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54
제54화
“웡꺼가요?”
이세화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하하, 저도 놈들 앞에서 그 표정을 지었을 것 같군요. 류모성은 확실히 아닙니다. 놈들의 장부에 없었어요.”
“그걸 믿을 수 있나요?”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놈들도 내게 원하는 것이 있고, 놈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민호 부장 말에 따르자면 고작 난민 아이 하나이니까요.”
이세화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영은 보육 로봇 사진을 핸드폰에 띄우고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류모성의 보육 로봇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세화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서려고 했다. 이진영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미 갔다 왔어요. 방벽 스캐닝 시스템도 확인했고요. 대마초 가게 주인이 ‘아이’와 같이 있는 누군가를 봤다고 하더군요.”
이세화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류모성의 보육 로봇 사진을 노려봤다.
“이 사진은 어떻게 찍은 거죠?”
이진영은 짧게 신고 전화가 걸려오고 그걸 추적하는 과정을 들려줬다.
이세화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차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말했다.
“흠……. 그렇다면, 류모성의 로봇을 찾는 게 최우선이군요. 류모성이나 로봇이 뭔가를 봤기 때문에 납치당했다? 아직 좀 부실하긴 하지만 일리는 있어요.”
“예, 그래도 오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 단서는 여러 가지니까요.”
“단서, 도어노커의 탄피 그리고 또 뭐였죠?”
– 신희정 요원에게 엑소슈트 관련 사항은 정보공유를 했고 웡꺼의 조직원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습니다.
“영리하네요. 웡꺼 조직원들을 사냥개로 써먹다니?”
– 보육 로봇 역시 이민호 부장에게 받은 순찰 로봇 등 리소스로 쫓고 있습니다.
이세화는 이 유능한 콤비를 보며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러면 제가 카드를 공개할 차례군요. 그 얼굴 반반한 요원 알면서도 우리를 엿 먹인 것 같아요. 임유진의 클라이언트는 페어차일드 개발만이 아닙니다. 신인천개발공사도 그녀의 클라이언트였어요. 아이가 위험하다고 설득해서 간신히 알아냈어요.”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 카모마일 차를 내려놓았다.
“신인천개발공사라고요?”
“업계용어로 쌍방대리죠. 이해 당사자 양측의 의뢰를 받는 거. 변호사법 위반이긴 하지만 임유진의 수완이라면 양쪽에서 어마어마한 수임료를 받을 수 있겠죠. 쌍방대리 형식이지 공판 정보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고.”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녀는 키맨, 아니 키우먼이었군요.”
이세화는 여자인 자신을 배려한 이진영의 표현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경위님 말대로 임유진은 키맨이었어요.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개발사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운명의 여인. 이건 단순한 몸값 사건이 아니에요. 놈들은 천도영군을 납치한 후 임유진을 포섭해서 인수합병의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이 계획을 백지화하거나. 아니면 더 큰 돈을 뜯어내거나 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공안 3사께서 미친개처럼 달려든 거군요. 신간척지 개발은 명목상 국가안보와 관련은 있으니까.”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슈킹성지가 될지도 모르고요. 건설 경기가 있는 곳엔 언제나 짭짤한 부수입이 있는 법이니까.”
두 사람은 왜 아동 유괴 사건에 공안 3사가 끼어들고 모든 정보가 블락되었는지 이제야 해답에 도달했다.
그렇게 한 가지 의문이 풀리자 또 다른 의문도 풀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제 생각엔 납치의 목적이 협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협박이 아니라면…….”
이진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아이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공안 놈들이 땡크로 희망빌라를 밀어버리려는 미친 짓은 안 했겠죠.”
“그러고 보니 공안은 아이의 목숨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천도영 그 소년이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해요. 예를 들면…….”
EV-1은 결정적인 대목을 짚어줬다.
– 천도영의 모친 임유진 변호사는 오늘 페어차일드와 신인천개발공사 인수합병 최종 공판에 출석해야 했습니다.
이진영이 핑거스냅을 하고 주변의 아줌마들은 다시 이진영과 이세화 쪽을 쳐다보며 수군댔다.
이진영은 혹시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
“팀장님, 그 공판 자료 중 중요한 증거나 장부 혹은 뭔가를 소년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공안 3사의 기술력으로는 데이터 복구 따윈 일도 아니니까. 아, 만약 정말로 천도영이 가지고 있는 뭔가가 문제라면 인질범의 목적도 알겠어요.”
이진영도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워드.”
이세화는 프리스비를 물고 온 개를 보는 흐뭇한 표정으로 핑거스냅을 했다.
“빙고.”
두 사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이를 납치해서 데이터나 뭔가를 열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강력한 락이 걸려 있어서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임유진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질극은 눈 가리고 아웅이고, 희망빌라가 폭파된 건 놈들의 플랜B였군.”
– 희망빌라 폭발은 원래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도주 시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는 말씀이죠?
그러나 이진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음……. 풀리듯 하다가 또 막힌단 말이야?”
“뭐가요?”
“팀장님, 생각해 보세요. 놈들은 공안 3사를 가지고 노는 장비와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놈들이 락을 풀 방법도 생각 안 하고 아이를 납치했을까요?”
“그건……. 어떤 특수한 락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아뇨, 그럴 거면 임유진과 직접적으로 컨택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자료가 목적이라면 임유진을 납치하는 쪽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요? 왜 아이를 데리고 갔을까요?”
이세화도 그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실마리가 풀리려고 하면 턱턱 가로막혔고 두 아이의 실종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일단 정리해보죠. 류모성의 로봇은 순찰 로봇이 쫓고 있고, 도어노커와 엑소슈트는 웡꺼와 정보국이 쫓고 있을 겁니다. 그럼 남은 건.”
“재료가 모였으니 임유진과 다시 한번 컨택해 볼게요. 부실하긴 하지만 그녀의 입을 여는 데는 도움이 되겠죠.”
“저는 정보국과 이야기해보죠.”
“자 정상회담은 이쯤에서 정리해야 할 것 같군요.”
이진영과 이세화는 동시에 각자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10분 시계바늘은 범인이 돈을 가져오라고 한 시간에 점점 접근하고 있었다.
“경위님, 놈들이 요구한 돈이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건 큰 진전이었어요.”
“예, 그깟 2억 달러, 저 신간척지 개발에 비하면 푼돈이지요.”
링로드 공사가 완료되기 전인데도 임시수송로를 통해 세계의 물자가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게 완성이 된다면 스타즈 앤 스프라이트에서 들어오는 궤도 태양광 에너지가 그야말로 인류를 꿈의 단계, 우주시대로 끌어 올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간척지 개발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이진영과 이세화는 찻집에서 나온 뒤 각각 임유진의 자택과 월미도 역으로 향했다.
* * *
임유진의 자택에서 대부분의 요원들은 인천 중부서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많은 육공 요원들이나 정보국 요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거기에 TV 방송국 사람들이 진을 치고 집 앞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댔다.
이세화는 기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로봇이었고 기자들은 편하게 신문사나 자택에 앉아서 로봇을 통해 노골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중부서 아동범죄전담팀 이세화 팀장님이시죠!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범인의 윤곽은 드러났나요?”
“왜 육공과 정보국이 끼어든 거죠?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뉴웨이브 뉴스 김한길입니다! 이세화 팀장님의 따님분도 몇 년 전에 납치되어 피살된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심경은 어떠십니까!”
이세화는 김한길 기자의 말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김한길은 비겁하게 원격조종으로 이세화의 상처를 후벼팠다. 다른 로봇 기자들은 이세화가 대답이라도 하는 줄 알고 그녀에게 일제히 마이크를 내밀었다.
“워워워! 팀장님! 안 됩니다. 안 돼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김대현 형사가 이세화의 등을 떠밀며 로봇 기자들에게서 이세화를 떨어뜨렸다.
김대현 말고도 다른 아동팀 형사들이 달려들면서 이세화는 떠밀리듯 임유진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김대현 형사는 문을 간신히 닫고 이세화에게 말했다.
“팀장님, 아시잖아요? 저 로봇들 부수면 더 큰 난리가 날 거예요.”
“…….”
이세화는 대문 너머에서 아직도 아우성치는 로봇들을 노려봤다.
“피해자 어머니는?”
“좀 피곤한 것 같지만 아직 무너지는 단계는 아니에요. 근데 팀장님 자꾸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티타임.”
“뻥치시네.”
“진짜야.”
이세화는 김대현의 티셔츠 포켓에 카모마일 차 티백을 꽂아주고 그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임유진의 자택은 여전히 호화로운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고급 단독주택이 인천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세화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거실을 지나 곧장 2층에 있는 임유진의 침실로 향했다.
계단에는 임유진과 천도영이 찍은 사진과 아이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그녀는 잠시 괴발개발 그린 그림을 한동안 바라봤다.
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 그림, 엄마랑 김밥을 만드는 그림.
그림만 봐도 편모가정이지만 천도영이 엄마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똑똑.
침실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인기척이 들렸다.
“아, 형사님.”
임유진은 이세화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미 육공에게 마치 죄인 다루듯 강도 높은 심문을 받은 상태였다.
“형사님, 아이에 대한 단서는 찾았나요? 아이는요?”
이세화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이진영이 목숨을 걸고 웡꺼에게서 가져온 정보를 생각해 보면 임유진 변호사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시죠. 페어차일드와 신인천개발공사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지금 육공은 아이고 나발이고 전혀 신경 안 쓰고 뭔가를 찾고 있어요.”
이세화는 옆에 있는 김대현의 붕대 감은 머리를 힐끔 쳐다봤고 임유진 역시 김대현을 바라봤다.
임유진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하나 물어볼게요. 당신에게 아이는 얼마나 소중한가요? 난민지구 개발에 관한 데이터보다 더 소중한가요?”
임유진은 바로 고개를 쳐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이세화를 쏘아봤다.
“그, 그 아이는 내 모든 것이에요! 내가 이룬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해요!”
“그럼 왜 아이가 위험한데도 다 말하지 않고 있는 거죠? 육공은 애고 뭐고 다 박살 내고 있는데 말이죠.”
임유진은 주변 눈치를 심하게 살폈다.
“다, 당신은 몰라요. 내가 말을 하면 더 위험할 수 있어요. 그리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도 말인가요?”
이세화는 잠시 임유진을 쳐다보다 말했다.
“저는 실패한 당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