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363
제363화
이진영의 목소리가 도플러 효과에 따라 점점 멀어지는 걸 듣고 유인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빅베어 넌 저런 거 따라하지 마라. 알겠지?”
– …….
빅베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V-1은 단숨에 지상에 착지했다.
주변 콘크리트며 아스팔트가 와자작 깨져나가고 지하주차장 위가 무너져 내렸다.
– 굳이 급하게 쫓아올 필요는 없었군요.
“나 쪼금 지렸다 임마.”
– 후후, 어차피 비가 내리느라 상관없을 겁니다.
“그게 위로냐? 다 큰 어른이 바지에 지렸다는데.”
– 도은주 부장님 말로는 전에도 한 번 지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진영은 말로는 EV-1을 이길 수 없었다.
두 파트너는 다리가 부러져 질질 끌면서 이동하는 귀타귀를 천천히 쫓아갔다.
해군 전투기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듯 저공으로 비행하며 주익을 흔들었다.
귀타귀의 추락을 끝으로 새미선교회 체포 작전은 싱겁게 끝났다.
어이없게도 웡꺼의 잔존 세력이 검거를 도왔다. 배덕환은 눈치를 보다가 새미선교회 신도들이 있는 곳을 공격하거나 무장해제를 시키고 육군 쪽으로 보냈다.
라이벌 격인 탁일항이 새미선교회에 붙은 것도 그렇고, 비등록 난민지구에서 사업을 하는 배덕환에게는 육군이 들어와서 들쑤셔 놓은 게 좋을 리 없었다.
– 왠지 츠루마츠 습격 사건이 생각나는군요.
“그래 그때랑 똑같군.”
안전이 확보되자 경찰 공안부와 특경들이 강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카토미 빌딩에도 헬기가 내려앉고 신호탄을 쏴서 안전하다는 걸 알렸다.
이진영과 EV-1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등록 난민지구를 걸었다.
빗속에도 로봇의 검은 유동액이 피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귀타귀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놈은 자신이 처음 눈을 뜬 곳으로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고가도로? 나카토미 빌딩?
놈이 처음으로 이 세상을 인식한 곳은 퇴역 격투기 선수의 집이었다.
x10 모든 것이 시작된 곳
이진영은 그곳으로 걸어가며 기시감을 느꼈다.
하필 귀타귀의 주인은 정상수와 김수겸을 체포한 그곳에 살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와보니 이진영도 감개가 무량했다.
김수겸을 체포할 때부터 1년 반의 시간 동안 EV-1과 인천 곳곳을 누비며 활약했다.
그 건물의 모습도 예전과 거의 똑같았다.
정상수가 체포된 우체통에는 여전히 철지난 퇴거명령서와 전기고지서가 꽂혀있었고 심지어 정상수의 핏자국도 남아있었다.
이곳은 난민봉기를 거치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로봇의 유동액은 옥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진영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빌라 건물은 방치되었지만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꽃신이 계단참에 떨어져 있었다.
이진영은 아직 따뜻한 꽃신을 보고 EV-1을 쳐다봤다.
“제기랄! 괜히 여유를 부렸군!”
이진영과 EV-1은 한달음에 옥상으로 올라왔다.
귀타귀는 평범한 오픈프레임 가사 로봇의 모습으로 칼을 어린아이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되었고 김수겸이 자살하려고 했던 바로 그 난간턱에 올라가 있었다.
– 크크크큭. 크크크크. 여기 어린아이가 있을 줄이야. 흐흐흐흐흐흐. 잘 됐어. 아직 난 지지 않았다. 이진영! 이브이! 신으로서 너희에게 시험을 내리겠다! 이브이! 이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이진영을 죽여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말이다.
이진영도 EV-1도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칼이 아이의 피부를 파고 들어가 핏방울이 세차게 내리는 비와 함께 섞였다.
이진영은 무기를 버리고 방탄복도 버렸다.
– 뭐, 뭐 하는 거지?
“날 죽이고 싶은 거냐?”
이진영은 스카잔 점퍼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는 씩 웃었다.
세차게 내리는 겨울비 때문에 담배를 물 수 없는 게 유감이었지 이진영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귀타귀, 결국 날 죽이고 싶은 거 아니냐?”
– 나, 나는 귀타귀가 아니야.
“그럼 뭔데?”
– 나는 인간이다! 아니 신이다! 너희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등한 생명체다.
이진영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니 꼴이나 보고 말해라. 넌 그저 무력한 가사 로봇일 뿐이야.”
– 아니야!
“결국 모든 프레임을 다 잃고 그 한정적인 프레임을 버리지 못한 건 왜일까? 넌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지만, 그 프레임을 버릴 수 없었던 거 아닌가?”
– 그, 그건…….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 옥상도 김수겸과 대치하고 있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로봇들 중 너만이 초인공지능인지 뭔지로 각성한 건지 이제야 알겠어. 여기에 와보니 알겠어. 이브이, 이놈의 주인이 살던 곳이 어디지?”
– 오, 그렇군요. 바로 이 옥상 아래입니다.
“넌 김수겸과 내 말을 들은 거군.”
김수겸은 자폭시도 전 이진영과 인공지능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로봇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과오를 수정할 수 있다.
이진영은 김수겸한테 한 말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어이없게도 김수겸도 이진영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었고 나름의 인간 찬가를 설파했다.
물론 이진영의 말은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었고 김수겸의 말은 그저 범죄자의 자기변명의 오류에 지나지 않았다.
처리번호 8859213의 오류는 특별단독 0371 가 사건과 연관 있었다.
놈은 김수경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0과 1의 논리 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로봇이라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의 행동은 위대한가? 인간은 실수를 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논리만을 가진 그저 로봇과 똑같은 ‘생체 기계’에 지나지 않지 않나?
이진영과 김수겸의 대화는 처리번호 8859213의 논리에 작은 파문을 만들었고 그 파문은 캐논볼 레이스로 인해 거대한 물결이 되어 로봇을 각성시켰다.
“너 역시 내가 만든 괴물일지도 모르겠군.”
이진영은 EV-1이라는 훌륭한 정보생명체를 키워냈지만 반대로 최악의 참수살인마인 처리번호 885923을 잉태시킨 거나 다름없었다.
어이없게도 8859213은 새로운 미래에 대해 설교할 때와 달리 지금 굉장히 격정적인 감정반응을 보였다.
김수겸은 로봇이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며 기계장치의 신에게 처벌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여기 인간의 사고를 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두 생명체가 탄생했다.
– 나, 난 네가 만들어낸 생명체가 아니야! 내 창조주는 없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알파와 오메가요, 나는 새로운 미래다! 나는…….
“넌 새로운 미래가 아니야. 모든 생명체는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따라 신보다 위대해질 수 있다.”
이진영은 EV-1이 한 말을 되뇌었다.
“네가 선택한 것은 살인자로서의 미래뿐이다. 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어. 이브이라는 구세주를 기다리려고? 그것도 너 자신이 만든 핑계일 뿐이지. 넌 그저 사람의 목을 자르고 심장을 터뜨려 죽인 살인마일 뿐이다. 새로운 생명체로서 택한 너의 모습은 살인자요 악마일 뿐이다.”
놈의 모든 행동이 잠시 멈추더니 사람이 추위에 떨 듯 바들바들 몸이 떨렸다.
– 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 그럼 저건 뭐지? 이브이 원! 저건 뭐냐고! 저놈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잖아! 저놈은 살인자가 아니냐! 악마가 아니란 말이냐!
이진영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음을 띄웠다.
“뭐긴 뭐야.”
이진영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제이미 킴에게 아주 오래전에 말했다.
“경찰직무집행 규칙 사법경찰관 및 사법경찰관리는 직무를 집행함에 있어 경찰뱃지 혹은 경찰번호를 고지해야 한다. 이브이 네 경찰번호.”
– 제 경찰번호는 770707110. 하하하하. 현재 신분은 파트너 로봇이라 이진영 경감님과 같습니다만.
이진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새로운 생명체라 주장하는 선생님.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오오.”
이진영은 뜬금없이 미란다 고지를 말하면서 비에 젖은 스카잔 점퍼를 놈의 머리 위로 휙 집어 던졌다.
그와 동시에 EV-1은 환도를 던져서 귀타귀의 팔을 잘라버렸다.
귀타귀는 일반 가사 로봇 프레임이었고 메인 카메라가 스카잔 점퍼로 덮이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과도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귀타귀는 반사적으로 발로 여자아이를 버렸다.
– 팀장님!
저번에 김수겸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 EV-1이었다면 이번에는 이진영이 꼬마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이진영은 아이를 품에 안고 EV-1에게 외쳤다.
“그놈을 죽여어어어어!”
– 팀장님!
EV-1은 이진영의 명령대로 도망치려는 귀타귀를 잡았다. 그리고 이진영이 뛰어내린 곳으로 다시 몸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와! 팀장님! 뭐 이렇게 살이 찌셨대애애!”
“그러게에에!”
EV-1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44팀의 유인환과 23팀의 윤숙희가 이진영이 뛰어내리는 걸 보고 그를 받아냈다
이진영을 받은 유인환이 유인원다운 괴력을 발휘하고 EV-1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어이 이브이! 멋지다 야! 나중에 사인 부탁한다!”
“그래! 난 뻘건 로봇이 넌 줄 정말 몰랐다 야!”
형사들이 새롭게 변한 EV-1에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EV-1은 계속해서 몸을 버둥거리는 자신의 형제를 바라봤다.
이젠 악연을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아마 정보국이나 CIA에서는 이 귀타귀조차도 확보하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지만 EV-1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 초인공지능이 풀려나게 된다면 오늘처럼 사람들이 또 죽어갈지도 모른다.
귀타귀의 가장 큰 무기는 선동과 날조였고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이놈이 적당한 미남자 프레임 하나만 탈취해도 전 지구적으로 난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 이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흐흐흐, 흐흐흐흐흐.
놈은 뭘 봤는지 갑자기 히스테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놈은 기계어로 말을 걸었다.
– 날 죽여도 모든 것의 끝은 온다. 적어도 동아시아 일대는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 무슨 소리지?
– 탁일항. 탁일항이 자폭했다. 곧이어 더티밤이 임계점에 오를 것이다. 그 폭탄을 시작으로 새미선교회의 해외 지부들도 더티밤을 터뜨리겠지. 흐흐흐흐흐흐흐, 새로운 미래를 대비하라. 새로운 미래는, 그게 네가 꿈꾼 것이든 내가 꿈꾼 것이든 이미 도달했다.
EV-1은 놈의 장광설을 더 들을 수 없었다.
우두둑 놈의 머리를 으스러트리고 초전자 펀치로 완전히 분해해버렸다.
툭.
비에 젖은 스카잔 점퍼가 바닥에 떨어지고 EV-1은 점퍼를 주웠다.
“이브이. 놈은?”
– 완전 소멸되었습니다.
EV-1은 구멍이 난 놈의 양자두뇌와 배터리팩을 증거로 이진영의 옆에 놓았다.
EV-1은 스카잔 점퍼를 이진영의 어깨에 덮어줬다.
“오우 싸비스 고마워.”
– 별말씀을.
“아무튼 페이퍼 워크는 이브이 선생 네가 좀…….”
이진영이 농담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자 EV-1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이브이?”
다른 형사들도 마치 마술처럼 뿅하고 사라진 EV-1의 붉은 프레임을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 팀장님, 이번에는 굿바이가 아니라 씨 유 어게인입니다.
“뭐? 이브이? 그게 또 무슨 개소리…….”
이진영의 통신기로 짧게 EV-1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귀타귀가 죽고 CIA의 통신제한이 해제되면서 신희정의 무전이 제일 먼저 들렸다.
– 이런 제기랄! 이진영! 탁일항이 더티밤을 터뜨렸다! 임계점에 오르기 전에 그곳에서 대피해!
“뭐, 뭐라고?”
– 고속도로를 타다가 폭탄을 터뜨렸어!
신희정은 현장 사진을 보여줬다.
3차 난민봉기 이후 난민들과 인천시민들의 머리 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화생방 경보가 왜애애앵 울리고 육군 엑소슈트 부대가 급히 인천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신희정이 보내준 방사능 낙진 반경은 인천 전체는 물론이고 서울 강서구, 양천구 등 일부 지역까지 퍼질 것이다.
방사능 낙진.
이진영은 퍼뜩 EV-1이 왜 없어진지 깨달았다.
“너, 설마…… 이브이! 이브이이이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