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60
제60화
EV-1이 엑소슈트의 주의를 끄는 사이 이진영이 결정타를 먹였다.
투칵!
둔중한 관통음음과 함께 엑소슈트 파일럿은 무릎에서 무지막지한 고통을 느꼈다.
최대 출력 레일건이 무릎 관절의 약한 부위를 관통했다.
“으으윽!”
엑소슈트는 로봇이 아니다.
파일럿이 부상을 입었으니 놈의 움직임 역시 전처럼 기민하지 않았다.
EV-1은 놈의 오른쪽 다리가 휘청이는 걸 보고 다시 한번 파일벙커를 찔렀다.
이번에는 이진영이 트리거 모듈을 누를 수 없기에 놈의 저격모듈 XDR-07을 박살 냈다.
팔라딘의 파일럿은 그 와중에도 이진영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캉!
파일벙커가 팔라딘의 저격모듈에 박히며 또다시 폭발이 일어났다.
푸른 전류가 사방으로 퍼지고 저격모듈은 물론이고 고릴라 같은 긴 팔 역시 파일벙커에 찍히며 기동불능이 됐다.
이제 팔라딘이 EV-1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미사일 몇 발과 이동포대에 실린 각종 무기뿐이었다. 하지만 팔라딘 파일럿은 깨끗하게 전투를 포기했다.
“엘시드! 자율주행!”
다른 엑소슈트와 팔라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바로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팔라딘 이전의 엑소슈트들은 오직 파일럿이 각종 정보를 판단하고 전투를 수행해야 했지만 팔라딘은 엑소슈트 전임 인공지능의 보조로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유사시 퇴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라딘의 인공지능 엘시드가 엑소슈트의 조종권을 이양받으면서 EV-1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카각.
EV-1의 전면장갑에 다시 한번 파일벙커가 작렬하고 놈은 그 반동을 이용해서 뒤로 점프했다.
EV-1보다 팔라딘이 우위에 있는 점은 슬라스터 기종이었다.
애초에 우주전 전용으로 개발된 기체라 자세 안정성은 물론이고 헬기처럼 호버링 이동 등 기동전이 우위였다.
놈은 EV-1과 멀찍이 떨어지더니 갑자기 다운폼이 되었다.
팔라딘의 파일럿은 상부 장갑으로 기어올라 이진영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아예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이진영은 급히 놈에게 레일건을 겨눴지만 최대 출력으로 쏴 재꼈으니 배터리와 총열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퍼드득퍼드득.
방아쇠를 눌러도 구식 가스렌지 돌리는 소리만 나고 팅하고 레일건의 방열판이 박살 나며 아래로 떨어졌다.
이진영은 급히 권총을 찾았지만 권총은 이민호 부장이 가지고 있다.
아마 권총이 있어도 모습을 드러낸 파일럿을 노리긴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놈도 웡꺼가 말한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하하하하하, 간만에 즐거웠다. 이진영! 이브이원! 또 보자!”
놈은 불꽃과 연기 속에서 뒤로 드르륵 롤러대시를 하며 바로 인천 앞바다로 몸을 던졌다.
뒤늦게 육군의 공격헬기가 내려와서 괜히 기총소사를 했지만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 엑소슈트를 찾는 건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나 다를 바 없다.
– 경위님, 무사하십니까?
“어, 거시기털이 조금 꼬실려진 것 빼고는. 그보다 이브이 결정타를 넣을 수 있었잖아? 왜…… 아니다.”
그는 쑥스러웠는지 괜히 걸레짝이 된 EV-1의 전면장갑을 툭툭 두드렸다.
곳곳에 세로로 길게 찍힌 자국과 구멍이 뚫린 자국들.
EV-1의 성능은 최신예 군용 엑소슈트와 맞서고도 거의 호각이었다.
만약 파일럿이 저런 미친놈이자 베테랑이 아니었다면 아마 EV-1은 몇 합 주고받을 필요도 없이 단숨에 제압했을 것이다.
“또 아무 소득이 없이 개고생만 했군.”
– 소득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어노커가 아니었어.”
– 예, 전자식 파일벙커였습니다.
EV-1과 팔라딘은 여러 번 파일벙커를 사출했지만 둘 다 탄피를 배출하지 않았다.
팔라딘은 미국의 우주전 기종이고 우주상에서의 ‘데브리’ 문제 때문에 탄피배출식 도어노커는 쓰지 않는다.
중국군이 미국의 궤도 엘리베이터를 공격할 때 쏜 탄피가 대량으로 우주공간을 떠돌았고 하필 위성궤도에 AK-99 탄피가 떠돌아다녀서 아직도 골칫거리였다.
“그럼 도어노커는 뭐지? 딴 놈인가?”
– 그것과 관련된……. 아, 이민호 부장님의 호출입니다.
EV-1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을 아꼈다.
이진영은 바로 EV-1의 등 뒤에 올라타고 팔라딘과 호각으로 싸운 명콤비는 폐차장의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이진영은 가스마스크를 벗고 이민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이민호의 뺨은 대전차 저격총의 탄피에 데여서 벌겠고 화재 때문이지 머리 반쪽만 파마한 것처럼 그을렸다. 거기에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카매서 오셀로의 흑인 분장을 한 것만 같았다.
“너 이 새끼 뭐야?”
“교전 후 이상 무.”
이진영은 군대에서처럼 대충 보고를 했지만, 이민호는 엑소슈트에 맞서 대활약을 펼친 이진영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이진영은 뒤늦게 몰려든 순찰차와 육군 장갑차들을 보면서 낄낄거렸다.
“그거 아세요? 기병대는 언제나 존나 늦게 온다니까요? 영화 클리셰지 뭐.”
이진영이 농담을 쏟아내려고 할 때 이민호 부장이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이건 또 뭐죠?”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어. 너 이 자식 이제부터는 나랑 저승까지 가는 거야.”
“와우, 부장님 같은 분과 동반자살 할 줄은 몰랐네요. 기왕이면 이쁜……. 그래 이세화 팀장님 같은…….”
순찰차에서 이세화가 내리면서 이진영의 농담이 멎었다.
그녀는 ‘뭐 이런 놈이 다 있어?’하는 투로 팔짱을 끼고 그를 뜨악하게 쳐다봤다.
“이진영 경위 대체 뭐죠?”
“고거슨 나중에 서면으로다 자세히…….”
이세화는 검지와 중지를 자기 눈에 가져다 대고 ‘너 지켜본다’하는 투로 이진영을 가리켰다.
“이래저래 미움받는구만.”
이진영은 이민호와 함께 잠자코 인천 중부서로 되돌아왔다.
* * *
“수갑 안 풀어주십니까?”
“너 임마 용의자로 안 처넣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줄 알아. 상부에서는 어떻게 그 엑소슈트가 있는 곳을 찾아냈고, 어떻게 각종 고급 정보들을 알아냈는지 내사과더러 조지라고 난리야.”
“부장님이 막아주신 건가요? 와 고마우셔라. 츤데레셨네?”
이민호는 쑥스러웠는지 흠흠 하고 괜히 헛기침했다.
“아무튼, 널 위해서라도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아.”
경찰서 주차장에서 이민호는 험악하게 그들을 쳐다보는 육군 공안 요원들을 노려봤다.
“또군요.”
“한두 번인가? 시팔 저 새끼들은 뭐 하면 용산으로 끌고 가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여기 육공이야아.”
육공이라는 말에 육군 공안 장교들이 잡아먹을 듯 두 사람을 노려봤다.
육공에 당해 본 사람들은 잘 아는 레퍼토리였다.
놈들은 영장 따위는 껌종이로 써먹는 놈들이었고 뭐든지 국가안보가 어쩌고 하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한다.
이진영은 곧바로 ‘대령중령소령은~~’ 노래가락을 뽑으려고 했지만 이민호 부장이 팔을 잡아끌어서 입을 닫아야 했다.
이진영은 강력전담부 앞에 가득 쌓인 중국집 그릇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이고오오. 다들 수고들 하시네. 아주 월미도 맛집 순례를 다니셔요. 왜? 일상 영상도 찍고 따봉도 받으시고들 그러지?”
이진영은 발로 요릿집 그릇을 툭툭 두드리다가 눈을 반짝였다.
배달 음식점은 거의 다 중국요리집이었다.
굴다리에는 미슐랭 별을 받은 중화대루의 레스토랑도 있고 유명한 광동요리점들이 꽤 많으니 요원들이 앞다퉈서 중국요리를 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민호가 시간을 확인하고 다섯 시 즈음이라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왜, 너도 하나 시켜주랴? 너? 맛나드라야.”
“아뇨, 됐습니다.”
이진영은 다시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어서 들어가시라는 시늉을 했다.
“슈퍼캅 이지냉이 싸인 한 번 부탁드립니다아아!”
“화면발 좋드만! 이거 더 유명인 되시겠어어!”
제일 먼저 들리는 건 중부서 동료들의 야유였다. 그들은 육군의 건카메라로 이진영과 EV-1이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진영은 동료들에게 주먹감자를 먹이고 이민호의 뒤를 따라 취조실로 걸었다.
그때 정 대령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이민호에게 말했다.
“이 부장님, 이거 육공 사건입니다.”
“정 대령. 뭐 다 육공 사건이래? 우리 애잖아? 그리고 나도 거기 있었어. 나도 용산으로 끌고 가게?”
“아뇨, 이건 군사병기와 관련된 거니 국방부 관할이고 육공 관할이지 않습니까?”
정 대령은 처음 봤을 때처럼 뱀 같은 눈매로 이진영의 아래위를 훑었다.
“저희 총장님이 정식으로 항의하실 겁니다.”
“육군 총장님은 무슨, 우리 애 데려가려면 국방부장관님은 불러와야 할걸? 이 사건 여기 경찰 관할이야. 통합회의에서도 그렇게 정하지 않았나?”
이민호는 ‘여기 육공이야’하는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정 대령은 이진영을 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이진영이 얻어온 수많은 정보들은 혹시 그가 웡꺼 패거리와 내통하지 않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진영은 공안 요원들의 눈총을 받으며 취조실이 아닌 회의실로 들어섰다.
x5 너구리굴 회의
이민호는 회의실로 들어오자 이진영의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를 건넸다.
“이거 설마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는 아니죠? 그리고 EV-1은 어디로 갔나요?”
이민호는 말없이 인터폰을 눌러 긴급점검을 받는 EV-1의 모습을 회의실 대형 모니터에 띄워줬다.
아선 인더스트리의 프레임 정비사들이 벌써 중부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장갑 교체를 하고 있었다.
이진영은 심드렁하게 파트너의 수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웨이브 펌 머리를 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미녀에 눈길이 돌아갔다.
“누구래요?”
“하여튼 새끼 밝히기는. 나도 잘은 몰라. 무슨 마이크로웍스의 부사장이라던가?”
여자는 마치 이진영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아는 듯 까만 보르헤스 담배를 피우다가 선글라스를 살짝 콧잔등으로 내리고 이진영을 쳐다봤다.
한쪽 눈동자는 황금색이었고 의안이었다.
여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워낙 몸매가 육감적이라 퇴폐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아, 여기 명함 있다. 제이미 킴이라던가? 청장님은 물론 행정총괄부 장관이랑 대통령이랑도 안다드라.”
이민호는 명함 지갑에서 마이크로웍스 부사장 제이미 킴의 명함을 찾아내 이진영에게 건넸다.
이진영은 제이미의 명함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를 슬쩍 맡았다.
샤넬 넘버5의 향기였고 어딘가 저 여자답다고 느껴지는 향기였다.
이진영은 명함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마이크로웍스는 원래부터 미군에 AI를 납품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태성AI를 인수하고 좀 더 규모가 커졌다. 때마침 호리코시와 태성이 특단 사건 스캔들로 몰락한 것도 마이크로웍스의 거대화에 한몫했다.
그 거대기업의 부사장쯤 되면 굉장히 바쁠 텐데도 굳이 시간을 내서 EV-1을 보러왔다?
이진영은 향수 냄새가 진한 명함을 톡톡 트럼프 카드처럼 테이블에 두드리다가 말했다.
“명함 가져도 되나요?”
이민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아하, 누가 여기로 불렀는지 알겠군요. 또 여름에 이어 신세를 졌습니다, 그려?”
“아이고오 별말씀을. 이쪽도 경위님에게 그간 신세를 많이 졌지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