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 그것도 잠겨있습니다. 본청 지시입니다.
이세화는 완전 걸레짝이 되어 세워져 있는 경찰 지휘차량을 노려봤다.
“일선 경찰들이 알아선 안 되는 일인가 보군요. 경위님 그 잘쌩긴 친구분과 만나는 자리 저도 함께하죠.”
“예? 하지만…….”
신희정은 이세화가 동행하면 입을 다물지도 모른다.
“저도 중국술 좋아해요.”
이세화는 씩 웃었다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데 류모성은 어떡하죠?”
그녀는 세이코 군용시계를 들여다봤다. 천도영 사건이든 류모성 사건이든 이미 골든타임은 다 지나갔다.
“그 사건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으면 아마…….”
지금은 오후 1시 반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6시간이면 장기적출이 끝나고, 북중국이나 동남아에 매춘용도로 팔리는 건 12시간, 24시간이 지나면 전 세계 어디든 심지어 궤도 엘리베이터 위까지 배송될 수 있다.
이진영도 시계를 보며 담배 필터를 씹었다.
류모성 같은 아이가 사라진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은 얻은 단서를 가지고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수상한 남자들과 도어노커 탄피 말인가요?”
“예, 확실히 납치범들이 방벽 너머에서 온 건 의외였어요. 그리고 도어노커를 쓰고 보육 로봇을 제압할 정도라면…….”
“엑소슈트! 엑소슈트가 따로 있겠네요.”
“빙고. 놈들 중에 중장기병이 있겠죠. 그리고 난민들 중에서 중장기병 출신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 엑소슈트를 찾는 건 불가능의 영역은 아닙니다. 근처 CCTV에서 엑소슈트 트레일러를 찾아보겠습니다.
두 사람과 로봇은 척하면 척이었다.
“그리고 류모성 사건은 분실물을 주웠다는 청소 로봇의 로그기록을 뒤져보면 될 것 같아요. 이브이 그것도 알아봐 줘.”
이세화가 눈빛을 반짝반짝 빛낼 때 머리에 붕대를 감은 김태현 형사가 흡연장으로 달려왔다.
“이세화 팀장님! 범인 전화입니다!”
두 사람은 꽁초를 청소 로봇에게 던지고 강력전담부 행거 안으로 들어갔다. 범인은 이민호 부장과 대화를 하다 이세화에게 말을 걸었다.
– 오,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시나? 이세화 팀장님? 당신이 내 전담 아니었나? 아저씨랑 이야기 하는 건 질색이거든.
“식후땡은 하게 해줘야지?”
– 어이구 지금 시간까지 식사를 못 하셨나? 그리고 밥이 넘어가? 사람 드럽게 많이 죽었는데?
수화기를 잡은 이세화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고 다녀야지? 너도 식사는 하셨나? 뭐 맛난 거 드셨어?”
– 잘 먹었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말이야. 아, 메뉴를 물어보는 거라면 대답 안 할 거야. 요새 형사들은 군만두 하나만으로도 위치추적이 가능하니까. 로봇 덕에 쌔뻑이지 뭐야?
“칭찬 고오맙군. 슬슬 본론부터 말하지? 뭘 원해? 왜 다시 전화를 건 거지?”
– 본론 좋지. 경고야. 두 번 다시 어설픈 수작 부리려면 애저녁에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또 폭발이 터지고 불쌍한 땅개와 짭새가 뒤지는 거지. 당신의 예쁜 얼굴에 흠집이 생기는 건 나도 원치 않아.
“과찬의 말씀이시군. 정보조작으로 공안 아저씨들을 낚은 건 칭찬해줄게.”
– 아이고오 감사.
“아이를 슬슬 보여주지 그래? 장사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아무리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 쳐도 업무 프로세스라는 게 있는 거잖아?”
– 하하하 이미 말하지 않았나? 아이를 보여주는 순간 이곳에 스와트가 강하할 텐데 내가 미쳤어?
“그럼 아이가 무사한지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아니, 네가 아이를 납치했는지 어떻게 믿냐고?”
– 그럼 아이 손가락을 잘라서 보내주면 될라나? 잘난 경찰 감식 로봇이 확인하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건 알겠지.
이세화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마 범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경찰 수칙이고 뭐고 이빨이 날아갈 정도로 강펀치를 먹였을 것이다.
“뭐라도 좋아.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여줘. 안 그러면 난 열차에 타지 않겠다. 너 역시 돈을 받는 건 불가능하고.”
– 오우, 세게 나오시는데? 이게 협상학에서 말하는 거래를 트는 단계라는 건가? 당신 경력 보니까 협상가 자격도 있더군?
“아동납치를 하면 협상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내 최우선 목표는 너의 검거가 아니라 아이의 무사귀환이다.”
– 역시 엄마는 위대하셔. 천도영군을 보면서 딸내미 생각 많이 했겠어.
다시 한 번 이세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찰기록은 물론이고 놈은 뜻밖에도 이세화의 개인정보까지 알고 있었다.
“협박해도 소용없어.”
– 알아 네 딸은 죽었지. 납치범이 죽여서 시체를 보냈고. 그래서 당신은 꿀빠는 본청 정보과에서 인천으로 내려왔고. 당신 이거 더 할 수 있겠어? 뭐 난 경찰에서 선수교체를 해도 이해할 거야. 그 트라우마가 장난 아니겠지.
이진영은 냉정을 유지하는 이세화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이세화가 들고 있는 수화기를 낚아챘다.
“오케이 그럼 선수교체.”
– 넌 누구야?
“알 거 없잖아? 어차피 다 짭샌데.”
이민호가 옆에서 입 모양만으로 ‘무슨 짓이야?’라고 말했지만, 이진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워얼. 형씨 좀 치는데?
“거래부터 하지.”
– 거래? 뭔 거래?
“지금 엑소슈트를 쫓고 있다. 곧 찾을걸? 트레일러부터 시작해서.”
청산유수 같던 놈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 엑소슈트? 뭔 엑소슈트? 그리고 그게 왜 거래가 되는 건데?
“아이가 살아있는 증거를 주면 이 건은 잠시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묻어 둘 수 있어. 그러면 넌 도망치거나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겠지.”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카드는 한 장 더 있어. 대사관.”
이번에도 범인의 반응은 살짝 느렸다.
– 대사관? 아 일본대사관? 한일라인 때문에? 하긴 일본정부에도 허가는 받아놔야지.
“에헤이. 왜 이래애? 장사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난 어디까지 왔다고 솔직하게 다 말해주잖아?”
이진영은 EV-1을 힐끔 쳐다봤다.
“이런이런, 트레일러. 어이쿠우.”
EV-1은 고개를 갸웃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좋아. 이세화 경감을 봐서라도 아이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보내주지.
“오케이, 거래 땡큐베리감사 떠제아(多謝啊).”
툭하고 범인의 전화가 끊기고 이민호 부장이 잡아먹을 듯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엑소슈트는 뭐고 대사관은 뭐야? 뭔데 저놈이 거래에 응한 거지?”
“글쎄올씨다. 이건 극비수사라서요.”
“이 쌔기가. 미쳤어 너?”
이민호 부장이 쪼인트를 치려고 하자 이진영은 날쌔게 구둣발을 피했다.
“에이 아무리 잘나가는 본청 부장님이라도 막 부하 폭행하면 쓰나요? 민주경찰이 시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지.”
“이 새끼. 무슨 일인지 당장 말해. 안 그럼 너 옷 벗긴다.”
“아니 옷을 벗긴다니. 망측해라. 성추행까지 하시게?”
여기저기서 야유와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민호 부장은 얼굴이 시뻘게졌다.
“저와 거래 하나 하시죠.”
“뭐? 뭔 거래?”
“난민의 아이 하나가 실종되었습니다. 순찰 로봇과 경관을 거기다 배정해 주시면 살짜쿵 알려드립니다.”
이세화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난민 아이가 실종되었다고? 그게 뭐.”
“다 같은 아이입니다. 시발, 아이 실종에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습니까?”
이진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민호 부장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슬쩍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육군 공안과 정보국 요원들을 바라보며 이민호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서류상으로 한국인이고 천도영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실종시간도 엇비슷하고 피가 묻은 가방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민호도 현장밥 먹은 경찰이었다. 이진영의 말을 듣고 류모성 실종이 뭔가 ‘껀수’가 될 거라는 걸 눈치챘다.
“좋아 알았어. 그럼 엑소슈트는 뭐야?”
“아뇨, 이번 거래는 거기까지 하죠. 처음부터 큰 거래를 할 수야 있나요? 차차 신용도 쌓고 그래야 같이 술도 묵고, 사우나도 가고 그러죠.”
이진영은 혀를 낼름 내밀었고 화가 난 이민호는 이진영에게 키보드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폭발 파편까지 요격해낸 EV-1이 그걸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EV-1은 키보드를 받아서 얌전히 근처 책상에 내려놓았다.
다시 웃음소리가 터졌고 이세화도 킥킥대며 웃었다.
“부장님, 이진영 경위는 부장님 놀리려고 저러는 게 아닙니다. 저희만이 알고 있는 정보가 있고 그걸로 범인에게 거래를 성사시켰지 않습니까?”
이민호는 이세화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화는 육군 공안부를 힐끔보고 이민호의 귀에 속삭였다.
“제 정보가 털린 걸 보면 범인은 경찰이나 공안 안에도 스파이를 심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경찰조직안에 육공이나 정보국과 내통하는 자가 없다는 보장도 없고요. 아무래도 보안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민호도 육군 장교 정 대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군 공안부와 본청 공안은 앙숙이었고 이민호는 굳이 스파이가 아니라도 쓸데없는 정보가 육군으로 새는 걸 원치 않았다.
* * *
이세화는 이진영의 자리로 가서 그가 EV-1과 함께 순찰 로봇을 배치하는 걸 쳐다봤다. 이진영은 이세화와 함께 걸었던 그 거리에 순찰 로봇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뭘 찾는 거예요?”
이진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은 우리만 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죠.”
“아, 류모성의 보육 로봇?”
“예, 보육 로봇을 무력화시켰어도 처리하기는 힘들 거예요. 뭐라도 흔적이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여긴 초등학교에서 거리가 먼데.”
“예, 놈들이 엑소슈트를 이용했다면 큰길로 갔을 테고 이 근처에 보육 로봇이든 엑소슈트의 기동 흔적이든 분명 뭐라도 남아있을 겁니다.”
이세화는 이진영을 바라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은…….”
“알아요. 약속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천도영이든 류모성이든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게 최우선 목표입니다. 저도 딸아이의 아빠입니다.”
이진영은 이혼한 아내가 기르고 있는 딸 사진 액자를 책상에서 들어서 보여줬다.
이진영을 닮은 아이가 앞니가 빠진 채로 헤에 웃는 사진이었다.
이세화는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진영의 책상으로 되돌려놨다.
“둘 다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이진영은 화면을 터치하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삐삐삐 핸드폰이 알람을 울렸다.
“아, 이제 시간이 됐군요. 낮술하러 가시겠습니까?”
이세화도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김대현 형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팀장님! 또 나가시는 건가요?”
“대현아, 너는 머리를 다쳤는데 조퇴하는 게 낫지 않겠니?”
“아니, 머리는 괜찮아요. 그보다 팀장님 또 자리 비운 걸 알면 저 서장님이나 부장님한테 박살 날지도 몰라요.”
이세화는 시계를 바라보다 말했다.
“잠시 티타임이라 그래. 영국식으로다가. 기일게.”
“아니 뭔 영국식이래요?”
“그거 몰라? 건강과 미용을 위해 식후 한 잔의 홍차.”
“뭔 개소리에요?”
김대현은 울상이 되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세화는 이진영과 함께 월미도 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