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4
제4화
“요리사가 왜 갑자기 훼까닥하게 된 거지?”
– 글쎄요. 이 사건 때문이 아닐까요?
EV-1은 소총 옆에 붙은 작은 디스플레이에 관련 사건을 띄웠다.
“가게 명도소송(가게를 비울 것인지를 다투는 소송)…… 특단 0571 나? 뭐야 민사 인공지능 사건이잖아?”
민사소송의 경우 자잘한 사건들은 전부 전임 인공지능의 판단을 받게 된다.
인간판사의 판단이 필요한 형사사건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 예, 1심 인공지능의 판단을 뒤집을 수 없어서 2심 고등법원 특별합의부에서도 원고승소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진영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 운운하는 게 그 이야기였군. 전임 인공지능이 판단하는 재판에 져서 알거지 신세, 그리고 빡쳐서 테러.”
– 경위님. 지금 돌입합니까? 특경에서 빠지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니 특경이 돌입하면 터질 것 같은데?”
– 그건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감. 형사로서의 감.”
감이라는 불확실하고 측정 불가능한 개념 따윈 로봇에게 없었다.
EV-1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하고 이진영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진영은 소총을 내려놓고 화약식 권총을 허리 뒤에 꽂아 넣었다.
– 뭘 하시는 겁니까?
“누군가는 나가서 시간이라도 끌어줘야지. 지금 터지면 너나 나나 다 같이 뒈지는 거고, 보아하니 조건만 맞으면 터뜨릴 것 같거든. 저놈 인공지능이라면 다 혐오하니까 넌 절대로 나서지 마라.”
EV-1이 중부서 서장의 통신을 연결하며 말릴 틈도 없었다. 이진영은 두 손을 들고 낡은 옥상 문을 박차고 나왔다.
여전히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용의자는 세찬 빗줄기 속에서 이진영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총을 그쪽으로 겨눴다.
“뭐, 뭐야! 너, 넌 뭐야!”
타당!
용의자가 반사적으로 쏜 두 발의 총탄이 이진영의 발밑에서 튀었다.
이진영은 방탄조끼의 경찰 마크를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용의자는 경찰 마크를 보고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이진영은 씩 미소를 지었다.
“당신 깐웨 전쟁에 참전했다면서?”
“뭐? 뭐라는 거야.”
“나도 참전자야.”
“뭐?”
남자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이진영을 쳐다봤다.
“나도 깐웨 전쟁에 참전했다고. 어디에 있었어? 북경? 아니면 광저우?”
“…….”
남자는 멍한 표정에서 다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짭새, 너도 참전자라면 살려주지.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이진영은 이어피스에 귀를 기울이다 숫제 막무가내로 말했다.
“아, 당신 해병 1사단이었어? 북경 전투라. 그때 미공군 새끼들 때문에 난리가 났었지. 제공권이 확보되지 않아 먼저 상륙한 부대는 난리가 났다고 들었어. 결국 보병들만 시가지로 들어가서 그라인더 속의 고기처럼 갈려 나갔더랬지? 안 그래? 미트볼맨?”
미트볼맨은 해병 1사단과 함께 상륙한 미군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일컫는 별명이었다.
“꺼지라고 했다.”
“참 웃기는 일 아니야? 자유중국 정부를 세우고, 전쟁터에서 살아와서 아르흠답게 살 줄 알았는데 정작 내 나라는 인공지능에게 지배당해버렸네?”
용의자는 그 말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가 다시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내 나라는 저 빌어먹을 로봇 놈들 때문에 인간의 권리란 권리는 바닥에 처박혔지. 로봇 판사들이 대법원 합의부까지 장악해서 대법관들도 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었어! 이제는 우리가 노예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저놈들이 우리의 지배자야!”
탕탕탕.
용의자는 화를 참지 못하고 119 구호 로봇에 자동소총 세례를 쏟아부었다.
부상자들을 실어나르려던 로봇이 머리가 터지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다리를 다친 사람이 어이쿠하면서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자동소총은 링크 급탄식으로 배낭에 연결되어 있고 간위예 전쟁에서 쓰던 모델이었다.
이 모델은 배낭의 탄약을 전부 소비할 때까지 탄창을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워워, 진정해. 비밀인데 나도 로봇은 질색이거든. 섹스돌과 같이 사는 놈들도 있다고 하는데 차라리 혼자서 해결하지 로봇들은 믿을 수가 없거든.”
남자는 난데없이 나타난 경찰이 로봇이 싫다는 말을 하자 용기를 얻은 듯 코웃음을 쳤다.
“여기도 로봇, 저기도 로봇. 우리는 노예가 됐어. 저 빌어먹을 로봇들만 없었다면 우리는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걸?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뭐 그것도 동감이야. 흐흐흐 나도 로봇 3원칙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더 좋은 직업을 얻었겠지. 난 어릴 때 꿈이 만화가였거든. 근데 옘병할, 그림 전임 인공지능이 그린 만화를 보니 와……. 이건 안 되겠다 싶은 거야.”
“다들 그렇게 자신을 잃어가지. 네 말대로 우리는 꿈까지 저 깡통들에게 빼앗겼다.”
“그래 맞아. 근데 애들에게 폭탄 조끼를 채우는 건 아니지 않아? 애들은 무슨 죄가 있어?”
“…….”
“당신 이혼했지만 아이도 있다며? 아이 아빠가 그러면 쓰나?”
용의자의 표정은 더욱더 일그러졌다.
EV-1은 이어피스로 용의자의 맥박과 시선 등을 분석해서 계속 이진영에게 알려줬고 용의자가 신경 못 쓰는 사이 이진영은 한 발, 한 발 용의자에게 다가갔다.
“이봐. 그러니…….”
타타타타타.
1미터,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헬기의 로터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한글로 특수경찰이라 쓰인 글씨를 보자마자 용의자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 경위님 특경 진압 로봇 강하합니다.
헬기에서 피융피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전면을 검은 방패로 보강한 진압 로봇이 옥상으로 강하했다. 그때 용의자는 이진영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부수적인 피해는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은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은 인류 해방을 위해. 인간 만세.”
이진영과 용의자 사이를 진압 로봇이 가로막고 방패 뒤에서 파이프처럼 생긴 매니퓰레이터 암이 튀어나왔다. 매니퓰레이터 암에 달린 전기충격기가 용의자를 지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용의자는 주문 같은 걸 외우면서 의연하게 체포에 대비했다.
AK-99 철갑탄은 진압 로봇의 장갑 따위는 쉽게 관통한다.
그러나 용의자는 의연하게 총구를 바닥으로 내리고 가슴을 손으로 쥔 채 가만히 기다렸다.
놈은 조금 전까지 구조 로봇까지 총으로 쏘면서 절대로 로봇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용의자의 의연한 얼굴을 보는 순간 이진영은 고함을 질렀다.
“깡통! 심장 페이스메이커에 충격이 가해지면 어떻게 되지!”
– 기계간섭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진영이 갑자기 권총을 들어 진압 로봇의 매니퓰레이터 암을 쏴버렸다.
매니퓰레이터 암이 퓨드드득하는 소리를 내며 멈추고 또 다른 로봇이 용의자를 제압하려는 사이 이진영이 로봇을 등을 타고 뛰어넘어 용의자를 덮쳤다.
아슬아슬하게 전기충격기가 이진영의 어깨 위를 때리고 파드득하는 전류가 튀겼다가 금방 사라졌다.
“이 새끼! 순교자가 될 셈이냐!”
“방해하지 마라! 이 새끼가아아!”
순순히 체포를 기다리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놈은 기폭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이진영은 다른 손에 든 권총으로 반사적으로 세 발의 총탄을 날렸다.
팡팡팡.
세 발 중 한 발이 용의자의 팔에 맞아 기폭장치가 옥상의 방수포로 떨어졌지만, 용의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인간 만세.”
자살소동을 벌이며 옥상 난간 위에 서 있었던 건 바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었다.
이진영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용의자의 팔을 잡으려고 몸을 내 던졌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카르르륵하고 뭔가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문짝을 때려 부수면서 EV-1이 튀어나왔다.
로봇은 우주선 제어용 슬라스터 노즐을 분사하더니 단숨에 10여 미터의 거리를 도약해서 이진영을 따라잡았다.
타다다다다.
로봇용 철갑탄이 쏟아지면서 EV-1의 가슴 장갑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러나 EV-1은 생포용 고무탄을 자동소총 급탄링크에 쏘는 게 아닌가?
고무탄이 소총탄 링크에 끼워지면서 급탄불량이 발생하고 용의자는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었다.
놈이 당황하는 사이 EV-1은 왼쪽 어깨에 달린 작은 매니퓰레이터 암을 뽑아 놈의 입과 손에 몽글몽글한 거품 같은 걸 뿜어냈다.
라미네이트 폼.
이 화학물질은 분사되면 충격을 흡수하는 거품을 내지만 곧 딱딱하게 굳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EV-1은 라미네이트 폼으로 용의자를 단숨에 제압해버렸다.
– 경위님 꽉 잡으십시오.
EV-1은 평온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왼손에 장착된 그물망 포획탄을 발사했다.
용의자와 이진영이 트롤 어선에 잡힌 고기 신세처럼 그물망에 잡히고 EV-1은 두 사람을 끌어안고 밑으로 몸을 날렸다.
“야! 이대로 내려가다간 넌 몰라도 우린 디지겠는데!”
– 걱정하지 마십시오.
EV-1은 공중에서 슬라스터 노즐로 우주선이 자세를 교정하듯 자세를 잡더니 콘크리트 벽면을 한 손으로 잡고 속도를 줄였다.
보습학원의 간판이나 마사지샵 창문이 박살이 나고 콘크리트 조각이 와르를 쏟아져 내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EV-1은 무사히 이진영과 용의자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비가 주르륵 정신없이 두들기고 이진영은 빗물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죽을 뻔했다!”
– 경위님 잠시……. 패턴을 보면 이빨에 독극물이 있을 것 같습니다.
EV-1은 오른팔에 달린 작은 보조 매니퓰레이터 암 드릴로 라미네이트 폼에 구멍을 뚫어 놈이 어금니에 끼워 넣은 캡슐을 회수했다.
– 청산가리 캡슐을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접촉하자마자 라미네이트 폼으로 제압한 게 다행이었군요.
“이런 미친 새끼.”
이진영은 그물을 뜯고 나와 정신을 잃은 놈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 경위님, 방금 행위는 이미 용의자 제압이 끝난 상황이라 폭행죄의 소지가 있습니다.
“시끄러. 본청 사람들도 내 입장이면 이렇게 할걸? 이런 천하의 개자식을 봤나.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는 다시 한번 정신을 잃은 놈의 배를 걷어찼다.
그 사이 광역특수경찰의 로봇들이 흙먼지를 뚫고 또다시 헬기에서 강하했다.
쿵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곧바로 방패를 펴고 이진영과 EV-1에게 달려들었다.
– 투항하라. 두 손을 들고 투항하라. 선처하겠다.
이진영은 흙먼지 속에서 기가 찬다는 듯 EV-1에게 말을 걸었다.
“피아 식별도 안 되냐? 본청 광역팀 로봇이 이토록 멍청할 줄이야. 이러니 만날 로봇들이 고장난 토스터 신세가 되지. 깡통, 적어도 얘네들보다 네가 우수한 건 확실한 것 같다.”
EV-1은 마치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고 검은 로봇들 뒤에서 검은 제복을 입은 광역 스와트팀이 컨테이너에서 등장했다.
“어이! 니들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이진영은 히죽 웃으며 EV-1에게 슬쩍 말했다.
“거봐 저 돼지 같은 놈들은 일 끝나면 나와서 거들먹거릴 거라고 그랬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예산 타 먹는 돼지 같은 새끼들.”
광역 특경은 늘어난 난민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팀이었다.
정말 뚱뚱한 검은 돼지처럼 방탄복과 엑소슈트 모듈을 겹쳐 입은 사람들이 사방에 총을 겨누면서 다가왔다.
이진영은 중부서장과 팀장의 갈굼을 들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용의자 확보했습니다. 에헤이, 간만에 TV 뉴스에도 나오고 경찰 24시에도 나올 텐데 뭔 그리 섭한 말씀을. 우리 지역짭새의 혁혁한 활약을 3D 영상으로 확인하시라아~ 캬.”
– 이진영 이 미친 새끼! 너 들어오기만 하면…….
이진영은 핸드폰을 점점 멀리하다가 툭하고 끊었다.
“깡통, 폭발의 영향으로 신호가 혼선된 걸로 하면 안 될까?”
– 이쪽은 신호가 혼선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