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59
제59화
희망빌라 폭파 때 죽은 대위(진)의 영결식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전차? 성난 여론에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는 육군이 여기에 올 턱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진영은 이민호에게도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고 여기로 왔고 지금 육공의 지시를 받은 전차 중대는 인천 외곽 고속도로에서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헬기? 헬기는 대공미사일을 두려워해 벌써 미사일 재밍거리 위로 거리를 벌려놓았다.
“저 미친놈들. 하하하. 마음에 들었어.”
전차포를 발사한 건 다름 아닌 EV-1이었다.
이곳 폐차장에는 간위예 전쟁 때 쓴 무기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아까 EV-1이 날린 전차 상판 역시 간위예 전쟁의 부산물이었다.
EV-1은 주퇴기도 떨어져 나간 전차포 구조물을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옆구리에 끼고, 전차 사격통제시스템을 해킹해서 포탄을 날렸다.
쾅쾅쾅!
전차는 자동장전 방식이었고 포탄을 시원하게 날리며 허공에 뜬 엑소슈트를 격추시켰다.
두 번째 포탄이 명중했을 때 이민호는 환호성을 질렀다.
“끼얏호오! 맞았어! 봤어? 봤어?”
저격수의 엑소슈트가 바닥에 처박히더니 무너지는 쓰레기 더미에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이민호는 흥분해서 트리거를 마구 눌렀지만 EV-1은 더 이상 포탄을 발사하지 않았다.
“뭐야! 왜 끝장을 내지 않는 거야!”
EV-1은 예비용 트리거를 모듈째 뒤로 툭하고 분리하고 토리이 쪽으로 내달렸다.
“야 임마! 설명을 해야지!”
“부장님! 숨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슴다아아아!”
이진영이 토리이 뒤에서 자동소총을 쏘며 고함을 질렀다.
EV-1과 이진영은 적 엑소슈트의 기종을 한눈에 알아봤다.
전차포로 끝장을 냈으면 좋으련만, 전차포는 보병용 고폭탄이었고 적 엑소슈트는 아슬아슬한 순간 몸을 틀어 결정타를 피했다.
– 경위님! 올라타십시오!
“스와트에게 항공신호를 보내! 부장님이 위험하다!”
EV-1은 블랙스와트의 강하사인을 위쪽으로 깜빡이고 엑소슈트가 격추된 곳을 향해 롤러대시로 달렸다.
차릉.
EV-1은 달리는 와중에 전자식 파일벙커를 팔목의 수납함에서 꺼냈고 이진영은 레일건의 출력을 높여 엑소슈트의 관절을 노리려고 했다.
“뭐가 랜서야! 시팔! 웡꺼 이 시팔롬들! 팔라딘을 팔다니!”
미군의 제식 엑소슈트인 제너럴 에어로믹스의 랜서가 라이트급이라면, 팔라딘은 초헤비급 복서였다. 게다가 팔라딘은 슬라스터 노즐이 기본 장비된 걸 보면 알 수 있듯 이 기종은 처음부터 우주에서의 교전을 상정하고 만든 기체였다.
이진영이 전쟁에서 상대한 북중국군의 엑소슈트와 현용 엑소슈트와는 격이 달랐다.
팔라딘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정확히 EV-1을 락온하고 미사일을 발사했다.
– 해킹하겠습니다.
미사일 12발이 눈앞으로 날아오는 데도 EV-1은 물러서지 않았다.
로봇은 롤러대시로 쓰레기 파도를 역류하듯 올라타며 미사일을 한 발, 한 발 해킹했다.
마이크로 웍스의 자랑이자 수많은 군대가 탐을 낸 인공지능 EV-1.
이 로봇은 한때 육군의 서펜트 헬기도 정면으로 붙어 이길 수 있다고 말했고, 지금 그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미사일 7발이 EV-1의 해킹에 걸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팔라딘이 쏜 미사일은 대 능동해킹방어 장비가 걸려 있는데도 EV-1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었다. 세 발은 이진영의 레일건에 맞아 격추되었다.
이진영은 EV-1의 관제를 받아 레일건 조준 시스템에 뜬 대로 미사일의 노즐을 요격했다.
– 두 발은 몸으로 받아내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나머지 두 발은 너무나도 근접했고 EV-1은 전술방패를 들어 앞서 온 미사일 한 발을 아래로 탁구채로 스매시를 하듯 후려쳤다.
그러자 오렌지빛 폭발 화염이 EV-1의 오른팔을 타고 쓰레기 더미로 쏟아져 내리며 불이 확 치솟아 오른다.
EV-1이 롤러대시로 고속주행하는 발밑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가뜩이나 가연성 쓰레기나 유독가스가 많은 곳이었기에 불똥이 튀는 것만으로 불이 붙었다.
저 밑에 있는 관리공사 로봇들이 급히 소화기로 불을 끄고 난리였다.
하얀 소화액 사이로 뒤늦게 경찰청 본청의 스와트팀이 강하하며 소화액과 불이 뒤섞여 아름다운 마블링을 만들어냈다.
불이 번지는 것과 비슷한 시간 고철산의 붕괴는 멈췄다.
소규모로 쓰레기들이 쏟아질 뿐 주변은 마치 새로운 쓰레기 평원이 생긴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저 새끼! 뭐 하는…… 콜록!”
이민호 부장은 그 쓰레기 평원에서 권총을 들고 고함을 지르다가 블랙스와트의 구조 로봇에게 인도되어 급히 앰뷸런스로 향했다.
뒤늦게 교통체증을 뚫고 경찰과 육군의 지상부대가 속속 폐차장으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굴다리처럼 극심한 교전은 없었다.
몇몇 고주망태가 된 술꾼들이 전쟁이 다시 일어났다며 총을 허공에 마구 쐈을 뿐 쎄잉꺼는 경찰 돌입에 대응하지 않았다.
고철산 전체가 쎄잉꺼에게 중요한 구역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고철더미를 보호하자고 군경과 죽자 살자 싸울 일도 아니었다.
수많은 이권이 걸려있는 굴다리와는 사정이 달랐다.
이민호는 연기 속에서 기동하여 올라가는 EV-1과 이진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미친놈들.”
이진영은 EV-1의 수납함에서 화재 및 유독가스용 가스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썼다.
아직도 엑소슈트 팔라딘과 EV-1, 이진영의 교전은 끝나지 않았다.
불덩이 속에서 팔라딘이 마침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엑소슈트는 하얀 우주복을 입은 고릴라가 연상되었다.
다목적 팔이 앞으로 길게 쭉 나와 있고 역관절로 붙은 롤러대시와 다리, 그리고 전면 장갑은 또 우주왕복선의 기수처럼 둥그스름하고 이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팔라딘은 최악의 경우 단독 대기권 돌입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기체였으니 그 튼튼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핏 보면 엑소슈트 팔라딘은 긴 팔과 짧은 다리가 달린 달걀귀신에 여러 가지 우주복용 장비가 달린 모습 같기도 했다. 딱 봐도 공격 로봇처럼 생긴 EV-1의 각진 디자인과는 상극인 둥글둥글한 디자인이었다.
불더미 속에서도 팔라딘은 고릴라처럼 길쭉한 팔을 들었다.
챠릉.
놈 역시 파일벙커 모듈을 꺼내면서 한번 붙어보자는 시늉을 했다.
엑소슈트 파일럿끼리는 마치 중세시대 기사들의 일대일 결투처럼 파일벙커로 싸우는 기묘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사일이나 야포 등 탄약을 다 썼을 때 종종 중장기병들은 파일벙커만으로 적 엑소슈트를 쓰러뜨리기도 했다.
이런 들개 같은 싸움방식으로 유명한 것이 미군의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해기병 대대였다.
두 동맹국의 기병들은 북경 자금성에서 파일벙커로만 북중국군의 중장기병을 최소 3백 기 이상 쓰러뜨렸다.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원시인처럼 초합금 말뚝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것이다.
EV-1과 팔라딘은 불타오르는 쓰레기산에서 근접전으로 격돌했다.
피차 미사일은 전부 썼고 저격해봐야 서로에게 치명타를 넣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 경위님!
“알아! 파일벙커는 내가 찌른다!”
EV-1의 로봇 3원칙 이익형량은 굉장히 관대했다.
중상해와 중과실 외에는 인간이 상처 입어도 EV-1은 논리붕괴가 일어나지 않는다.
파르륵.
EV-1의 파일벙커가 먼저 전자식으로 추진되면서 달걀 비슷한 팔라딘의 전면 장갑을 스쳐 지나갔다.
드드드득.
하얀 방염타일이 벗겨지며 놈의 장갑에 파일벙커가 박히려는 순간, 팔라딘의 파일벙커가 EV-1의 배에 박혔다.
EV-1은 방패 아랫면으로 적의 파일벙커를 위에서 아래로 후려쳤다.
EV-1의 검은 장갑이 시뻘건 불꽃과 함께 갈려 나가고 모처럼 정비한 장갑프레임에 길쭉한 스크래치가 생겼다.
팔라딘의 프레임이 크게 휘청거리고 EV-1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놈의 배를 걷어 차버렸다.
그러자 달걀과도 같은 둥그스름한 장갑 및 연결부분이 보였고, EV-1은 그 틈에 파일벙커를 꽂아버리려고 했다.
장갑 연결부위에 파일벙커를 꽂으면 관 속에 있다 말뚝이 박히는 거나 다름없었고 중장기병들은 이 상황을 ‘흡혈귀 살해-뱀파이어 슬레이’라고 불렀다.
EV-1은 엑소슈트와의 실전경험이 없는데도 단박에 엑소슈트 근접전의 약점을 찾아내고 실행했다.
이진영은 헤드모듈에 녹색 표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눌렀다.
로봇과 인간의 이런 협업 공격은 리듬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했고 이진영은 ‘만식이’ 등과 숱하게 실전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적 팔라딘 엑소슈트 파일럿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엑소슈트에는 파일럿이 긴급사출할 수 있도록 다운폼이라는 장갑이 앞뒤로 벌어지고 자세를 낮추는 형태가 있었다.
파일럿은 EV-1의 파일벙커가 박히기 전에 다운폼으로 달걀 같은 장갑 위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드르르르르륵.
엑소슈트 파일럿은 처음부터 EV-1이 아니라 일종의 파일럿인 이진영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소형 레일건의 총신을 자른 ‘오브레즈 피스톨’을 미친 듯이 난사했다.
정확도는 기대할 수 없지만 레일건 탄자가 짧은 총신에서 분무기처럼 뿜어져 나오면서 이진영을 때렸다.
EV-1은 결정타를 먹이는 걸 포기했다. 로봇은 곧바로 진압방패를 높이 들어 이진영 쪽으로 날아오는 레일건 탄자들을 막았다.
적 파일럿은 생각보다 유능했다.
과연 이동포대는 다 날아갔을까?
EV-1은 센서의 경고사인을 인식하고 원형으로 덮쳐오는 각종 총탄 등을 인식했다. 팔라딘의 파일럿이 ‘원탁의 기사’라 부르는 저격총 포진이었다.
이 포진에 갇히게 되면 거미줄 안에 들어온 것처럼 등 뒤를 노출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EV-1은 진압방패를 버리고 왼손으로 놈의 파일벙커를 발로 밟고 오른손으로 다운폼된 엑소슈트를 잡고 옆으로 밀어버렸다.
유도나 씨름의 밧다리 기술이었다.
“하하하하, 소용없다. 파일럿은 잡혔어!”
팔라딘의 파일럿은 어느새 엑소슈트 안으로 쏙 들어갔고 EV-1과 이진영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격에 노출되었다.
EV-1은 놈을 유도기술로 쓰러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팔라딘은 EV-1보다 훨씬 더 무거웠고, EV-1은 기둥처럼 박혀있는 팔라딘을 축으로 붙잡고 롤러대시를 가동하더니 바닥의 F-15K의 주익을 미끄럼틀 삼아 캐터펄트에서 쏘아 올려지는 함재기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타다다다다다.
TOT 저격과 EV-1이 도약한 것은 거의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팔라딘 본체의 XDR-07 저격모듈이 허공에 떠오른 EV-1을 노렸다.
그러나 슬라스터 노즐이라면 EV-1도 장비하고 있었다.
치익.
허공에서 EV-1이 자세를 수정하고 등 뒤의 로켓 모듈을 분사했다.
콰앙!
애프터 버너가 터지면서 EV-1은 맹렬한 속도록 팔라딘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팔라딘은 턴픽 기동으로 제자리에서 몇 번 빙글빙글 돌면서 연막탄을 분사했다.
하지만 EV-1을 고작해야 연막으로 기만할 수는 없었다.
EV-1은 정확히 팔라딘이 기동하는 옆으로 떨어졌고 또다시 파일벙커를 팔라딘의 옆구리에 박았다.
가가가가각!
하얀 방염타일이 벗겨져 나가고 불꽃이 튀겼다.
적 파일럿 역시 파일벙커를 맞찔러서 마치 권투의 크로스카운터처럼 EV-1의 머리,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진영을 노렸다.
“뭐?!”
등 뒤에 있어야 할 이진영의 모습이 없다.
이진영은 어느새 불바다가 된 쓰레기 밭에 먼저 착지한 후 레일건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엑소슈트의 다리 관절을 노렸다.
EV-1과 이진영의 즉흥적인 연계 플레이였다.
특단 사건 이후로도 여러 번 난전을 겪은 명콤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