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56
제56화
이민호 부장은 이제야 엑소슈트에 대한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요것 봐라’하는 표정으로 CCTV에 비치는 이진영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진영은 목숨을 걸고 조사한 정보들로 범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지금이라도 좋은 말로 할 때 애를 돌려주고 도망치는 게 최선이야. 우리는 몰라도 웡꺼가 너희를 잡으면 어우……. 난 상상하기도 싫다. 옛날 중국 형벌 중에 사람 피부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는 게 있걸랑? 웡꺼는 전통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거 되게 좋아할걸?”
웡꺼도 경찰 끄나풀의 지직거리는 핸드폰 화면으로 이 대화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오타이를 기울이며 씩 웃었다.
“미친 새끼.”
이진영은 쓰레기를 정리한 후 청소 로봇에게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도망치라고? 그럴 순 없지. 돈을 내놔.
“이제 와서 납치범 놀이를 하시려고? 다 안다니까? 페어차일드.”
– …….
또 납치범은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하나 묻자. 류모성은 왜 납치한 거냐?”
이진영은 이 질문을 할 때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 류모성은 또 뭐야?
“광동어와 한국어를 쓰는 꼬마. 이마에 해리포터 비슷한 흉터가 있고 제법 호객행위도 잘하지. 따이예, 파이러이아~~ 니떠게처이허우허우쎄익아(나으리 어서 오세요. 여기 요리가 맛납니다~). 그놈 때문에 아주머니 가게 단골이 되었거든.”
– 그게 누구냐고?
“몰라? 너희들이 데려가지 않았나? 범행 현장을 아이나 아이의 보육 로봇이 목격해서 말이야.”
이진영은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와 이세화 팀장의 추리는 증거가 빈약해서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과연 이놈들이 류모성 사건에도 연관이 있을까?
– 그, 그딴 거 몰라.
한순간의 떨림. 이진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웡꺼의 반응을 기억하고 있었다.
웡꺼는 류모성 사건을 정말로 몰랐고 그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이제 동떨어졌던 두 개의 납치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듯 했다.
“너희들이로군. 너희가 류모성까지 납치한 거야.”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좋아. 나도 너희들을 검거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두 아이가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이 내 목적이다. 까놓고 말하자. 원하는 게 뭐냐?”
– 돈, 2억 달러.
“정말로? 너희들이 뭘 원하는지 안다고 했을 텐데?”
– 흥, 결국은 돈이 목적이지 돈을 가져와. 열차는 그대로다. 한일 라인.
이진영은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았다. 그리고 거래한 건 잊지 않았겠지?”
– 마침 잘 왔어. 월미도 역 구내 보관함을 확인해라. B29, 비번은 0371.
이진영은 낯익은 숫자를 듣고 픽 쪼갰다.
“그럼 이따 보자고. 만날 수 있다면 말이야.”
– 내빼지나 마라. 너는 내가 죽여버릴 거니까.
이진영은 다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범인과의 통화가 끊기고 또다시 오만 군데에서 전화가 빗발쳤지만 이진영은 아무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는 월미도 역사 한쪽의 보관함으로 걸어갔다.
보관함은 높이가 5미터에 한쪽 벽면 전체가 보관함이었다.
보관함에 물건을 맡기고 빼내는 건 사다리 같이 생긴 로봇이 담당했다.
이진영이 디스플레이에 보관함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로봇이 냉큼 해당 번호의 사물함에서 물건은 꺼내왔다.
“박스?”
– 폭탄일지도 모르니 제가 개봉하겠습니다.
EV-1은 이진영을 뒤로 물러서게 한 후 조심스럽게 골판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또 다른 책가방이었다.
“천도영의 것이군.”
천도영의 가방은 류모성의 가방과 비슷한 란도셀이었고 색깔만 파란색으로 달랐다.
이진영은 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봤지만, 딱히 단서가 될만한 것들은 없었다.
책, 단소, 후렌치파이 두 개, 새우깡 한 봉지, 쟈키쟈키 한 봉지.
“학교에 뭔 과자를 이렇게 많이 가져간 거야?”
– 범인의 것일지도 모르니 지문검색을 할까요?
“범인이 중고물품 사기꾼도 아니고 과자봉다리를 일부러 집어넣었을 리는 없잖아? 그리고 그 정도로 영리한 놈들이면 벌써 지문을 다 지웠을 거야.”
이진영의 말대로 봉지나 책에서는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
그는 가방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가방 옆면 부분에서 ‘굿즈’하나를 발견했다.
어린이들이 흔히 좋아하는 동양 용(dragon) 캐릭터 열쇠고리였지만 이진영은 이 물건을 알고 있었다.
탄피를 녹여서 모양을 만들고 알록달록 유리알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익살스러운 동양 용의 모습을 묘사한 열쇠고리.
“이건 굴다리에서 파는 건데.”
EV-1은 열쇠고리를 스캔하고 바로 대답했다.
– 탄피가 소재라 요새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인가 봅니다.
어린이들은 무기를 좋아하고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니 더더욱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냈을 것이다.
이진영은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임유진은 고급 빌라에 살고 있어. 천도영의 통학로는 굴다리와 거리가 멀고. 보육 로봇이 24시간 붙어 다니며 보고했을 테니 이걸 살 기회는 없었을 거야.”
이진영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 전에 왜 천도영은 그 학교를 다니는 거지?”
이 역시 이진영이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엄마가 1년에 수십억씩 벌어들이는 데 뭐하러 인천 중부초등학교를 다닌단 말인가?
중부 초등학교는 난민의 아이인 류모성이 다니는 학교였고 그냥 기본소득을 받는 일반가정의 아이들도 많았다.
반면 임유진 정도의 스펙이라면 천도영을 서울의 유명 국제사립학교를 보내기에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물어보고 싶어도 지금 임유진은 중상으로 입원 중이었고 이세화도 부상을 당했다.
수수께끼를 풀면 풀수록 또 다른 수수께끼가 생겨나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히드라를 연상시켰다.
모가지 하나를 베면 또 다른 모가지가 튀어나온다.
머리가 복잡해진 이진영은 가방을 들고 월미도 계단으로 걸어가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느긋한 오후 햇살을 받아 노점의 방수포들이 반짝이고 방벽 이쪽의 정돈된 시가지도 햇빛을 받아 나른하게 보인다.
이진영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시가지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방벽 안쪽의 아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사하고 있었지만, 바깥쪽의 아이는 한국인인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아이의 실종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는 담배 연기가 더 씁쓰름하게 느껴졌다.
이진영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에게 접근했고 EV-1 그 앞을 막아섰다.
“전화를 아, 안 받아서. 직접 전해주래요.”
접근한 사람은 중학교 2학년쯤 되는 난민 소년이었고 쭈뼛쭈뼛하면서 종이쪽지를 하나 건넸다.
EV-1은 기계적인 태도로 엄지와 검지로 종이쪽지를 잡고 읽었다.
– 경위님, 엑소슈트가 발견된 것 같습니다.
이진영은 담배를 난간에 비벼끄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지?”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진영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웡꺼가 범행에 사용된 엑소슈트를 찾아냈다면 굳이 그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자기들로는 단서가 없으니 이쪽의 감식 로봇을 이용하시겠다? 아무튼 정보국보다 더 빨리 찾았을 줄이야? 공안 3사보다 웡꺼의 조직망이 더 유능하시군 그래? 어디래?”
– 외곽 폐차장이라고 합니다.
이진영은 10달러 몇 장을 꺼내서 심부름 온 아이에게 건네주고 역을 내려갔다.
역 밑 계단에는 바바리코트를 입은 이민호 공안 부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안 3사 요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승대 팀장은 수염이 부숭부숭한 얼굴을 들이밀며 마치 폭발물을 해체하는 것처럼 이진영에게서 천도영의 가방을 낚아챘다.
“왜요? 체포라도 하시게요?”
박승대는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부하직원에게 내밀고 한 대 때릴 기세로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승대야, 나와 봐. 내가 물어볼게. 이진영이 그거 쪽지 뭐야? 누가 준 거야? 시발 내가 그래도 명색이 작전지휘잔데 나도 좀 알자.”
이진영은 냉큼 종이쪽지를 구겨서 EV-1에게 던졌고 로봇은 그걸 발로 밟아 비틀어 버렸다.
EV-1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냥 밟아 비트는 것만으로도 갈가리 찢어졌을 것이다.
“이 쌔끼들이 미쳤나? 야, 너 또 어딜 갈라고 그러는 거야? 뭔 핑계를 대게?”
이진영은 뭔가 댈 만한 핑계가 없을까 생각했다.
“아니다. 이번에는 그냥 내가 따라갈란다. 어디로 가는 거냐?”
“예? 부장님이요?”
“이진영이 니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이도 아니고. 언제까지 니를 그냥 뿔난 망아지처럼 오만 곳을 들이받게 내버려 두겠냐?”
찰칵.
이진영이 방심하는 사이 이민호 부장은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자신의 팔목에도 반대쪽 수갑을 채웠다.
이진영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EV-1에게 팔을 들었지만 EV-1은 잠자코 두 사람을 지켜봤다.
“나 참.”
그때 박승대 팀장이 깜짝 놀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부장님 이 사고뭉치랑 출동하신다고요? 안 됩니다. 부장님은 이 작전의 총지휘자 아니십니까?”
“내가 궁금해서 그래. 승대야 잘할 수 있지?”
“그게, 아무래도 부장님이 있어야 잘 돌아간달까요? 육공 놈들이 너무 뻗대고 있습니다.”
이진영은 거 보란 듯이 박승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박승대 난 널 믿는다. 넌 내가 꽂은 애잖아?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알려주고.”
“그건……. 예 알겠습니다. 부장님.”
이진영은 별수 없이 이민호 부장과 함께 순찰차 뒤에 탔고 순찰차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야, 진짜냐?”
“뭐가요?”
“웡꺼, 만난 거.”
“믿으시게요?”
“거짓말이었어?”
“아뇨?”
“하아, 이 새끼 이거 꼴통이네.”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 수갑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이진영은 담배를 피우려고 오른손으로 점퍼 안쪽을 뒤졌지만 수갑에 묶여있는지라 이민호의 손도 딸려왔다.
결국 이진영은 흡연을 포기하고 앞만 쳐다봤다.
“이세화 팀장은 괜찮대요?”
“너는 질문해도 되고 나는 안 되고. 그러기 있냐?”
“아, 부장님 은근 삐돌이시네?”
“야, 상관한테 삐돌이가 뭐야?”
이민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옹졸하다고 생각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꽤 충격을 받은 것 같더군. 원거리 저격이었으니까.”
“원거리 저격이라. 모델은요? 혹시 제너럴 에어로믹스 랜서에 달린 저격총 모듈 이런 거 아니었나요? XRD-07이나 M-345 같은?”
이민호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벙찐 표정으로 이진영을 바라봤다.
“역시나. 부장님이 이야기해주셨으니 저도 이야기해드리죠. 보육 로봇 무력화에 사용된 엑소슈트를 확보하러 가는 겁니다.”
“뭐? 그걸 어떻게 찾아냈는데?”
공안 부장 이민호는 경찰 정보조직의 최고위급 인사였다.
강력전담부에는 정보국이나 육군 공안부도 있었지만 그들은 이진영이 알고 있는 것의 반의 반도 모르고 있었다.
“야 그걸 어떻게 알아냈냐고?”
“사람이 덕을 쌓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법입니다. 허허허허.”
이민호는 그의 넉살에도 그저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진영은 이진영대로 웡꺼와 수사상황에 대해 거래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