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55
제55화
임유진은 순간 이세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눈썹만 찡그렸다.
“실패한 나라고요?”
“예, 저는 아이한테만큼은 최고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요. 아이가 납치되었을 때 난 아무 것도 못 했어요. 명색이 정보경찰인데도, 상부의 압력에 수많은 유관 기관과의 관계 때문에 난 아무 것도 못 했어요. 아무것도. 그리고 병신처럼 책상에 앉아있다가 전화를 받았어요.”
“무, 무슨 전화요.”
“아이가 발견되었다고. 하수구에서. 죽은 채로.”
이세화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나, 남편이 대신 갔어요. 난 정보경찰이니까.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 결국 난……. 난, 아무것도 못 했어요.”
임유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에게 아이가 무엇보다 소중한 건 알고 있어요.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절 도와주세요. 입을 열기 힘들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아요.”
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고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이세화는 순간적으로 임유진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서 저 멀리 빌딩 위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천만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그녀는 북경에서도 비슷한 반짝임을 본 적 있었다.
이세화는 임유진 쪽으로 재빠르게 몸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강화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며 소금을 흩뿌리듯 이세화의 점퍼에 뿌려진다.
“저, 저격! 저격이다아아아!”
김대현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고함을 질렀고 근처에 있던 육공, 정보국 요원들이 우당탕 임유진의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누님! 괜찮아요? 누님!”
“김대현! 시끄러! 응급 로봇을 불러! 상처가 심각하다!”
이세화는 베테랑 해병답게 이불보를 임유진의 총상에 밀어 넣어 피를 지혈했다.
충격파에 그녀의 뺨이 깊게 패이며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임유진의 뺨을 짝짝 쳤다.
“의식을 잃으면 안 돼! 조금만 있으면 응급 로봇이 올 거야!”
이세화가 몸을 날리면서 임유진은 가슴이나 헤드샷은 간신히 피했지만, 총알에 맞은 부위가 좋지 않았다.
심장에서 10센티미터 위쪽 어깨.
쇄골과 어깨뼈가 대구경 저격총에 완전히 으스러졌고 임유진은 숨을 헐떡였다.
“너도 엄마잖아! 엄마라면 버텨! 아들이 돌아오는 걸 기다려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반드시 아들을 데려올 건데!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해! 버텨어어!”
엄마라는 말에 생기가 사라지던 임유진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이, 이, 이백…… 이십…… 사, 삼십만.”
“230만?”
“위, 위험. 나…… 나는 그거…… 말…….”
임유진은 힘을 쥐어 짜내 이세화의 귀에 230만이라는 숫자를 속삭였다.
곧바로 경찰의 응급 로봇이 이세화를 밀치고 그녀에게 응급수술을 바로 시행했다.
임유진의 침실은 곧바로 수술실로 바뀌고 로봇들은 능숙하게 임유진의 상처를 봉합하고 그녀에게 수혈을 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팀장님도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세화는 침대 옆에 덩그러니 앉아서 230만이라는 숫자를 되뇌었다.
230만 원. 원화로는 비싼 밥 하나 먹으면 끝이고 230만 달러?
230만 달러도 페어차일드가 낀 개발사업을 생각하면 푼돈이다.
‘230만……. 230만…….’
x4 폐차장
이진영은 아직 월미도에 있었다.
범인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한 중부서로 가봤자 지루한 전화대기가 이어질 거고, 괜히 공안 3사가 복닥대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일부러 월미도 역으로 가서 근처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신희정은 위성으로 이진영을 추적할 테고 시간이 나면 담배나 피운다며 이쪽으로 올 것이다.
여전히 사건은 천도영이든 류모성이든 오리무중이다.
범인이 뭘 노리는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각각의 동기와 사건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브이 어떻게 생각해?”
– 이세화 팀장님 말입니까? 믿을 수 있냐는 말을 할 당시 그분의 표정 분석을 복기할까요?
이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납치사건 말이야.”
– 아.
EV-1은 의외라는 듯 짧게 ‘아’라고만 대답했다.
이진영은 곁눈질로 로봇이 연산 사고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상한 점 투성이입니다. 경위님과 이세화 팀장님의 추측이 맞다면 범인들은 굳이 경찰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 그건 확실해. 놈들은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어. 음…….”
가만 생각하던 이진영은 다시 핑거스냅을 했다.
“그걸 안 생각해봤군. 추리소설을 읽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질문이었는데 말이야.”
EV-1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임유진을 협박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굴까? 유괴사건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
– 페어차일드와 신인천 개발 공사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공판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래, 그 양반들은 빨리 합병 결정이 되어 개발에 착수하기를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 경쟁사가 아닐까요?
“경쟁사?”
– 페어차일드를 밀어내고 개발에 끼어들려는 회사. 페어차일드 외에도 아선 건설이나 마츠시바 건설 등이 인수합병을 시도했습니다. 당시는 민영화 조건도 무르익지 않았고 츠루마츠 일대의 롱꺼 세력도 건재할 때라 포기했습니다만.
“마츠시바, 아선……. 그놈들은 미국 대사관에 딱히 연은 없을 거야. 아 대사관 문의는 어떻게 됐지?”
– 정보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빌어먹을 새끼들. 명색이 혈맹이고 우방인데 이럴 때는 상전 노릇을 한단 말이야?”
이진영은 화풀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또야? 아 이 부장님 진짜 사람 달달 볶으시는구만?”
또 이민호였다. 이진영은 한숨을 쉬고 이번에는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 야! 이 쌔꺄! 너 어딨는 거야!
“아, 담배 피우러 요 앞 월미도 역에 나와 있습니다.”
– 뭔 담배를 거기까지 피우러 가!
“아이 뭐 강력부 분위기가 흉흉해서 말이죠?”
– 시끄럽고 전화 받아!
“받고 있지 말입니다?”
– 아니! 임유진이 원거리 저격에 당했고 범인이 너를 지목했어! 곧 전화를 네 쪽으로 돌릴 거야!
이진영은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임유진이 죽었다고요?”
– 아니! 중환자실에 이송되었다고!
“이세화 팀장님은요! 그분은 총에 맞았습니까?”
이세화는 임유진을 만나러 갔다.
– 어? 이세화가 거기 간 걸 너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분은 괜찮냐고요?”
– 어! 괜찮아! 뺨을 스치고 지나가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야!
이진영은 문득 등골이 섬뜩해졌다.
두 사람이 움직이는 걸 눈치채고 적은 ‘단서’를 제거하기 위해 임유진을 쳤다.
육군 공안까지 따돌렸지만 두 사람의 움직임이 샌 것이다.
이진영은 아까 이세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을 지웠다.
이 저격을 한 놈이 누구든 간에 임유진을 처음부터 납치할 생각은 없었고 노리는 건 천도영 쪽이었다.
“부장님, 이세화 팀장님에게 공격 로봇을 붙이셔야 합니다! 그녀도 노리고 있어요!”
– 그것보다. 어? 어! 알았어. 이진영 시간 없다! 전화 받아!
이민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고 또다시 이진영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 여어 선수교체. 이진영 경위. 몰랐는데 당신 꽤 유명하더군. 여름에 굴다리를 폭파하게 만든 게 당신이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이진영은 놈의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지만 이진영은 받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반쯤 피우고 나서야 정신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 이 새끼 너 미쳤어?
“아 미안, 허브차를 마시고 식후땡이라. 식후땡은 너도 이해한다며?
– 어허허……. 새끼 똘기 보게?
이진영은 또 전화를 끊었다.
그는 월미도역 세븐일레븐으로 가서 삼각김밥 하나와 오징어짬뽕 컵라면을 샀다.
전화가 정신없이 울렸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삼각김밥을 으적거렸다.
– 너 뭐 하는 거냐? 지금 밥이 넘어가?
이진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나 보고 있냐?”
– 보고 있지. 경찰 월급도 꽤 셀텐데 편의점 음식이 뭐냐아? 비싼 것 좀 먹지.
이진영은 월미도 역의 CCTV 위치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CCTV 중 하나를 쳐다보며 ‘너도 먹을래?’하는 투로 라면 면발을 들고는 후루룩 먹었다.
– 이 새끼. 먹방쇼라도 보여줄 기센데? 너 이거 경찰청장이 보고 있는 거 알아?
“아이고오 우리 청장님. 일선 경찰들이 이렇게 삽니다요. 그러니 외근비랑 특근비 좀 잘 챙겨주십쇼오.”
이진영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너 미쳤냐? 애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애가 목적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애가 가지고 있는 뭔가겠지.”
– 뭐, 뭐?
처음으로 범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진영은 전화를 계속 끊으며 이제는 심리적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했고 그동안 알아낸 사실로 놈에게 한 방 먹였다.
“그리고 거래한 건 어떻게 됐냐? 애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내준다고 그러지 않았나?”
-흥, 네가 그렇게 뻗대는 데 내가 어떻게 호의를 베풀겠어?
“그럼 말든가.”
이진영은 전화를 또 끊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중부서 강력전담부에서는 ‘저 또라이 보게’라고 하면서 농담이 터졌지만, 경찰서장실에서는 중부서 서장이 경찰청장에게 미친 듯이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벨은 다시 울렸다.
이진영은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크으하는 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범인님 많이 쫄리셨나 봐? 무슨 사춘기 첫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미친 듯이 전화를 거시네?”
– 이 새끼 농담이 나와? 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그거 아냐? 웡꺼 패거리들은 돈 목적의 납치를 할 때는 죽여놓고 생각해. 네 말대로 아이의 진술이나 피부 등에 남아있는 증거들을 감식 로봇이 이 잡듯이 뒤져내서 쫓아올 수 있으니까. 나도 처음에는 네가 그럴 거라 생각했어.”
– 그래서 뭐.
“그게 의외였지. 웡꺼의 방식이 아니거든. 난 니네들이 웡꺼에게 하청을 줬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진영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여 여운을 남겼다.
범인은 잠시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어떻게 말하는 게 유리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그거 아냐? 우리의 웡꺼 형님께서 널 쫓고 있어. 희망빌라가 실은 그 집 공장이었다나?”
– 뭐, 뭐?
범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한 건 범인뿐만이 아니었다.
헤드폰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이민호 부장이 허탈하게 말했다.
“이진영 이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웡꺼는 또 뭐고 공장은 또 뭐야?”
이민호는 곁눈질로 정보국과 육군 공안부를 바라봤다.
두 집안 다 호떡집에 불난 것마냥 ‘웡꺼와 무관’, ‘인질은 살아있다’ 따위의 말들을 목청 높여 외쳐댔다.
이민호는 이진영의 천연덕스러운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새끼, 이거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씩 미소를 짓는 걸 보면 딱히 이진영을 책망하려는 말투는 아니었다.
“니들 진짜 클났네? 공안 아자씨들이 쫓고 있는 것도 그렇고. 웡꺼가 잡으면 가만 안 둔다고 나한테 직접 그랬걸랑?”
– 거짓말. 네가 웡꺼를 만났다고? 웡꺼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웡꺼가 나중에는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더라. 또 모르지 나중엔 진짜로 술친구가 될지. 아, 그리고 니들, 경찰, 공안 기타 등등 오만 군데에서 니들이 사용한 엑소슈트도 쫓고 있다. 보육 로봇 조질 때는 잘 써먹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