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s RAW novel - Chapter 68
제68화
이세화는 그 고작 일곱 글자를 보자마자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쪽지를 쓴 누군가는 이렇게만 써도 이세화가 완벽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고, 이세화는 단박에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바로 포스트잇을 구겨 변기 속에 던졌다.
그리고 방금 알아낸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지만, 그사이에 이 중사가 간이 재머를 작동시켰는지 안테나가 뜨지 않는다.
“빌어먹을 새끼들.”
이세화는 잠시 후 변기 물을 내리고 나와서 세면대로 향하자 이 중사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시비를 걸어왔다.
“경관님 어째 시원하게 똥은 싸셨나요?”
“아 예에. 덕분에.”
“거참 시원하시겠습니다.”
이세화는 담뱃갑을 들고 이번에는 흡연장으로 나갔지만, 그곳에도 육군 요원들이 쫙 깔려있었다. 그녀는 통제장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흡연실 안으로 들어섰다.
흡연실은 최신식 인공지능 덕트 설비로 굉장히 쾌적했지만, 사람이 좀 많았다.
이세화는 육공 놈들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도 흡연실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랜 형사생활의 감으로 앞뒤좌우에 있는 놈들이 모두 육공 놈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물샐틈없는 방비 속에 그녀는 곁눈질로 흡연자들의 모습 속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흡연실 밖 저 너머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포스가 함께 하기를)”
이세화는 담배를 연달아 두 대나 피우고 이민호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이세화 팀장. 표정이 왜 그래?”
“아, 시간이 되니 좀 긴장이 되네요.”
“그런가?”
이민호도 덩달아 긴장이 되는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세화에게 물었다.
“그 자네에게도 연락은 없지?”
“누구요?”
“이진영이.”
“아, 예 뭐. 육공이 쫓고 있는데 별수 있겠어요?”
“신희정 요원도?”
이세화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 나 꼬신 거 알아요? 나중에 둘이서 좋은 데서 한잔하재요. 잘 아는 바가 있다나?”
이민호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 친구 잘생겨서 인기 많겠어.”
신희정 이야기가 나오자 대화가 뚝 끊겼고 이민호와 이세화는 동시에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플랫폼에 슬슬 도쿄행 한일라인 열차가 들어올 시간이었다.
“슬슬 준비하지. 나도 담배 한 대 피우러 갔다 올게.”
“예, 다녀오세요.”
이세화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이민호를 배웅하고 EV-1을 노려봤다.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니?”
– 팀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의뭉스럽기는. 네 주인, 아니 파트너를 똑 닮았구나?”
이세화는 EV-1을 흘겨봤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괜히 로봇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은 계속 자신을 감시하는 수많은 육공 요원들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스프레이캔을 대합실 의자 사이에 끼워넣고 괜히 티셔츠 옆으로 삐져나온 브라끈을 정리하는 척했다. 그녀는 가슴이 꽤 큰 편이었고 브래지어 밑 권총집에 38구경 치프스페셜 화약 권총을 숨겨놓았다.
원래 그녀는 그걸 검색대를 통과하며 순순히 검색 로봇에게 인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권총을 뽑고는, 팔짱을 끼는 척하며 팔걸이 사이로 EV-1에게 건넸다.
“잠시 맡아줄래?”
EV-1은 그녀가 건네는 권총을 받아서 옆구리에 있는 수납함에 집어넣었다.
– 일본과 외교적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딴 건 내 알 바 아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데 맨몸으로 들어가라고?”
– 적진이요?
EV-1은 육군 공안과 경찰본청 공안 요원들이 쉴새 없이 돌아다니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뭔 일 있으면 잘 부탁해. 츄바카.”
EV-1은 ‘잘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같은 흔해 빠진 안도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로봇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다.
대합실에 있던 모든 요원들이 열차 승강장 쪽으로 미친 듯이 뛰었고 무장한 야전군 병사들 역시 승강장으로 뛰었다.
열차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들은 무슨 전쟁이 터진 것 같은 분위기에 깜짝 놀라 우왕좌왕했다.
그 북새통의 중심에는 EV-1과 이세화가 있었다. 로봇과 여경은 수많은 군인들과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열차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서울역 승강장은 간위예 전쟁 전에도 여러 번 리모델링을 거쳤고, 전쟁이 끝난 지금은 옛날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하로는 세 개 선의 고속 라인이 깔려있고, 지상으로는 한일 평화의 철도를 비롯해 국제선이 네 개나 지나간다. 거기에 지하철역에 지상 모노레일인 서울 경기 탄환 라인에.
서울역과 남영역의 주변 건물들을 헐고 옆으로 죽 늘어난 수많은 선로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지금도 화물열차와 국내 특급열차 제비호가 한쪽 선로에 멈춰서서 화물과 승객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세화가 내려가는 곳은 서울역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일반 열차와 달리 아예 개찰구가 공항처럼 검색대였고 모든 사람은 3차원 스캐너를 통해 스캔을 한 후, 목적지에 따라 여권을 제시해야 했다.
물론 열차는 부산까지 34분이면 도달하기에 국내선 이용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티켓값이 비싸서 부산이나 제주까지 가는 용도로는 잘 타지 않았다.
이세화의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속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간다. 딱 봐도 사복경찰로 보이는 사람들도 이미 먼저 수속을 마치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작전을 위해 11시 11분 열차의 티켓 3백 여장이 건교부와 일본 대사관의 협의하에 배정되었고 수많은 경찰과 군인들이 이미 열차 안에 바글거렸다.
범인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든, 또 어디에서 열차에 탑승하든 이 고속열차를 벗어날 수는 없다.
– 11시 11분 도쿄행, 도쿄행 열차 수속 중입니다. 수속 시간이 걸리니 10분 전에 수속을 끝내주십시오.
역의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관광객들과 여행객들이 뒤섞여서 혼잡한 가운데 이세화는 육공에서 관리하는 검색대 앞에 섰다.
– 무기나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셨다면 이곳 검색대에 맡겨 주십시오.
검색 로봇은 기계적인 말을 반복하며 이세화의 앞에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녀는 브라 밑에서 권총집을 떼어 바구니에 넣고 다목적 아미나이프 역시 넣었다.
– 스캔하겠습니다. 여권을 든 채로 스캐너 앞에 서 주십시오.
하얗게 불빛이 번쩍하며 이세화의 전신을 스캐닝했다.
아마 검색대 너머에서는 그녀의 알몸은 물론 로봇 의수 등 기계 삽입물까지 다 검색이 될 테지만 인간은 그걸 볼 수 없다.
이세화의 몸에서 별다른 이물질이 발견되지 않자 로봇은 기계적인 태도로 인사했다.
– 한일 평화의 철도에 탑승하신 걸 환영합니다. 이 열차는 한일의 평화의 시대를 시작하는…….
이세화는 로봇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검색대를 통과했다. 마침 그녀의 옆에도 로봇이 하나 검색을 마치고 통과했고 그녀와 함께 잠시 나란히 걸었다.
이세화는 왠지 옆에 있는 로봇이 낯설지 않았다. 로봇은 인간의 스킨이 씌워진 고급형 모델이었고 얼핏 보면 인간인지 로봇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깐…….”
그녀가 뭔가를 물으려고 했지만 로봇은 어느새 혼잡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세화가 걸음을 멈춘 걸 보고 이민호가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장님. 그냥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아는 사람?”
이민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아니에요. 서울역이다 보니 뭐 아는 사람이 맞겠죠. 제 직장도 여기였고. 관광객도 많고…….”
이세화는 중언부언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다가 괜히 열차 티켓을 확인했다. 교통부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위해 열차의 맨 꼬리칸 전체와 그 앞 열차 좌석 일부를 작전을 위해 배정했다.
혹시나 폭탄테러라도 터지게 되면 꼬리칸만 박살 내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덕분에 이세화는 승강장을 얼마 걷지 않고 꼬리칸에 올라탔다.
꼬리칸에는 김상현과 23대응팀장 등 중부서 형사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이세화의 좌석은 로봇 대기석이 있는 맨 앞자리였고, 이미 EV-1은 검색을 마치고 로봇 대기석에 서 있었다. 그녀는 EV-1의 옆구리를 힐끔 보고 자리에 앉았다.
“와우, 똥도 안 나오는데 잠도 잘 안 오시겠어요?”
“잠을 자면 안 되죠. 중요한 작전인데.”
구면이다. 그녀의 옆자리는 아까 화장실을 갈 때 따라왔던 육공 여자 요원이 타고 있었다.
이세화는 굉장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육공 요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종이신문을 펴고 기사를 읽었다.
그녀의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면 영 어색한 사람들 투성이었다.
육공 요원들은 육공 특유의 위압적인 태도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젊은 또래의 관광객들이 웃고 떠들지도 않고 가만 있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한창 유럽이나 일본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워야 할 사람들이 피곤에 절어 출퇴근하는 중년 가장처럼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이세화는 한숨을 쉬며 다시 앞을 쳐다봤다. 건너편에는 이민호 공안 부장이 앉아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괜찮을 거야. 걱정마.”
“예, 부장님. 아마도요.”
열차는 정확히 11시 11분에 출발했다. 열차가 출발하는 것과 동시에 경찰, 군인들은 제각각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상황을 확인했다.
아직까지 범인의 접촉은 없다. 군경 등 지휘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각종 영상들을 이잡듯이 살펴보고 있었다.
이세화는 무슨 신줏단지를 바라보듯 전화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보고 육공 요원이 픽 비웃었다.
이세화는 차창으로 눈을 돌렸다.
열차는 고속철도답게 앗 하는 순간 서울 시가지를 빠져나왔다. 부산까지 34분 걸리는 만큼 지상을 달리는 구간은 거의 제트기가 날아가는 것 같은 속도였다.
하도 열차가 빠르게 나아가다 보니 광고판의 조명이나 유흥업소의 불빛들이 뒤섞여 빛의 선이 뒤로 죽죽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이세화는 차창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달랬다. 그녀는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응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 열차 안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녀는 ‘오더 66’이라고 적혀 있던 쪽지를 믿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상황을 따져보면 믿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이세화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몇 가지 의문에 ‘오더 66’라는 키워드를 집어넣으면 깔끔하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열차는 출발한 지 몇 분도 안 되어 수원을 지났다.
이 열차는 오송과 부산에서 한 번 정차하고 바로 해상라인을 따라 대마도로 향한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이세화는 세이코 군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차가 출발한 지 6분째 만에 오송에 다다라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빛의 선으로 보였던 각종 조명들도 열차가 느려지며 제대로 보였고 이제는 초거대 시가지가 된 오송역의 높다란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송역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허허벌판이라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 오송은 대전을 제치고 중부권 최대의 도시로 거듭나 있었다.
수많은 빌딩들에는 수직농장이나 IT 업체들이 입주해있었고, 서울에 있는 많은 기업들이 오송으로 이주하기도 했다.