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62
제62화
EV-1의 뜯겨 나간 장갑판이 한창 교체 중이었고 전자식 파일벙커 정비, 각종 레이더 센서, 요격미사일 보급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선의 엔지니어들이 마치 F1 머신에 달려드는 정비팀처럼 EV-1의 프레임에 달려들어 로봇을 고치고 있다. 이들도 인질범이 말한 시간이 다가오고 이진영의 파트너로서 한일 라인에 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진영은 파트너의 앞에서 한동안 만신창이가 된 로봇을 바라봤다.
“커피 드실래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근데…….”
문득 옆을 바라보니 웨이브가 찰랑찰랑한 긴 머리에 육감적인 몸매의 제이미 킴이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진작 중부서를 떠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마이크로웍스의 부사장 제이미 킴은 아직도 로봇행어에 있었다.
이진영은 그냥 자판기 커피를 호롭하고 마시고는 제이미를 뜨악하게 쳐다봤다.
“왜요? 자판기 커피가 저랑 안 어울리나요? 내가 자판기 커피를 주면 다들 그런 표정이야. 나 커피믹스랑 자판기 커피를 제일 좋아해요.”
제이미는 이진영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줄줄 말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이진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테넌트 이진영. 저는 마이크로 웍스의…….”
“제이미 킴. 압니다.”
이진영은 그녀와 악수를 하며 종이컵을 든 손으로 명함을 들어 보였다.
제이미는 악수를 마친 후 바로 말했다.
“루테넌트 이진영 당신이 뭘 물어볼지도 알고 있어요.”
“어음……. 혹시 시간이 있으신지? 식사라도?”
“하하, 재밌는 분이군요. 하지만 진짜로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제이미의 눈이 EV-1을 쳐다봤다.
이진영도 그녀를 따라서 EV-1을 바라봤다.
“놀라운 데이터에요. 중형(重型) 엑소슈트인 팔라딘과 호각, 아니 그 이상으로 맞서 싸우다니? 아마 제너럴 에어로믹스와 호리코시에서는 지금 난리가 났을걸요? 중동 링로드 분쟁에서 가뜩이나 랜서의 신뢰성이 의심받는 판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
이진영도 로봇 업계가 돌아가는 사정 정도는 알고 있다.
중동 국가에서는 한창 링로드에 대한 테러가 하루가 멀다고 터지고 있었다.
링로드를 통해 궤도 태양광이라는 값싼 에너지가 들어오니 가뜩이나 화석연료에 지구온난화 주범이라는 낙인이 찍혀 기름이 안 팔렸기 때문이다.
이미 간위예 전쟁 전에도 내연기관 자동차는 거의 퇴역한 마당에 기름이 남아돌아도 팔 데가 없어졌다.
물론 윤활유나 각종 엔진오일 등에는 아직도 기름이 필요하지만 그 옛날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자동차는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그들에게 궤도 태양광과 궤도 엘리베이터는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여러 곳에 투자한 산유국은 형편이 나았지만 기름 하나 바라보고 있던 중동 국가들은 21세기의 베네수엘라 꼴이 되어 하이퍼 인플레에 허덕였다.
그 중동의 테러 난장판을 로봇이나 엑소슈트 회사들은 자신들의 신무기를 팔아먹을 시연 장소로 써먹었다. 아선이나 이제는 망하기 직전의 호리코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AI개발사인 마이크로웍스가 있었다. 그 부사장 제이미 킴은 중동이 아닌 이곳에서 이진영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이진영은 문득 이 상황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루테넌트의 전투 경험이 EV-1의 딥러닝을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 것 같아요. 인공지능은 파트너와의 딥러닝에 크게 영향을 받으니까요.”
이진영은 그 말에 엉뚱한 대답을 했다.
“녀석은 전사가 아닙니다.”
“예? 워리어? 전사?”
“예, 이브이는 사람 죽이는 기계가 아니라 형사예요. 그것도 아주 유능한 형사.”
제이미는 ‘아아’하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EV-1이 수리되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한참 후에 제이미가 종이컵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오 디텍티브 로봇, 형사 로봇이라…….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부디 EV-1을 잘 부탁합니다. 루테넌트. 이 아이는 우리에게도 굉장히 소중한 아이예요.”
마치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기는 학부모 같은 말이었다. 이진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제이미 킴은 그 말을 남기고 로봇행어 밖으로 나갔다. 정비를 하던 정비사와 로봇들은 제이미에게 머리를 숙였고 그녀의 뒤로 거의 중대급의 로봇과 수행원들이 우르르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삽시간에 EV-1의 정비행어 주변은 썰렁해지고 이진영은 그녀가 남긴 샤넬 넘버 5의 향기를 느꼈다.
“이상한 여자야.”
아직도 EV-1은 정비 중이었고 이진영은 오늘 고생한 파트너를 잠시 쉬게 하고 강력전담부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육군 공안부 요원들이 그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강력전담부에는 이민호가 있었다. 이민호는 빨리 이진영더러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어깨너머로 힐끔 보니 이민호는 택시, 버스회사와 굴다리 ‘가이드 로봇’ 등을 검색하며 열심히 류모성의 보육 로봇을 찾고 있었다.
박승대 팀장이 뭔가를 찾았는지 호들갑을 떨며 보고 했고 이민호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굴다리 가이드 로봇. 저 양반도 고스톱으로 공안 부장 자리를 따신 건 아니시구만.”
이진영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가이드 로봇은 관광객과 함께 굴다리 구석구석을 따라다녔고, 롱꺼의 재밍구역에 들어가지 않는 한 멀쩡한 영상을 로그기록으로 남겨놓게 되어 있다.
이진영은 파트너도 정비 중이었고 경찰관 직무직행법상 로봇이나 인공지능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기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5시 31분. 범인은 월미도 역에서 마지막으로 접촉한 뒤 아무런 반응이 없다.
“놈들도 회의를 하는 중이겠지.”
천수관음 같은 베테랑까지 끼어들었는데 몸값이 너무 적었다.
이진영이 추측한 놈들의 계획대로라면 천문학적인 링로드 일대 개발비용이 목적 아니던가?
게다가 이진영이 놈들의 사업에 족족 딴지를 걸어대면서 놈들도 진땀을 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진영은 교대로 저녁을 허겁지겁 먹는 육군과 정보국 요원들을 책상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파티션 너머로 신희정과 눈이 마주쳤다.
신희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이진영은 다시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책상 위에 다리를 턱 올려놓았다.
“다들 나더러 가마안히 있으라고 하시니 가만있을 수밖에?”
그는 책상에 앉아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다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그의 딸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의 딸은 서울의 사립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얼굴 본 지가 꽤 오래되었다.
이혼한 아빠라도 면접 교섭권이 있지만, 이진영은 워낙 사건으로 바빠서 아이를 볼 시간도 없었다.
이혼 사유도 바쁜 업무 때문이었고 이진영은 별 변명도 하지 않고 아내와 딸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아내와 딸을 보내고 잘 만나지 않는 건 안전상 이유기도 했다. 웡꺼나 오늘 납치범들이 보복을 한다면 가장 유력한 대상은 그의 가족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형사를 가장으로 둔 부부는 이혼하는 편이었다.
“이세화 팀장은 싱글이던가?”
그는 흑심보다도 궁금증이 앞서서 그녀가 결혼반지를 아직 하고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이세화가 겪은 일은 부모로 겪을 수 있는 최악이었다.
아이가 납치당하고 변사체로 되돌아오는 건 과연 누가 견뎌낼 수 있을까?
이세화는 그 무간지옥에 버금갈 고통을 견디며 현장에 있었다.
류모성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이진영 외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이진영은 딸의 사진을 조용히 원래 위치로 되돌려놨다. 그리고 야구모자를 꺼내어 얼굴에 눌러쓰고 잠이나 한숨 자려고 누웠다.
때르르르릉.
다른 곳에서는 교대로 식사를 하고 여전히 북새통 같은 곳이라 전화벨 소리가 묻힌다.
하지만 이진영의 귀에는 천둥이 치는 것처럼 전화벨 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는 바로 검은색 수화기를 들었다.
“중부서 강력부 이진영 경위입니다.”
이진영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키보드를 두드려 전화를 위치 추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와 번호가 떴다.
신고번호 2731-4S50-8T46.
이진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전에 이 전화를 받았을 때 상황이 퍼뜩 떠올랐다.
이민호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이진영이! 뭐하다 이제 왔어! 빨리 방탄조끼 입고 대기하라고! 전 경찰이 널 주목하고 있어!’
그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이제 깨달았고 침을 꿀꺽 삼키고 침착하게 말했다.
“중부서 강력부 이진영 경위입니다. 이거 듣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니 안심하십시오. 도청이나 공안부의 감시는 없습니다.”
신고번호 2731-4S50-8T46에 관한 이야기는 너구리굴 회의에 참여한 사람밖에 모른다.
육군이나 정보국도 신희정이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육군 공안부 요원이 이진영을 힐끔 쳐다봤지만 이진영은 괜히 중국집 전단지를 들고 군만두를 고르는 시늉을 했다.
“어이 군만두 하나하고, 아 시발 뭔 뿌즈다오래. 나 북경어 몰라. 광동어로 말하라고. 아 주인장 바꿔!”
갖은 방법으로 육공을 놀려대던 이진영이라 육공 요원들은 이진영에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진영은 다시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你係劉毛星嘅保育機器人呢? (넌 류모성의 보육 로봇이지?)”
여전히 수화기 너머에서는 대답이 없다.
이진영은 다른 손으로 경찰 메신저를 띄워 최상훈을 클릭했다. 안 그래도 TV로 이진영의 활약(?)을 지켜본 최상훈은 바로 텍스트로 연락을 했다.
– 뭔 일이야? 그리고 전화 냅두고 뭔 텍스트고?
– 형님, 공중전화! 거기에 단서가 있어요!
– 뭔 로봇?
– 아 시팔, 걔! 형님 아는 꼬마!
이진영은 그렇게만 텍스트를 보내고 계속해서 수화기를 잡았다.
“지금 경찰관이 갈 테지만 안심하세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음성이 변조되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면 로봇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니요?”
– 경찰이든 어디든, 믿을 수 있는 건 이진영 경위님뿐입니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이봐요. 지금 가는 사람은 내 사람이에요. 믿어도 된다니까?”
– 놈들은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진영 경위 당신만 나오세요. 주소는 굴다리의 바 ‘쉐라크’.
“이, 이봐요!”
이진영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전화기가 툭하고 끊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진영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 야 이진영! 당한 것 같다!
“뭘 당해요? 형님 괜찮아요?”
– 아니 공중전화에 중계모듈이 달려 있어! 누군가 무선으로 공중전화를 해킹하고 연결한 거야.
이진영의 책상 위에는 아까 찍은 공중전화 사진이 놓여 있었고 그는 뒤늦게 이마를 손바닥을 때렸다.
“아, 아까 그때애.”
전화를 건 사람은 아까 류모성의 보육 로봇을 시켜 공중전화에 작은 중계모듈을 달았다.
아까 전화 부스에 마약에 취한 여자가 들어가 있어서 이진영과 EV-1이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간 부분이었다.
– 이진영, 이거 어떻게? 분석실로 보내?
“아뇨 형님. 도약식이라 추적 불가능할 거예요.”
– 야 그리고 이진영이 아까 뉴스에서 봤는데 너 뭐 하고 다니는 거냐? 그 엑소슈트는 뭐고? 대체 이게 무슨…….
“어? 형님? 미안해요! 공안 씹어먹을 놈들 때문에 방해전파가. 뮈이이이아아아안훼…….”
이진영은 장난스럽게 소리가 늘어지는 흉내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누군 바빠 죽겠는데 장난이나 치고 있는 것 같은 이진영의 모습에 이민호와 정 대령이 그를 노려봤다.
“아! 진짜 군만두는 서비스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언제부터 월미도 인심이 이렇게 야박해졌대?”
그는 팜플렛을 괜히 책상에 던지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진영은 트윈스 야구모자로 얼굴을 덮고 기지개를 켰지만 모자 아래 그의 표정은 곤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