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62
제362화
남자는 검은 바늘을 EV-1의 모습에 겹쳤다.
이 바늘은……….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시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그리고 그게 신호였는지 미 정보국 요원들이 동작을 멈추고 철수준비를 했다.
“감 팀장님. 저 친구들 왜 저러죠?”
감미영은 청와대에 전화를 걸다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랭글리 친구들이 의뭉을 떠는 게 한두 번인가? 다들 일들 해! 해킹 징후는 없다! 육군에게 밀어붙이라고 전해!”
쐐애애액!
빗속을 가르며 공군 폭격기들이 나타났다. 폭격기들은 육군 로메이드 폭격지휘사들이 찍은 곳에 스마트폭탄을 날렸다.
새미선교회에 가담한 극렬 러다이트 테러리스트들은 폭격에 휩쓸려 하나둘 거점을 잃어버렸다.
새미선교회의 테러 시도는 비등록 난민지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연계된 테러망이 곳곳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켰지만 이미 경계가 잔뜩 강화된 터라 폭탄을 터뜨리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종로 한복판, 부산 해운대, 광주광역시의 세계 최대 복합쇼핑몰 밀레니엄 등등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키기로 계획된 폭탄테러가 순차적으로 진압되었다.
테러범들의 폭발장치는 너무나 원시적이었고, 테러 직전에 ‘새로운 미래가 온다’라면 고함을 지르는 덕분에 막기가 너무나 쉬웠다.
지금껏 새미선교회에게 당했던 건 전국적 테러라 당국이 당황했던 것뿐이었다.
서가영 행정부는 새미선교회의 소요사태를 깔끔하게 봉합하기 시작했다.
이미 대부분의 지도부는 잡혀서 중부서와 육공으로 끌려왔고 러다이트계 지도부도 육군의 활약으로 분쇄되었다.
이제 남은 건 귀타귀 하나뿐이었다. 귀타귀는 새미선교회를 기반으로 거창하게 출병했지만 뭐 하나 이루지 못했다.
– 네노오옴! 이브이! 너는 새로운 미래로 우리를 이끌 자이면서 왜 인간의 편이!
직접적으로 염동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야차왕은 다른 특별병과번호처럼 고사양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귀타귀는 야차왕의 팔을 매니퓰레이터 암처럼 사용하면서 기괴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안 그래도 사람 머리통을 가득 허리와 등짝에 메고 있는 형태라 더더욱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EV-1과 귀타귀가 나카토미 빌딩에서 다시 격돌했다. 나카토미 빌딩은 귀타귀에게도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캐논볼 레이스의 체크 포인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는 심부름을 하러 왔다가 얼렁뚱땅 레이스 로봇들을 따라갔다.
귀타귀는 EV-1이 염동력이 통하지 않는 걸 알고 다른 방법으로 공격했다.
놈의 주변에 온갖 물건이 떠오르고 놈은 염동력으로 떠오른 물건들을 조작해 EV-1의 공격로를 막아서고 동시에 EV-1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철골구조물이 뽑혀 올라오면서 EV-1의 다리를 치고 EV-1의 펀치는 급작스럽게 떠오른 콘크리트 덩이에 막혀 귀타귀를 칠 수 없었다.
EV-1이 조종하는 T-1V 프레임은 다른 원거리 공격무기가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귀타귀는 처음에는 당황하긴 했지만 EV-1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야차왕의 염동력 프레임은 정말로 T-1V 프레임만큼이나 초월적인 능력을 자랑했다.
인간의 머리를 CPU로 써서 근거리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귀타귀는 각각의 ‘오브젝트’들을 밀어붙여서 방어하고 공격하는 방식에 최적화된 놈이었다.
놈의 근접 방어 능력은 EV-1과 호각이었고 EV-1은 날아오르는 염동력 오브젝트 때문에 놈에게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왜 방영이 안 된다는 거예요!”
헬기에서 이 광경을 찍고 있던 김수경은 PD에게 고함을 질렀다.
서가영 정부의 생방송 불가 방침이 각 방송사로 하달되었고 CNN을 비롯한 모든 생방송이 중단되었다.
서가영은 핸드폰으로 저 신화적인 장면을 촬영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핸드폰도 먹통이었다. 주변 무전과 통신은 전부 CIA가 장악했다.
새미선교회 체포와 폭탄조끼 해체를 하던 경찰들은 무전이 먹통이 되자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히려 장대비가 되었다.
빗방울들이 샤워를 하는 것처럼 세차게 내리치는 와중에 EV-1과 귀타귀는 10미터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EV-1의 초전자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나카토미 빌딩 위에서는 푸른 전류의 레일이 번쩍였다.
귀타귀가 가스통을 터뜨리거나 물건을 폭파시킬 때는 오렌지색 불빛이 번쩍인다.
나카토미 빌딩 위는 불꽃놀이 축제를 하는 것처럼 형형색색 불빛으로 물들었다.
EV-1과 귀타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 이브이, 내 에너지가 소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소용없다. 염동력은 에너지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
EV-1은 이대로 계속 소모전을 펼칠 수는 없었는지 이번에는 옥상 자체를 붕괴시켰다.
그러나 귀타귀는 그것도 이미 예상했는지 각각의 팔로 기둥 철골에 매달리면서 오브젝트를 띄우면서 몸을 보호했다. 놈은 그야말로 태양처럼 한 항성계의 중심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EV-1이 놈을 공격하려고 해도 속속 떠오르기 시작하는 오브젝트들이 목성이나 토성처럼 EV-1의 공격을 막아섰다.
귀타귀는 수많은 오브젝트들을 띄우고 그 중심에서 거미처럼 EV-1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도 무작정 EV-1과 소모전을 하려는 건 아니었고 놈이 기다리던 터닝 포인트가 놈의 눈에 들어왔다.
이진영.
귀타귀는 자신의 주인이 그랬던 것처럼 EV-1에게도 터닝 포인트가 될 방아쇠는 이진영이 될거라 꿰뚫어 봤다.
EV-1이 지금까지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이진영 덕분이었다.
놈은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좋은 부모를 가진 아이를 가난한 아이가 질투하듯 놈은 EV-1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생명체’로 진화시킨 이진영의 존재 자체를 질투했다.
그런데 EV-1이 이진영을 죽인다 한들 EV-1이 붕괴하게 될까?
EV-1은 이미 마이크로웍스의 돔에서 새로운 생명체로서의 선택을 마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이 참극은, 귀타귀의 계획은 놈의 아집과 질투에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놈은 계속해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며 EV-1도 이진영을 죽이게 되면 자신과 같아질 거라 생각했다.
살인자가 어떻게든 살인과는 상관없는 사람의 손을 더럽혀 자신의 위치로 떨어뜨리는 심리였다.
놈이 꿈꾼 새로운 미래는 그저 EV-1을 자신과 똑같은 살인 로봇으로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메시아니 뭐니 하는 것도 전부 다 귀타귀의 자의식이 꾸며낸 허상에 불과했다.
그 이진영이 올라온다.
귀타귀는 매달려 있던 철골 구조물에서 낙하하며 이진영 쪽으로 떨어졌다.
아까 윤락녀를 잡았을 때처럼 이진영을 잡기만 하면 EV-1을 자신과 똑같은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
놈은 첫 살인에서 피해자의 심장을 바치면서 뭔가 숭고하고 그럴듯한 의지를 느꼈다.
그걸 스스로 무슨 계시로 포장하면서 일을 키웠다. 사람의 목을 자르며 놈은 EV-1에 대한 질투를 불태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 팀장님! 그 이상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이진영은 유인환과 함께 건물을 올라왔고 귀타귀가 위에서 떨어지면서 놈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EV-1은 360도 계측으로 귀타귀가 염동력으로 이진영과 유인환을 죽이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EV-1은 귀타귀의 염동력 범위를 이진영에게 알려주면서 마찬가지로 무너지는 건물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EV-1조차도 이진영이 관찰력과 ‘형사로서의 감’을 깜빡 했는지 모른다.
이진영은 여러 차례 야차왕과 부딪치면서 야차왕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야차왕은 겉보기에는 요란하게 손을 들고 물건을 나르는 시늉을 하면서 사람의 이목을 잡아끌었지만, 그 행위는 야구의 사인과 비슷했다.
야구의 사인은 ‘도루하라’라는 진짜 뜻을 전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페이크 사인을 섞는다.
이진영은 엘지 트윈스의 오랜 야구팬이었고 사인 훔치기에 관한 눈썰미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야차왕도 야구의 페이크 사인을 썼고 그게 바로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리는 행동이었다. 이진영은 형사의 감으로 놈이 그런 페이크 사인을 왜 취하는지 꿰뚫어봤다.
염동력 발동의 트리거.
야차왕은 염동력을 쓸 때면 특정한 행동을 취했고 놈은 이진영 앞에서 이미 밑천이 털려버렸다. 이진영은 리볼버로 야차왕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쏴버렸다.
사실 염동력 트리거의 힌트는 대놓고 나와 있었다. 야차왕은 위타천처럼 완전 사이보그화될 수도 있었지만, 왼팔만큼은 인간의 생체 팔로 남겨놨다. 천수관음이나 다른 특별병과번호와 비교해봐도 좀 특이한 일이었다.
바로 그 왼손 새끼손가락이 염동력의 트리거였다.
야차왕은 염동력을 쓸때마다 새끼손가락을 파르르 떨면서 새끼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호오, ‘플래쉬포인트’를 알아보다니. 영리하군.”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이진영이 웡꺼의 리볼버로 염동력 트리거를 쏘는 모습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진영이 그게 야차왕의 진짜 약점이라는 걸 알아본 건 순전히 우연과 ‘형사의 감’에 기댄 행동이었다.
EV-1조차도 야차왕과 여러 번 부딪쳤으면서도 고작 새끼손가락을 구부리는 행동이 약점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염동력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새끼손가락을 구부리는 행위는 아무런 자연적인 연관성이 없었다. 때문에 EV-1은 놈의 약점을 찾지 못하고 고전했다.
EV-1으로서는 따라가지 못할 이진영의 형사로서의 감 수많은 감들이 쌓인 결과였다.
야차왕의 새끼손가락이 날아가면서 이변이 벌어졌다.
놈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오브젝트들이 후두둑 빗줄기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이진영은 총알 한 발만으로 귀타귀의 성가신 염동력을 끝장내 버렸다.
EV-1만큼이나 귀타귀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새끼손가락이 날아갔다고 초능력을 쓰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일까?
초능력 현상은 인간의 상상력과 관계가 있었다.
인간은 가끔 보이지도 않은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레이저 총이 나가거나 광선검을 휘두르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이 정신력의 힘으로 극대화되면서 현실에 물리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초능력이었다. 때문에 초능력 현상을 발현시키려면 반드시 트리거, 계기가 필요했고 CIA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부른다.
플래시포인트.
인간의 정신에 불이 붙는다? 그 발화점?
어느쪽이든 이진영은 형사의 감만으로 염동력을 무력화시켰고 그의 파트너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이브이! 그 개자식을 날려버려어어어어!”
– 야구 응원가 같군요.
엘지의 응원가는 예나 지금이나 날려버리라는 진부한 가사가 전부였다.
EV-1은 딴지를 걸면서도 펀치를 날렸다.
허공에 푸른색 전류의 레일이 깔리고 EV-1의 펀치가 순간 무력화된 귀타귀의 본체에 작렬했다.
펀치가 놈의 공 모양의 구체에 닿는 순간 야차왕이 모은 모든 머리통이 펑펑펑 터지면서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튕겼다.
야차왕의 몸체는 어마어마한 충격력과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온갖 부품이 야구 홈런을 쳤을 때 꽃가루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귀타귀의 몸이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야차왕의 프레임은 산산이 부서졌고 놈의 본체인 본체에서도 검은색 유동액이 퍽하고 터져버렸다.
귀타귀의 본체는 으스러지는 야차왕의 프레임과 함께 저 아득한 나카토미 빌딩 밑으로 처박혔다.
EV-1은 나카토미 빌딩의 외벽에 매달려 한쪽 팔로 벽을 잡으며 속도를 줄였다.
– 팀장님 어떻게…….
“형사의 감이라고 해두자. 그보다 저 새끼 아직 안 죽은 거 같은데?”
지긋지긋하게 명이 질긴 놈이었다. EV-1의 초전자 펀치를 맞고도 아직까지 살아있었다.
– 처리번호 88592113이군요.
놈의 공 모양 본체 안에는 수복 장치와 함께 놈의 출발점인 프레임이 담겨 있었다.
초월자? 새로운 미래?
놈은 초월자는커녕 로봇 시절 자신의 모습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었다.
이진영은 EV-1의 등 뒤에 올라탔다.
– 꽉 잡으셔야 할 겁니다.
“너 설마…….”
그 설마가 진짜였다. EV-1은 바로 나카토미 빌딩 최상층 근처에서 아무런 낙하 장치도 없이 낙하했다.
“야, 이 미친 놈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