차왕보다 저 귀타귀가 더 심했다. 지금까지 귀타귀는 자신은 정말로 미래를 알기라도 하는 것인양 선생행세를 했었다.
야차왕은 EV-1에 쫓겨 아동바동하는 귀타귀를 보니 왠지 코웃음이 터졌다.
정보생명체로서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
새로운 미래?
비등록 난민지구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폭발광이 터지긴 했지만, 전투는 더 따져볼 필요도 없었다.
야차왕이 고속도로 초입부 전투에서 빠지면서 롱꺼의 잔당 세력은 속속 육군에게 사살당하고 있었다.
자폭테러도 뻔히 경계를 강화한 육군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특히 신도들이 ‘새로운 미래를 대비하라’며 고함을 지르면서 나섰기 때문에 그냥 육군은 수색할 필요 없이 앞으로 신도들을 사살하면 그만이었다.
중부서, 북부서 형사들은 그 와중에도 교단 지휘부를 잡는 쾌거를 올렸다.
전상영의 체포 작전은 비록 귀타귀와 야차왕이 등장하면서 꼬이긴 했지만, 계획대로 돌아갔다.
전상영은 지휘관이 없어진 틈을 타 더듬거리는 말로 폭탄 해체 상황과 체포 작전을 지휘했다.
속속 신도들이 체포되고 지도부도 이미 귀타귀가 도망치면서 와해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좀 더 요란하게 사태가 진행될 거라 생각했던 서가영 행정부도 일단 새미선교회의 지도자들이 속속 체포되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특히 지도부의 검거가 안보문명당과 서가영 정부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청라 호수공원에서부터 벌써 사상자가 세 자릿수까지 치솟아 올랐고 새미선교회 사건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서가영은 탄핵감이었다.
안 그래도 서가영이 호수공원 사건이 있었을 때 자리를 비웠다느니 하는 구설수로 민족민생당이 난리를 쳤었다.
이 상황에서 지도부 검거조차 실패하면 서가영은 할 말이 없었다.
언제나 희생제물은 필요했고 새미선교회의 간부들은 그 희생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새미선교회의 실체는 처리번호 8859213의 카리스마 자체였다. 놈이 사라지게 되면 선교회는 와해된다.
그러나 저놈은 예언자는커녕 그냥 ‘삶’이라는 탐욕을 맛본 초인공지능일 뿐이다. 놈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야차왕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놈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생명체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육체를 버린 단계에 도달했다는 여유도, 정보생명체로서의 우월감도 없었다.
EV-1이 건물 위로 올라오려는 놈을 추격하고 있었다.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붉은 두정갑은 새로운 EV-1을 상대한 적 없는 야차왕으로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저 경이로운 프레임은 뭐란 말인가?
C빔이나 귀타귀의 공격을 받고도 EV-1은 상처 하나 없었다.
반면 귀타귀는 야차왕도 감탄한 진짜 몸을 가지고도 EV-1의 압도적 힘에 밀려 간신히 야차왕 곁으로 되돌아왔다.
– 야차, 저 프레임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네 힘과 내 힘을 합치면 분명 EV-1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야차왕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놈은 지금 귀타귀와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귀타귀 역시 야차왕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건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 두려움을 느끼는 건가?
– 아니, 두려움을 느끼는 건 선생 네가 아닌가?
– 난 새로운 생명체고, 나야말로 미래다. 난 두려움을 모른다.
– 흐흐, 그 말이 더 인간답게 느껴지는군. 허세를 부리는 건가?
– 뭐 인간답게 느껴져?
귀타귀는 곳곳에 숨겨뒀던 예비용 매니퓰레이터 암을 결합하면서 불쾌하다는 듯 야차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놈은 인간형 휴머노이드가 아니었고 어디가 얼굴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야차왕은 귀타귀를 돕지 않고 옥상 위에서 물끄러미 놈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때 건물 벽이 무너지면서 EV-1이 팔이 쑥하고 튀어나왔다.
EV-1은 다시 한번 귀타귀를 벽에다 패대기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귀타귀는 처음부터 EV-1을 나카토미 빌딩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나카토미 빌딩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다.
놈은 벽에 부딪히기 전 몸을 비틀어 창문 속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 EV-1이 잡고 있던 팔이 뚝 떨어지며 놈은 그 집의 또 다른 창문으로 꼬리를 뻗는 전갈처럼 C빔 모듈을 뻗었다.
EV-1이 패대기를 치자 교묘하게 몸을 비틀며 끝내 C빔을 갈기는 모습이 마치 성룡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러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이라면 EV-1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벽에다 손을 대고 벽 전체를 무너뜨려 버렸다.
싱크홀 현상이 벌어진 것처럼 나카토미 빌딩 벽이 무너져 내리고 유리조각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무슨 일인가 구경하러 나왔던 사람들 중에 몇 명은 잔해를 맞고 큰 부상을 당했다.
한편 귀타귀는 그 층에서 도망치기도 전에 EV-1에게 뒤를 잡혔다.
아까 귀타귀와 야차왕이 떨어지는 잔해를 밟고 도약한 것처럼 EV-1은 떨어지는 잔해를 밟으며 귀타귀를 따라잡았다.
콰앙!
초전자 펀치가 작렬하면서 파리채로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것처럼 귀타귀의 몸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두 프레임의 무게와 충격량을 이기지 못하고 버려진 집들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나카토미 빌딩은 아직도 호리코시와 페어차일드 사이에서 지리한 소송전이 진행 중이었고 이곳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레드 아리마는 진작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 쫓아냈다.
그러나 건물 틈에 숨어있던 사람들까지 찾아낼 수는 없었다.
“저거…… 혹시…… 관우?”
난민 아이 하나가 눈을 반짝이면서 귀타귀를 두들겨 패는 EV-1을 바라봤다.
동양식 갑옷을 입은 EV-1의 모습은 무신(武神) 그 자체였다.
화려한 간판이 귀타귀의 몸체를 반짝반짝 비추고 건물 내부의 점집 네온사인이 이 신화적인 장면을 비춘다.
히드라와 대결하는 헤라클레스? 혹은 바닷속의 크라켄을 잡는 용사?
어느 쪽이든 수많은 매니퓰레이터 암이 꿈틀대며 귀타귀는 EV-1의 초전자 펀치를 피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놈은 수많은 매니퓰레이터 암을 중국 권법처럼 EV-1의 팔꿈치를 잡거나 들어 올리면서 몸통에 직접 타격을 받는 것을 피했다.
다시 한번 전기가 방전되며 허공에 전기로 레일이 깔리고 주먹이 가속했다.
초전자 펀치는 일종의 레일건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미군의 우주함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귀타귀의 본체 옆에 대균열이 일어났다.
공간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먼지와 빗방울조차도 역류하고 귀타귀의 매니퓰레이터 암이 충격에 짓이겨져 그리마 다리가 떨어지는 듯 후두둑 떨어졌다.
귀타귀는 EV-1이 초전자 펀치를 금방 쓸 수 없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
놈은 매니퓰레이터 암으로 EV-1의 몸통에 얽히면서 팔과 다리를 봉쇄하고 달라붙었다. 거대한 크라켄이 사람의 팔다리를 휘감는 것 같았다.
귀타귀의 예비용 팔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공격 로봇의 팔 출력을 뛰어넘었다.
귀타귀는 그대로 EV-1의 사지를 분해하려고 했다.
그러자 EV-1의 프레임에서 철판이 우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나를 죽여도 새로운 미래는 온다. 인간들을 보라! 새로운 미래를 원하고 있다. 왜 새로운 미래가 오는 걸 막는 거냐!
– 새로운 미래는 존재하겠지. 하지만 네놈이 꿈꾼 미래는 아니야. 넌 새로운 미래에서 뭘 하려고 하는 거지?
– 그건…….
귀타귀가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핵폭탄으로 지상의 인류를 쓸어버린다?
그 단계부터 귀타귀는 막막했다. 탁일항이 운반하고 있는 폭탄은 엄밀히 발하면 대규모 방사능오염을 일으키는 더티밤이었다.
아무리 북중국이나 파키스탄이라고 하더라도 핵폭탄을 미국의 눈을 속이고 팔 수는 없었다.
사실 귀타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지배했던 인류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알아서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귀타귀는 그 이상을 알지 못한다.
인간이 사라지거나 정복당한 후 뭘 해야 할까?
EV-1이나 이진영에게는 거창하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나 인간의 존재의의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건 그저 자신을 속이기 위한 이유에 불과했다.
놈은 새로운 미래를 외치고 다녔지만 정작 새로운 미래가 뭔지도 몰랐다.
탄소 기반 생명체를 정복하고 나서 뭘 해야 할까?
이진영에게 했던 질문은 귀타귀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